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衰至便驕,何常之有!/이지러짐을 알면 교만하지 않고, 교만하면서 어찌 항상할 수 있겠는가?

solpee 2019. 8. 31. 09:52

 

紀4 武帝 普通 3 (壬寅, 522

 

 

 3. 위의 송운이 혜생과 더불어 낙양에서부터 서쪽으로 4천리를 가서 적령(청해 황중현 서쪽)에 도착하였다가 마침내 위의 국경을 나갔다. 또한 서쪽으로 가서 2년이 되어 건라국에 도착하였다가 돌아왔다.

 2월에 낙양에 도착하였는데, 불경 170부를 얻었다.

 3.春,正月,魏宋雲與惠生自洛陽西行四千里,至赤嶺,乃出魏境,又西行,再期,至乾羅國而還。二月,達洛陽,得佛經一百七十部。

 

 

紀4 武帝 普通 4 (癸卯, 523

 

 10.위의 평은문선공 최광의 병세가 악화되자, 위황제가 친히 그를 위로하여 찾아보고, 그의 아들 최려를 제주 자사로 삼고, 그를 위하여 주악을 울리고 유람을 중지하였다. 정유일(15)에 최광이 죽자, 황제가 가서 그를 위하여 통곡하며 상선을 줄였다.

 10.冬,十月,魏平恩文宣公崔光疾篤,魏主親撫視之,拜其子勵為齊州刺史,為之撤樂,罷游眺。丁酉,光卒,帝臨,哭之慟,為減常膳。

 

 최광은 너그럽고 온화하며 낙관적이고 착하여 종일토록 즐거운 마음이었으며, 일찍이 화를 낸 적이 없다. 우충과 원차가 권력을 휘두를 때에도 최광의 옛 덕을 가지니 모두가 그를 존경하였으며 일의 대부분은 물어서 결정하였으나 배·곽·창하왕의 죽음은 구원할 수 없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를 장우와 호광①에 비유하였다.

 光寬和樂善,終日怡怡,未嘗忿恚。於忠、元義用事,以光舊德,皆尊敬之,事多資決,而不能救裴、郭、清河之死,時人比之張禹、胡廣。

 

 최광이 또한 죽자, 도관상서 가사백을 천거하여 시강으로 삼앗다. 황제는 가사백을 좇아《춘추》를 배웠으며, 가사백은 비록 귀한 자리에 있었지만 몸을 굽혀 선비들을 예우하였다.

 光且死,薦都官尚書賈思伯為侍講。帝從思伯受《春秋》,思伯雖貴,傾身下士。

 

 어떤 사람이 가사백에게 물었다.

 "공은 어찌하여 교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가사백이 말하였다.

 "쇠퇴할 일이 닥치는데 곧 교만하면, 어찌 그렇게 늘 유지할 수 있겠소?"

 당시 사람들이 아름다운 말로 생각하였다.

 或問思伯曰:「公何以能不驕?」思伯曰:「衰至便驕,何常之有!」當時以為雅談。

 

 

①.張禹는 한 성제 때에 재상을 지내고 안창후에 책봉되었다. 외척이 정권을 전횡할 때 황제가 정사에 대해 물어보아도 직언하지 않았다.

 胡廣은 한 안제 때 사도를 지냈으며, 정책으로 환제를 옹립하고 안제·순제·충제·질제·환제·영제를 섬겼던 인물로 직간하지 않고 자리만 보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