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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信의 20만과 王翦의 60만.

solpee 2019. 9. 30. 05:28

 

《秦[Qín]紀1 始皇帝 21 (乙亥, 前226

 

 

 1. 겨울, 10월에 왕건이 계(북경)을 점령하고, 연왕과 태자는 그들의 정예의 병사를 인솔하고 동쪽으로 가서 요동을 보위하려하니 이신이 이들을 급하게 쫓았다.

 1. 冬,十月,王翦拔薊,薊,音計。燕王及太子率其精兵東保遼東,李信急追之。

 

 대왕 조가가연왕에게 편지를 보내 태자 희단을 죽여서 바치게 하였다. 희단은 연수 가운데 숨었는데, 연왕이 사신으로 하여금 희단을 참수하게 하여 왕에게 바치고자 하였으나, 왕이 다시 군사를 보내어 그를 공격하였다.

 代王嘉遺燕王書,遺,于季翻。令殺太子丹以獻。丹匿衍水中,《索隱》曰:衍水在遼東。燕王使使斬丹,欲以獻王,王復進兵攻之。復,扶又翻。

 

 왕분이 초를 치고 10여개 성을 빼앗았다. 왕이 장군 이신에게 물었다.

 "나는 형을 빼앗고자 하오. 장군이 헤아려본다면 몇 명을 쓰면 되겠소?"

이신이 말하였다.

 "20만을 쓰는데 불과할 것입니다."

 王賁伐楚,賁,音奔,翦之子也。取十餘城。王問於將軍李信曰:「吾欲取荊,王父莊襄王諱楚,故謂楚爲荊。於將軍度用幾何人而足?」度,徒洛翻。李信曰:「不過用二十萬。」

 

 왕이 왕전에게 물으니, 왕전이 말하였다.

 "60만 명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드디어 이신과 몽념으로 하여금 20만 명을 거느리고 초를 치게 하였더니 이어서 왕전이 병이 들었다고 사과하고 빈양으로 돌아갔다.

  王以問王翦,王翦曰:「非六十萬人不可。」王曰:「王將軍老矣,何怯也!」遂使李信、蒙恬將二十萬人伐楚;王翦因謝病歸頻陽。王翦,頻陽人也。班《志》,頻陽縣屬京兆,秦厲公所置。應劭《註》曰:縣在頻水之陽。杜佑曰:美陽本漢頻陽縣,故城在縣西南三十里。宋白曰:因界內頻陽山而名。

 

 

 

 

《秦[Qín]紀1 始皇帝 22 (丙子, 前225

 

 

 1. 왕분이 위를 치는데, 황하의 물을 끌어서 대량에 물을 댔다. 석 달이 되어 성이 무너졌다. 위왕 위가가 항복하자 그를 죽이니 드디어 위는 멸망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서 안릉군에게 말하였다.

 "과인은 500리의 땅으로 안릉을 바꾸고 싶소."

 안릉군이 말하였다.

 1. 王賁伐魏,引河溝以灌大梁。班《志》:陳留郡浚儀縣,故大梁,狼湯水所經也。《水經》:渠水出滎陽北河,東南流至浚儀縣。《註》云:始皇使王賁攻魏,斷故渠,引水東南出以灌大梁,因謂之梁溝。三月,城壞。魏王假降,殺之,遂滅魏。降,戶江翻。

王使人謂安陵君曰:「寡人欲以五百里地易安陵。」安陵君曰:

 

 "대왕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큰 땅을 가지고, 작은 것으로 바꾸자고 하시니 심히 다행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신이 위의 먼저 임금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바라건데 끝까지 지키겠으며 감히 바꾸지 못하겠습니다."

 왕은 의롭다고 여겨서 이를 허락하였다.

「大王加惠,以大易小,甚幸。雖然,臣受地於魏之先王,願終守之,弗敢易!」王義而許之。

 

 2. 이신이 평여를 공격하였고, 몽념은 침을 공격하여 초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이신이 또 언영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다. 이에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몽념과 성보에서 만났다. 초인들이 이어서 그들의 뒤를 따라와서 3일 밤낮으로 쉬지 못하게 하여 이신을 대패시키고, 두 개의 성벽으로 들어가서 일곱 명의 도위를 죽이니, 이신이 도망하여 돌아왔다.

 2.李信攻平輿,班《志》:汝南郡有平輿縣,春秋沈子之國。輿,音預,《史記正義》讀如字。蒙恬攻寢,班《志》:汝南郡有寢縣。應劭曰:孫叔敖子所邑之寢丘是也;世祖更名固始。徐廣曰:寢,今固始寢丘。師古曰:寢,子袵翻。劉仲馮曰:據後淮陽國已有固始,此寢疑自別地。余謂郡縣離合無常,蓋後來併寢入固始也。杜佑曰:潁州治汝陰縣,有寢丘,秦蒙恬攻寢卽此。大破楚軍。信又攻鄢郢,破之。此鄢郢非楚故都之鄢郢也。楚故都爲白起所取,秦已置南郡。據楚都壽春,以壽春爲郢,則其前自郢徙陳,亦必以陳爲郢矣。然則此郢乃陳也。鄢卽潁川之鄢陵,與平輿、城父地皆相近。或曰:「鄢郢」當作「鄢陵」。於是引兵而西,與蒙恬會城父。班《志》,沛郡有城父縣。《索隱》曰:在汝南卽良鄕。《史記正義》曰:言引兵而會城父,則是汝州郟城縣東父城者也。《括地志》:汝州郟城縣東四十里有父城故城,卽服虔云「城父,楚北境」者也。又許州葉縣東北四十五里亦有父城故城,卽杜預云「襄城,城父縣」者也。此二城,父城之名耳,服虔城父是誤也。《左傳》及《水經註》云:楚大城城父,使太子建居之。《十三州志》云:太子建所居城父,謂今亳州城父,是也。此三家之說,是城父之名。班《志》云,潁川父城縣、沛郡城父縣,據縣屬郡,其名自分。楚人因隨之,三日三夜不頓舍,大敗李信,入兩壁,殺七都尉;此郡都尉將兵從伐楚者也。秦列郡有守,有尉,有監,然秦、漢之制,行軍亦自有都尉。敗,補邁翻。李信奔還。

 

 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고 자신이 빈양에 가서 왕전에게 사과하여 말하였다.

 "과인이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아니하니, 이신이 과연 진의 군사를 욕 되게 하였소. 장군은 비록 병들었으나 다만 과인을 차마 버리기야 하겠소?"

 王聞之,大怒,自至頻陽謝王翦曰:「寡人不用將軍謀,李信果辱秦軍。將軍雖病,獨忍棄寡人乎!」

 

 왕전이 사과하였다.

 "병이 들어서 거느릴 수 없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만하시고, 다시는 말하지 마시오."

 왕전이 말하였다.

 "반드시 부득이하여 신을 쓰신다면 60만 명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장군의 계책을 들을 것이오."

 王翦謝:「病不能將。」王曰:「已矣,勿復言!」將,卽亮翻。復,扶又翻。王翦曰:「必不得已用臣,非六十萬人不可!」王曰:「爲聽將軍計耳。」

 

 이에 왕전이 60만 명을 거느리고 초를 쳤다. 왕이 패상까지 나와서 송별하니, 왕전이 좋은 농토와 집을 요구하는 것이 대단히 많았다. 왕이 말하였다.

 "장군이 떠나는 마당에 어찌하여 가난할까 걱정을 하고 있소?"

 於是王翦將六十萬人伐楚。王送至霸上,應劭曰:霸上,地名,在霸水上,在長安東三十里。霸水,古之滋水,秦穆公更名。王翦請美田宅甚衆。王曰:「將軍行矣,何憂貧乎!」

 

 왕전이 말하였다.

 "대왕의 장수가 되었지만 공로를 세워도 후에 책봉되지 못하였는데, 그러므로 대왕께서 지금 신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농토와 집을 청하여 자손들의 기업을 삼고자 할 뿐입니다."

 왕이 크게 웃었다. 왕전이 떠나서 관에 이르러 사자로 하여금 돌아오면 좋은 농토를 달라고 청하기를 다섯 차례나 하였다.

 王翦曰:「爲大王將,有功,終不得封侯,故及大王之嚮臣,以請田宅爲子孫業耳。」王大笑。王翦旣行,至關,此當是出武關也。使使還請善田者五輩。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장군은 재물을 비는 것이 또한 대단히 심합니다."

 왕전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왕은 거칠고 사람을 못 믿으니 이제 나라 안에 있는 갑사를 비워서 오로지 나에게 위탁하였는데, 내가 농토와 집을 많이 청하여 자손들을 위하여 스스로 굳게 하고자 하지 않으면 돌아보건데 왕으로 하여금 앉아서 나를 의심하게 하는 것이오."

 或曰:「將軍之乞貸亦已甚矣!」貸,與貣同,吐得翻,從人求物也。王翦曰:「不然。王怚中而不信人。《史記註》:怚,音麤。徐廣曰:一作「粗」。今空國中之甲士而專委於我,我不多請田宅爲子孫業以自堅,顧令王坐而疑我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