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置射雉場二百九十六處/동혼후는 꿩 사냥터를 296곳을 설치하였다.

solpee 2019. 8. 19. 19:17

 

《齊紀8 東昏侯 永元 元年 (己卯, 499

 

 

 29. 남제 6대왕 동혼후 소보권은 진현달을 죽이고 나자 더욱 스스로 교만하고 방자하여 점차 나가서 유람하러 다녔으며, 또한 사람들이 그를 보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매번 나갈 때마다, 지나는 곳에 있는 민가를 텅비게 하고, 오직 빈집만 두게 하였다.

 29.十二月,帝旣誅顯達,益自驕恣,漸出遊走,又不欲人見之;每出,先驅斥所過人家,唯置空宅。所謂屛除也。

 

 경호원이 북을 치면 경호원들이 에워싸니 북소리를 들은 곳에서는 곧바로 호응하여 도주하여야 하는데,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었다. 금제를 범하는 사람들은 응당 손수 죽였다.

 尉司擊鼓蹋圍,晉初洛陽置六部尉。江左建康亦置六部尉。鼓聲所聞,聞,音問。便應奔走,不暇衣履,犯禁者應手格殺。格,擊也。

 

 한 달에 무릇 20여 번이나 나갔는데, 나갈 때는 번번이 정한 곳을 말하지 않고 동서남북으로 말을 타고 달려보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항상 3,4경 중에 북소리가 사방에서 나고 불빛이 하늘을 밝히며 번기와 창을 든 군사들이 도로를 가로질렀다.

 一月凡二十餘出,出輒不言定所,東西南北,無處不驅。常以三四更中,更,工衡翻。鼓聲四出,火光照天,幡戟橫路。

 

 사민들이 떠들썩하게 달려가 서로 좇고 노인과 아이들은 두렵고 놀라서 우는 소리가 길을 메웠으며, 곳곳마다 금지되고 단절되어 지나가야 할 곳을 알지 못하였다. 4민은 할 일을 버리니, 나무를 하고 풀을 베는 길도 끊어지고 길상한 일이나 흉상한 일도 처리할 때를 잃었으며, 젖먹이의 어머니나 임신부는 기생하게 하고 혹 병자를 수레에 싣고 가다가 시신처럼 버리기도 하였고, 초빈하거나 장사를 치를 수 없었다.

 士民喧走相隨,老小震驚,啼號塞路,處處禁斷,號,戶高翻。塞,悉則翻。斷,音短。不知所過。言雖奔走而路斷,不知何所可過。四民廢業,樵蘇路斷,吉凶失時,吉,謂冠、婚;凶,謂喪葬;皆不得以時而行事。乳母寄產,乳,儒遇翻,育也。或輿病棄尸,不得殯葬。

 

 거리마다 휘장을 매달아 고장(높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이라고 하엿는데, 무기를 든 사람을 두고 방어하고 지켰으므로 그를 '병제'라고 말하고 또한 그를 '장위'라고도 말하였다.

 巷陌懸幔爲高鄣,置仗人防守,謂之「屛除」,幔,莫半翻。仗人,謂執仗之人。屛,必郢翻。亦謂之「長圍」。

 

 일찍이 심공성에 도착하였는데, 한 부인이 해산하게 되어서 떠나지 않으니, 그것으로 인하여 배를 가르고 그것이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보았다.

 嘗至沈公城,有一婦人臨產不去,因剖腹視其男女。

 

 또한 일찍이 정림사에 도착하였는데, 어떤 사문이 늙고 병들어서 도망할 수가 없어 풀 사이에 숨었는데, 좌우의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그를 쏘도록 하니 수백개의 화살이 함께 발사되었다. 동혼후는 힘이 좋아서 활을 당기는데 3곡5두에 이르렀다.

 又嘗至定林寺,定林寺,舊基在蔣山應潮井後。有沙門老病不能去,藏草間;命左右射之,百箭俱發。射,七亦翻。帝有膂力,牽弓至三斛五斗。

 

 또한 깃발을 들기를 좋아하여 백호당은 높이가 7장5척이었는데, 이빨로 그것을 떠 올리고 이빨이 부러져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스스로 깃대를 드는 기계를 제작하고 기의는 금과 옥으로 장식하고서 시위들이 옆을 가득 채운 가운데 여러 가지 변태적 행동을 즐기면서도 일찍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又好擔幢,白虎幢高七丈五尺,於齒上擔之,折齒不倦。好,呼到翻。擔,都甘翻。幢,傳江翻,旛也。高,居號翻。自制擔幢校具,校具,猶言器械也。伎衣飾以金玉,伎,渠綺翻。侍衞滿側,逞諸變態,曾無愧色。

 

 동야의 영병 유영운에게 말 타는 법을 배우고, 항상 짜서 만든 고습을 입고서, 금박모를 쓰고, 칠보로 장식한 창을 잡고, 급히 바짓가랑이를 꾸며서 묶고 비와 눈을 무릎쓰는데, 함정을 피하지 않았다.

 學乘馬於東冶營兵俞靈韻,常著織成袴褶,金薄帽,著,則略翻。褶,音習。執七寶矟,急裝縛袴,凌冒雨雪,不避阬穽。

 

 말을 빨리 달리다가 갈증이 나거나 피곤하면 번번이 말에서 내려서 허리 옆에 찬 표주박 그릇을 풀어서 물을 떠 그것을 마시고, 다시 말에 올라 달려갔다.

 馳騁渴乏,輒下馬,解取腰邊蠡器,酌水飲之,冒,莫北翻,又如字。穽,疾正翻。騁,丑郢翻。蠡,憐題翻,瓠瓢也,今謂之馬杓。《爾雅翼》曰︰蠃,古字通於蠡,蠃之爲量小。《傳》曰︰以蠡測海,言不能極其量也。復上馬馳去。復,扶又翻。上,時掌翻。

 

 또 무뢰 소인배들 가운데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말을  쫓아오게 하고, 주위에는 500명으로 하여금 항상 자신을 좇도록 하였다.

 又選無賴小人善走者爲逐馬左右五百人,常以自隨。

 

 혹은 시장 옆에 있는 총애하는 신하의 집을 지날 때면 빙글빙글 돌면서 춤추듯 성읍을 두루 돌아다녔다. 혹은 교외에 나가서 꿩 사냥을 하였는데, 꿩 사냥하는 장소를 296곳에 설치하고 분주하게 왕래하니, 거의 쉴 겨를이 없었다.

 或於市側過親幸家,環回宛轉,周徧城邑。或出郊射雉,置射雉場二百九十六處,奔走往來,略不暇息。史言帝之昏狂,甚於宋[衍]鬱林王。射,而亦翻。

 

 

 30. 왕숙이 위의 백관들의 관품을 제정하면서, 모두가 강남의 제도와 같게 하였는데, 무릇 9품이 있었고, 품에는 각각 둘이 있었다. 시중 곽조가 이부상서를 겸했다.

 30.王肅爲魏制官品百司,皆如江南之制,凡九品,品各有二。九品,每品各有正、從二品,歷隋、唐至今猶然。侍中郭祚兼吏部尚書。

 

 곽조는 청렴하고 근신하였으며, 관위를 중시하고 아꼈으며, 매번 선발하고 제수할 때마다 비록 그에 적합한 사람을 얻었을지라도 망설이길 오랫동안 하였고, 그런 후에 붓을 내려 그으며 말하였다.

 祚清謹,重惜官位,每有銓授,雖得其人,必徘徊久之,然後下筆,曰︰

 

 "이 삶이라면 곧 이미 귀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대부분 그를 원망하였지만 그러나 등용된 사람은 그 직위에 적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此人便已貴矣。」人以是多怨之;然所用者無不稱職。稱,尺證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