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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죽음과 후주의 분열

solpee 2019. 7. 31. 11:56

 

後周紀5 世宗 顯德 6年 (己未, 959)

 

 

 15.세종은 추밀원사 위인포를 재상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논의하는 사람들이 위인포는 과거에서 올라온 사람이 아니므로 재상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세종이 말하였다.

 "옛날부터 문문의 재주와 지략을 가진 사람을 채용하여 보좌하게 하였는데, 어찌하여 모두 과거급제로 말마암아야 하는가?"

 15.上欲相樞密使魏仁浦,議者以仁浦不由科第,不可為相。上曰:「自古用文武才略為輔佐,豈盡由科第邪!」

 

 기축일(15)에 왕부에게 문하시랑을 덧붙여 주고, 범질과 더불어 모두 참지추밀원사로 하였다.

 위인포는 비록 권력 있는 요직에 처하였으나 겸손하고 삼갈 수 있었는데,  세종은 성품이 아주 급하여 가까이서 직책을 맡은 사람 가운데 뜻을 가스르는 사람이 있으면 위인포는 대부분 그 죄를 끌어다가 자기에게 돌려 그를 구원하니, 온전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열에 일고여덟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도필리(말단)에서 출발하였으나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욕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己丑,加王溥門下侍郎,與范質皆參知樞密院事。以仁浦為中書侍郎、同平章事,樞密使如故。仁浦雖處權要而能謙謹,上性嚴急,近職有忤旨者,仁浦多引罪歸己以救之,所全活什七八。故雖起刀筆吏,致位宰相,時人不以為忝。

 

 또 선휘남원사인 오연조를 좌교위상장군으로 삼아 추밀사에 충임하였고, 귀덕절도사·겸저전도점검인 장영덕에게 나란히 동평장사를 덧붙여 주엇고, 이어서 한통을 시위친군부도지휘사에 충임하였으며, 조광윤을 겸전전도점검으로 삼았다.

 又以宣徽南院使吳延祚為左驍衛上將軍,充樞密使。加歸德節度使、侍衛親軍都虞候韓通、鎮寧節度使兼殿前都點檢張永德並同平章事,仍以通充侍衛親軍副都指揮使;以太祖皇帝兼殿前都點檢。

 

 세종은 일찍이 대신들 가운데 재상이 될 만한 사람을 병부시랑 장소에게 물엇더니, 장소가 이도를 천거하였다. 세종이 놀라면서 물었다.

 "이도는 경박하고 대신의 체통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짐이 재상감을 묻자 경이 제일 먼저 그를 추천하였으니 왜 그러하오?"

 上嘗問大臣可為相者於兵部尚書張昭,昭薦李濤。上愕然曰:「濤輕薄無大臣體,朕問相而卿首薦之,何也?」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세세한 행동이고, 신이 천거하는 것은 커다란 마디입니다. 옛날의 진의 고조시대에 잔언택이 아무 죄 없는 사람을 학살하자 이도는 누차 상소하여서 그를 주살하라고 청하고,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對曰:「陛下所責者細行也,臣所舉者大節也。昔晉高祖之世,張彥澤虐殺不辜,濤累疏請誅之,以為不殺必為國患;

 

 한 은제 시대에는 이도가 역시 상소하여서 먼저 돌아가신 황제의 병권을 해제하라고 청하였습니다. 무릇 국가의 안위가 아직 형성되기 전에 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재상감이어서 신이 이를 천거한 것입니다."

 漢隱帝之世,濤亦上疏請解先帝兵權。夫國家安危未形而能見之,此真宰相器也,臣是以薦之。」

 

 세종이 말하였다.

 "경의 말은 지극히 훌륭하고 또 지극히 공정하지만 그러나 이도와 같은 사람은 끝내 중사에 둘 수 없소."

 이도는 해학을 좋아하는데 주변을 닦지 않았고 동생 이한과 함께 문학으로 이름이 났으며, 비록 아주 우애가 있었으나 웃기며 방랑하여 장유의 체통을 갖지 않아서 세종이 그를 경시하였다.

 ★.이도를 재상 삼았으면 조광윤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을 것.

 上曰:「卿言甚善且至公,然如濤者,終不可置之中書。」濤喜詼諧,不修邊幅,與弟澣俱以文學著名,雖甚友愛,而多謔浪,無長幼體,上以是薄之。

 

 세종은 한림학사인 선보 사람 왕저가 막부에 있었던 옛날부터의 요속이어서 누차 그를 재상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그는 술을 좋아하고 점검을 하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上以翰林學士單父王著幕府舊僚,屢欲相之,以其嗜酒無檢而罷。

 

 게사일(19)에 병환이 점차 시해져서 범질 등을 불러서 들어와 고명을 받게 하였다. 세종이 말하였다.

 "왕저는 번저의 엣날부터 있었던 사람이니 만약에 짐이 일어나지 못한다면 마땅히 그글 재상으로 하라."

 범징 등이 나가서 서로 말하였다.

 "왕저는 종일 놀면서 취중에 노닐고 있는데, 어찌 재상을 감당하겠는가? 신중히 하고 이 말을 누설시키지 말라."

 이날로 세종은 죽었다.

 癸巳,大漸,召范質等入受顧命。上曰:「王著籓邸故人,朕若不起,當相之。」質等出,相謂曰:「著終日游醉鄉,豈堪為相!慎毋洩此言。」是日,上殂。

 

 세종은 번저에 있을 때에 대부분 도회(숨기)하기에 힘썼고 즉위하게 되자 고평의 침구(북한의 공격)를 격파하였는데,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뛰어난 군사 활동에 복종하였다. 그가 군대를 통어하는데 호령이 엄격하고 분명하여 다른 사람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고, 성을 공격하고 적을 마주하여서는 화살과 돌이 그의 주변에 떨어져서 사람들이 모두 안색이 변하였으나 세종은 얼굴에 변화가 없엇으며, 기회에 대응하여 정책을 결정하였는데, 다른 사람의 의표를 벗어났다.

 上在籓,多務韜晦,及即位,破高平之寇,人始服其英武。其御軍,號令嚴明,人莫敢犯,攻城對敵,矢石落其左右,人皆失色,而上略不動容。應機決策,出人意表。

 

 또 정치를 하는데 부지런하여 모든 관사의 장부와 전적은 눈으로 지나가도 잊지 않았고, 간사한 사람을 찾아내어 굴복시키는 것은 총명하기가 귀신과 같았다. 한가로우면 유자들을 불러서 전의 역사를 읽고 그 대의를 토론하였다.

 又勤於為治,百司簿籍,過目無所忘。發奸擿伏,聰察如神。閒暇則召儒者讀前史,商榷大義

 

 성품은 사죽이나 장난감 같은 물건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태조가 왕준과 왕은의 죄악을 길러 주어서 군신간의 분수를 끝까지 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말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에게 허물이 있으면 얼굴을 마주하고 그를 질책하였고, 복종하면 그를 사면 하였고 공로를 세우면 그에게 두터운 상을 주었다.

 性不好絲竹珍玩之物,常言太祖養成王峻、王殷之惡,致君臣之分不終,故群臣有過則面質責之,服則赦之,有功則厚賞之。

 

 문무 인재를 참여하여 채용하여 각기 그의 능력을 다하게 하였고, 다른 사람이 그의 현명함을 두려워하고 그의 은혜를 가슴에 품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그러므로 능히 적을 격파하고 땅을 넓혔으며 가는 곳에서 앞에 아무도 없는 듯하였다.

 文武參用,各盡其能,人無不畏其明而懷其惠,故能破敵廣地,所向無前。

 

 그러나 법률을 시행함에서는 대단히 엄격하여 여러 신하들이 맡아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들어내지 못한 것이 있으면 왕왕 이를 극형에 처하였으니, 비록 평소에 재간이 있고 명성으로 이름이 났어도 마음을 열어서 용서하는 바가 없었고 조금 있다가 역시 이를 후회하였으며 말년에 가서는 조금씩 관대해졌다.

 然用法太嚴,群臣職事小有不舉,往往置之極刑,雖素有才幹聲名,無所開宥,尋亦悔之,末年浸寬。

 

 등하하는 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애달파하고 사모하였다.

 갑오일(20)에 유조를 선포하여 양왕 곽종훈에게 명령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는데, 태어난지 7년 이었다.

 登遐之日,遠邇哀慕焉。

甲午,宣遺詔,命梁王宗訓即皇帝位,生七年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