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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男臣重貴,禍至神惑,運盡天亡/손자 신 중귀(후진황제)가 운명이 다하여 하늘이 망하게 하였다.

solpee 2019. 7. 15. 08:35

 

《後晉紀6 제왕 開運 3年》 (丙午, 946)

 

 

 30. 두위는 비록 귀척이어서 상장이 되었으나 성격이 나약하고 편비는 모두 절도사이었으나 다만 날마다 서로 받들고 영접하며 주연을 베풀고 즐거움을 일삼았을 뿐 군사를 논의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30. 11月, 杜威雖以貴戚為上將,性懦怯。偏裨皆節度使,但日相承迎,置酒作樂,罕議軍事。

 

 자주자사인 이곡이 두위와 이수정에게 유세하였다.

 "지금 대군이 항주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어서 밥을 짓는 연기가 서로 바라보입니다. 만약 삼고목을 많이 물속에 설치하고 그 위에 땔감을 쌓고 흙을 펴면 다리가 완성될 수 있습니다. 은밀히 성 안에 잇는 사람과 약속하여 불을 들어 서로 호응하고서 밤중에 장사들을 소집하여 오랑캐의 군영을 부수고 들어가서 안팎에서 호응하면 오랑캐는 반드시 도망갈 것입니다."

 제장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두위만은 안 된다고 하고 이곡을 파견하여 남쪽으로 가서 회와 맹에 도착하여 군대 양식을 감독하게 하였다.

 磁州刺史兼北面轉運使李穀說威及李守貞曰:「今大軍去恆州咫尺,煙火相望。若多以三股木置水中,積薪布土其上,橋可立成。密約城中舉火相應,夜募壯士斫虜營而入,表裡合勢,虜必遁逃。」諸將皆以為然,獨杜威不可,遣穀南至懷、孟督軍糧。

 

 요는 대군으로 진의 군대 앞에서 막게 하고 몰래 그의 장수인 소한과 통사인 유중진을 파견하여 100의 기병과 허약한 병졸들을 거느리고 나란히 서산으로 가서 진 군의 배후로 가서 진의 보급로와 돌아가는 길을 끊게 하였다. 땔나무를 하거나 나물을 캐는 사람이 그들을 만나면 모두 노략질 당하였고, 도망하여 돌아온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 오랑캐 무리가 강성하다고 이야기하니 군영안에서는 두려워하였다.

 契丹以大兵當晉軍之前,潛遣其將蕭翰、通事劉重進將百騎及贏卒,並西山出晉軍之後,斷晉糧道及歸路。樵采者遇之,盡為所掠;有逸歸者,皆稱虜眾之盛,軍中忷懼。

 

 

 

 소한 등이 난성에 도착하자 성 수비군 1천여 명이 그들이 점령한 것도 모르고 있다가 낭패하여 그들에게 항복하였다. 요군이 진의 백성들을 붙잡아서 모두 그들의 얼굴에 뜸을 뜨면서 말하였다.

 "칙서를 받들면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놓아주어 남쪽으로 도주하게 하였는데, 운반하는 장정들이 길에서 그들을 만나면 모두 수레를 버리고 놀라서 무너졌다. 소한은 요황제의 장인이다.

 翰等至欒城,城中戍兵千餘人,不覺其至,狼狽降之。契丹獲晉民,皆黥其面曰「奉敕不殺」,縱之南走。運夫在道遇之,皆棄車驚潰。翰,契丹主之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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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봉윤 상유한은 제왕(후진황제)의 위험이 아침저녁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알현하고 사태를 말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는데, 황제는 바야흐로 원중에서 매를 길들이며 사양하고 만나지 않았다. 또 실권자들에게 이를 말하였으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러나서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진씨는 혈식(희생 즉 제사을 올리는 일)하지 못할 것이오." 

 十二月,開封尹桑維翰,以國家危在旦夕,求見帝言事。帝方在苑中調鷹,辭不見。又詣執政言之,執政不以為然。退,謂所親曰:「晉氏不血食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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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신일(16)에 제왕은 비로소 두위 등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날 저녁에 또 장언택이 활주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숭·풍옥·이언도를 불러 금중에 들어가서 일을 계획하게 하고, 유지원에게 조서를 내려서 군사를 징발하여 들와와서 구원하라고 하려고 하였다.(유지원은 태원에 있었으니 태원에서 개봉까지 1,580리로 올 수 없는 거리)

 壬申,帝始聞杜威等降。是夕,又聞彥澤至滑州,召李崧、馮玉、李彥韜入禁中計事,欲詔劉知遠發兵入援。

 

 계유일(17)에 아직 날이 밝지 않았는데, 장언택이 봉구문에서 관문을 부수고 들어오니 이언도가 금군 500을 이끌고 방어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장언택은 명덕문 앞에서 군사를 정돈시키니 성 안은 크게 시끄러웠다.

 癸酉,未明,彥澤自封丘門斬關而入,李彥韜帥禁兵五百赴之,不能遏。彥澤頓兵明德門外,城中大擾。

 

 제왕은 궁 안에서 불이 나자 스스로 검을 지니고 후궁 10여 명을 물아서 장차 불난 곳으로 향하려다가 친군의 장수인 설초에게 붙잡혔다. 얼마 안 있어 장언택이 관인문에서부터 요황제와 태후의 편지를 전달하여 그를 위로하고 어루만졌고, 또 상유한과 경연광을 부르니, 황제는 마침내 불을 끄라고 명령하고 궁성의 문들을 모두 열게 하였다.

 帝於宮中起火,自攜劍驅後宮十餘人將赴火,為親軍將薛超所持。俄而彥澤自寬仁門傳契丹主與太后書慰撫之,且召桑維翰、景延廣,帝乃命滅火,悉開宮城門。

 

 제왕은 어원 안에 앉아서 후비들고 서로 모여서 눈물을 흘렸으며 한림학사 범질을 불러 항복하는 표문을 기초하게 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帝坐苑中,與后妃相聚而泣,召翰林學士范質草降表,自稱

 

 "손자 신 석중귀(후진황제 제왕)는 재앙이 이르러 정신이 혼미하고, 운명이 다하여 하늘이 망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태후와 처인 풍씨는 집안 사람들을 거느리고 교야에서 면박하고 차례로 대죄하고 있습니다. 아들인 진녕절도사 석연보가 국보 하나와 금인 세 개를 받들고 나가서 영접합니다."

 ★.이때 전국새도 요로 갔다.

「孫男臣重貴,禍至神惑,運盡天亡。今與太后及妻馬氏,舉族於郊野面縛待罪次。遣男鎮寧節度使延煦、威信節度使延寶,奉國寶一、金印三出迎。」太后亦上表稱「新婦李氏妾」。

 

 태후도 역시 표문을 올려 '신부이씨첩'이라 칭하였다.

 부주아가 들어와서 요황제의 명령을 선포하자 제왕은 황포를 벗고 흰 적삼을 입고서 두 번 절하고 선서를 받으니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傅住兒入宣契丹主命,帝脫黃袍,服素衫,再拜受宣,左右皆掩泣。帝使召張彥澤,欲與計事。

 

 

 

 제왕은 요황제가 하를 건널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태후와 더불어 앞길에서 받들어 영접하려고 하였는데, 장언택이 먼저 이를 아뢰니 요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유사에서는 또 황제로 하여금 옥을 입에 물고 양을 끌게 하며 대신들은 여친하게 하고 교외에서 영접하게 하려고 하여 먼저 의주를 갖추어 요황제에게 아뢰니 요황제가 말하였다.

 

 

 

 

 帝聞契丹主將渡河,欲與太后於前途奉迎。張彥澤先奏之,契丹主不許。有司又欲使帝銜璧牽羊,大臣輿櫬,迎於郊外,先具儀注白契丹主,契丹主曰:

 

 "내가 기습군을 보내어 다만 대량을 탈취하게 하려는 것뿐이지 항복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또 조서를 내려서 진의 문무 여러 관리들을 모두 옛날과 같이 하고 조정의 제도도 나란히 한인의 예의를 사용하게 하였다.

 「吾遣奇兵直取大梁,非受降也。」亦不許。又詔晉文武群官,一切如故;朝廷制度,並用漢禮。

 

 유사에서는 법가를 갖추어서 요황제를 영접하려고 하였는데 요황제가 회보하여 말하였다.

 "나는 바야흐로 갑옷을 입고 군사를 통솔하는 사람이니, 태상의 의위(의전과 예악 복식)는 시행할 겨를이 없소." 모두 그것을 물리쳤다.

 有司欲備法駕迎契丹主,契丹主報曰:「吾主擐甲總戎,太常儀衛,未暇施也。」皆卻之。

 

 이보다 먼저 요황제는 상주에 도착하여 바로 군사를 파견하여 하양을 향하여 경연광을 체포하게 하였다. 경연광은 별안간 도망하거나 숨을 곳이 없자 봉구에 가서 거란황제를 알현하였다.

 거란황제가 그를 힐책하며 말하였다.

 "두 명의 주군이 환영하는 모습을 잃게 된 것은 모두 네가 행한 짓이다. '10만 횡마검은 어디에 있느냐?"

 교영을 불러 서로 변증하게 하니 일이 모두 10개 조항이었다.

 先是契丹主至相州,即遣兵趣河陽捕景延廣。延廣蒼猝無所逃伏,往見契丹主於封丘。契丹主詰之曰:「致兩主失歡,皆汝所為也。十萬橫磨劍安在!」召喬榮,使相辨證,事凡十條。

 

 경연광은 처음에는 복종하지 않았지만 교영이 종이에 기록한 것을 가지고 그에게 말하며 보이자 마침내 자복하였다. 매번 한 가지 일을 자복하면서 번번이 하나의 투호살을 주었는데, 8개의 투호살을 받게 되자 경연광은 다만 얼굴을 땅에 묻고 죽여 달라고 요청하니 마침내 그를 쇠사슬로 묶었다.

 그믐 병술일에 백관들은 봉선사에 묵었다.

 延廣初不服,榮以紙所記語示之,乃服。每服一事,輒授一籌。至八籌,延廣但以面伏地請死,乃鎖之。
丙戌晦,百官宿於封禪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