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篤親念故,無所遺棄/친척에게 돈독하였으며 버리고 돌보지 않음이 없었다.

solpee 2019. 8. 15. 19:46

 

《齊紀2 武帝 永明 5年 (丁卯, 487

 

 

 4.위의 공록대부인 함양문공 고윤이 계속해서 다섯 황제를 섬기면서 3성에 출입한 지 50여 년이나 지났으나 일찍이 문책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풍태후와 위의 주군이 매우 그를 중하게 여기며 항상 중황문 소홍수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모시도록 하였다.

 4.魏光祿大夫咸陽文公高允,歷事五帝,太武、景穆、文成、獻文及高祖爲五帝。出入三省,三省,尚書省、中書省、祕書省也。五十餘年,未嘗有譴;馮太后及魏主甚重之,常命中黃門蘇興壽扶侍。

 

 고윤은 마음이 어질고 조용하며, 마음으로는 한산하고 소박한 것과 같이 하였고, 책을 들고 읊고 보았는데 낮이나 밤이나 손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남을 선으로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였고 정성을 다하는데 게으르지 않았고, 친척에게는 도탑게 하며 옛날을 생각하였는데 버리고 돌보지 아니한 적이 었었다.

 允仁恕簡靜,雖處貴重,處,昌呂翻。情同寒素;執書吟覽,晝夜不去手;誨人以善,恂恂不倦;楊中立曰︰恂恂,一於誠也。朱元晦曰︰恂恂,信實之貌。篤親念故,無所遺棄。

 

 현조가 청주·서주를 평정하고 명망이 있는 집안을 모두 대도로 이사시켰을 때 그 사람들 대부분이 고윤과 결혼관계로 맺어진 친척이었으며, 흘러 다니며 흩어져서 배고픔과 추위에 있었는데, 고윤은 집안을 기울여 재물을 풀고 구제하여 모두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을 얻게 하였으며, 또한 그 재주와 품행에 따라 조정에 천거하였다.

 顯祖平青、徐,悉徙其望族於代,事見一百三十二卷宋明帝泰始五年。其人多允之婚媾,流離飢寒;允傾家賑施,賑,之忍翻。施,式智翻。咸得其所,又隨其才行,薦之於朝。行,下孟翻。朝,直遙翻。

 

 의론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처음으로 의탁해 왔다 하여 그들을 이간시키고자 하니 고윤이 말하였다.

 "어진 사람을 임용하여 능력을 쓰도록 하는 것인데 어찌 새로 온 사람들과 오래 된 사람의 구별이 있는가! 반드시 만약 쓸모가 있다면 어찌 이들을 억누를 수 있겠는가!"

 議者多以初附間之,間,古莧翻。允曰︰「任賢使能,何有新舊!必若有用,豈可以此抑之!」

 

 고윤의 몸에는 원래 병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금 몸이 불편하였으나 일상생활은 여전한 것 같았지만 여러 날이 지나서 사망하였고, 나이가 98세였다.

 시중·사공을 추증하고 부의를 보내는 재화와 의복이 매우 후하였다. 위의 초기 이래로 살았거나 죽었거나 황제의 은혜를 입고 하사받은 사람 가운데 모두 고윤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다.

 允體素無疾,至是微有不適,猶起居如常,數日而卒,年九十八;贈侍中、司空,賻襚甚厚。布帛曰賻,衣被曰襚。賻,音附。襚,徐醉翻。魏初以來,存衣蒙賚,皆莫及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