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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皇帝의 1차巡撫

solpee 2019. 10. 3. 13:33

 

《秦[Qín]紀2 始皇帝 28 (壬午, 前219

 

 

 1.시황제가 동쪽에 있는군과 현을 행차하다가 추역산에 올라서 돌을 세워 공적과 업적을 칭송하였다. 이에 노의 유생 70명을 불러 모아 태산의 아래에 이르러서 봉선에 관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여러 유생 가운데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1. 始皇東行郡、縣,上鄒嶧山,立石頌功業。班《志》:魯國鄒縣,嶧山在北。應劭曰:邾文公遷于繹,卽此。《括地志》:鄒嶧山在兗州鄒縣南二十二里。嶧,音亦。於是召集魯儒生七十人,孔穎達曰:儒之言優也,柔也,能安人,能服人。又,儒者,濡也,以先王之道能濡其身。至泰山下,議封禪。諸儒或曰:

 

 "옛날에 봉선할 때에는 창포로 수레를 감싸서 산의 흙ㅇ나 돌, 풀과 나무를 다치게 하는 것을 싫어하였고, 땅을 쓸고서 제사를 지내고 풀로 자리를 만들어 쓴다고 하였습니다."

「古者封禪,爲蒲車,惡傷山之土石、草木;掃地而祭,席用【章:十二行本「用」作「因」;乙十一行本同。】葅稭。」

 

 의논하는데 각기 차이가 있었다. 시황제는 그들의 의견을 그대로 시행해 쓰기 어렵게 되니, 이로 말미암아서 유생들을 쫓아냈다. 드디어 수레가 다니는 길을 내고 태산의 남쪽에서부터 정상에 올라서 돌을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고, 북쪽 길로 내려와서 양보산에서 선을 거행하였다.

 議各乖異。始皇以其難施用,由此絀儒生。《括地志》:泰山在兗州博城縣西北三十里,一曰岱宗。服虔曰:封者,增山之高;禪,廣地也。張晏曰:天高不可及,於泰山上立封禪以祭之,冀近神靈也。項威曰:封泰山,告太平,升中和之氣於天。祭土爲封,謂負土於泰山爲壇而祭也。除地爲墠;後改「墠」爲「禪」。《晉太康地記》曰:爲壇於泰山以祭天,示增高也;爲墠於梁父以祭地,示廣也。《白虎通》曰:王者易姓而起,必升封於泰山之上者何?因高告高,順其類,故升封者增高也。下禪梁父之基,廣厚也。刻石紀號者,著己之功迹以自勸也。增太山之高以報天,附梁父之基以報地。惡,烏路翻。師古曰:蒲車,以蒲裹輪。「葅稭」,班《志》作「苴稭」。如淳曰:苴,讀如租;稭,讀曰戛。晉灼曰:苴,藉也;師古曰:茅藉也。「苴」,本作「葅」,假借用。應劭曰:稭,藳本,去皮以爲席。絀,與黜同,黜退也。而遂除車道,上自太山陽至顚,立石頌德;從陰道下,禪於梁父。師古曰:山南曰陽,山北曰陰。班《志》,泰山郡有梁父縣。師古《註》曰:以山名縣。《括地志》:梁父山在兗州泗水縣北八十里。父,音甫。

 

 그 예식은 자못 태축이 옹성에서 상제에게 제사지낼 때 쓰는 방법을 많이 채용하였으며, 봉장하는 것은 모두 비밀로 하여 세상에서는 얻어서 기록할 수가 없었다.

 其禮頗采太祝之祀雍上帝所用,班《表》:奉常之屬有雍太祝令、丞,蓋漢仍秦制也。秦作畤於雍以祀上帝,今采其禮以爲封禪禮。而封藏皆祕之,世不得而記也。

 

 이에 시황제는 드디어 동쪽으로 바다에 가서 유람하고 명산·대천과 여덟 신(天主;天齋淵水, 地主;太山梁父, 兵主;蚩尤, 陰主;三山,陽主;之罘山,月主;萊山,日主;成山,時主;琅邪山)에게 예로 제사를 지냈다.

 시황제는 남쪽으로 가서 낭야산에 올라가서 크게 즐기면서 석 달을 머물렀고, 낭야대(원래 越王 句踐이 쌓았는데, 이 때 3만 호를 동원 확장)를 만들고 돌을 세워서 덕을 칭송하게 하였고 자기의 뜻대로 되었음을 밝혔다.

 於是始皇遂東游海上,行禮祠名山、大川及八神。《封禪書》:八神:一曰天主,祠天齊淵水;二曰地主,祠太山、梁父;三曰兵主,祠蚩尤;四曰陰主,祠三山;五曰陽主,祠之罘山;六曰月主,祠之萊山;七曰日主,祠成山;八曰四時主,祠琅邪。或曰:八神,齊自太公以來祠之。始皇南登琅邪,大樂之,留三月,作琅邪臺,立石頌德,明得意。班《志》,琅邪郡有琅邪縣。《山海經》:琅邪臺在勃海間,琅邪之東。郭璞曰:琅邪臨海邊,有山曰琅邪臺。越王句踐徙琅邪,作觀臺以望東海。《史記》曰:始皇徙三萬家於臺下。是其所作因越之舊也。《括地志》:琅邪山在密州諸城縣東南百四十里;始皇立層臺於山上,謂之琅邪臺。邪,音耶。大樂之,樂琅邪之風景也。樂,音洛。

 

 처음에, 연인 송무기(火仙)와 선문자고(갈석산 선인)의 무리들이 선도와 형해소화(形解銷化;늙으면 몸은 풀어져서 녹아 없어지고 신선이 됨) 의 술책이 있다고 하였는데, 연과 제의 어리석고 괴이한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이를 전하고 익혔다.

 初,燕人宋毋忌、羨門子高之徒稱有仙道、形解解,佳買翻。銷化之術,燕、齊迂怪之士皆爭傳習之。《道經》:月中仙人宋毋忌。《白澤圖》云:火之精曰宋毋忌。蓋其人火仙也。張曰:羨門子高,仙人,居碣石山上。服虔曰:形解,尸解也。張晏曰:人老而解去,故骨如變化也。今山中有龍骨,世謂之龍解骨化去。迂,羽俱翻,又憂俱翻。

 

 제의 위왕(1대)과 선왕(2대), 연의 소왕(4대)도 모두 그들의말을 믿고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에 나아가서 봉래, 방장, 영주를 찾게 하였는데, 이 세산신은 발해 가운데에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지가 않다고 하였다. 걱정거리는 또 도착할 때쯤 되면 바람이 일어서 배를 끌어간다는 것이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도착하였더니, 여러 선인들과 불사약이 모두 있었다고 하였다.

 自齊威王、宣王、燕昭王皆信其言,使人入海求蓬萊、方丈、瀛洲,云此三神山在勃海中,去人不遠。患且至,則風引船去。嘗有至者,諸仙人及不死之藥皆在焉。

 

 시황제가 바다에 이르게 되자 여러 방사인 제인 서시 등이 다투어 편지를 올려서 이를 말하며, 재계하고 남녀 아이들과 더불어 이를 구하라고 청하였다. 이에 서시를 파견하며 남여 어린아이들 수천 명을 징발하여 바다로 들어가 이를 구하도록 하였다.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왔다갔다하다가 모두 바람 때문이라고 풀어서 말하였다.

 "아직 이를 수는 없었으나 멀리서는 바라 보았습니다."

 及始皇至海上,諸方士齊人徐巿等爭上書言之,太史公曰:嬴姓分封者爲徐氏。《姓譜》曰:皋陶子伯益佐禹有功,封其子若木於徐。請得齊戒與童男女求之。齊戒之齊,讀曰齋。於是遣徐巿發童男女數千人入海求之。船交海中,皆以風爲解,師古曰:自解說云「爲風不得而至」。自解,猶今言分疏。曰:「未能至,望見之焉。」

 

 시황제가 돌아오는데, 팽성을 지나고서 재계를 하고 사당에 기도하고, 주의 정을 사수에서 나오게 하려고 사람 1천 명으로 하여금 물속에 들어가 이를 찾게 하였으나 찾지를 못하였다. 마침내 다시 서남쪽으로 가서 회수를 건너서 형산과 남군에 갔다. 장강에 배를 띄워 상산의 사당에 이르렀는데, 큰바람을 만나서 거의 강을 건널 수가 없게 되었다. 황상이 박사에게 물었다.

 始皇還,過彭城,班《志》,楚國有彭城縣,古彭祖國。齋戒禱祠,欲出周鼎泗水,《水經》:泗水出魯國卞縣北山,東南過彭城縣,又東過下邳縣入淮。時人相傳以爲宋太丘社亡而周鼎沒於泗水中,故祠泗水,欲出周鼎。使千人沒水求之,弗得。乃西南渡淮水,《水經》:淮水出南陽郡平氏縣桐柏山,東南至淮陵入海,行三千餘里。之衡山、南郡。班《志》,衡山在長沙國湘南縣之東南。《括地志》:衡山,一名岣嶁山,在衡州湘潭縣西四十一里。漢衡山國在江北;秦拔楚郢,置南郡;唐爲荊州江陵府。之,往也。浮江至湘山祠,逢大風,幾不能渡。幾,居依翻。上問博士曰:

 

 "상군은 어떤 산이오."

 대답하였다.

 "듣건데, 요의 딸이며 순임금의 처인데 이곳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시황제는 크게 노하여 형도 3천 명으로 하여금 모두 상산의 나무를 베어버리게 하여 그 산을 민둥산으로 만들었다. 드디어 남군에서 무관을 거쳐서 돌아왔다.

「湘君何神?」對曰:「聞之:堯女,舜之妻,葬此。」班《志》:湘水出零陵郡零陵縣陽朔山,北至酃入江。《括地志》:黃陵廟在岳州湘陰縣北五十七里,舜二之神。二妃冢在湘陰縣一百六十里青草山上。盛弘之《荊州記》:青草湖,南有青草山,湖因山而名。舜陟方死於蒼梧,二妃死於江、湘之間,因葬焉。博士以儒學爲官。漢成帝詔曰:儒林之官,四海淵源。宜皆明於古今,溫故知新,通達國體,故謂之博士。始皇大怒,使刑徒三千人皆伐湘山樹,赭其山。赭,音者,赤也。遂自南郡由武關歸。

 

 2.처음에, 한인 장량은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위로 5세에 걸쳐서 한에서 재상을 지냈다. 한이 망하게 되자 장량은 천금을 흩어서 한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2. 初,韓人張良,其父、祖以上五世相韓。張良大父開地,相韓昭侯、宣惠王、襄哀王;父平,相釐王、悼惠王,凡五世。及韓亡,良散千金之產,欲爲韓報仇。爲,于僞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