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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14일 오후 01:12

solpee 2016. 8. 14. 13:12

‘서법에는 두 가지 도가 있으니 하나는 그 형상을 모방하는 것이고, 하나는 정신을 그리는 것이다. 모방은 쉬우나 정신을 그리기는 어렵다(書法二道 一是模其形者也 一是寫其神者也 模也易寫神難).’ -肯石 金鎭萬(1876∼1934·음력으로는 1933년 11월12일 사망)

 

輓肯石鎭萬

                         -石齋

‘옛날 그대와 함께 만리 길 간 것 생각하네(憶昔同君萬里行)

초나라와 오나라 산하 이리저리 다녔지(楚山吳水路縱橫)

威海 뱃머리에서 이별하던 일 기억하는가(奇曾威海船頭別)

눈물 어린 눈에서 가고 멈춘 정을 보았지(淚眼相看去住情)

 

마음 따라 붓 한 자루 휘두르니(隨意揮來筆一枝)

동파의 서체요 사정의 시로다(東坡書體士亭詩)

그대 옥과 같고 삼절을 겸했으니(其人如玉兼三絶)

글씨 쓰는 이 헤아려 봐도 누가 다시 있는가(歷數臨池更有誰)

 

난초와 계수나무 꺾인 소식 차마 못 듣겠네(蘭桂折不堪聞)

인간의 모든 일 뜬구름 되었구나(萬事人間盡化雲)

슬프다 영혼마저 부를 길 없는데( 靈魂招不得)

옛산에 낙엽만 비오듯 하네(舊山黃葉雨紛紛).’

 

別東林寺僧 동림사 스님과 헤어지며

                        李白(701~762)

東林送客處 동쪽 숲 나그네를 보내는 곳

月出白猿啼 달뜨고 흰 잔나비 울 제

笑別廬山遠 웃으며 여산의 원공과 헤어졌는데

何煩過虎溪 어찌 번거롭게 호계를 지나리오?

 

‘스무해 전 통도사에서(二十年前通度寺)

옥 같은 사람이 술 들고 글씨 받으러 왔는데(玉人携酒乞書來)

가련하다 같이 병들어 서로 보기 어려우니(相憐同病難相見)

사랑하는 회포를 풀 길이 없구나(懷抱無由得好開).’ -石齋


조선 말기 화가 최북의 ‘호계삼소도’. 삼소굴의 ‘삼소’는 ‘虎溪三笑’에서 나온 것이다.

 

鏡峰 靖錫(1892~1982). 우리나라 근대의 대표적 선승인 경봉은 뛰어난 설법으로 양산 통도사의 부속 암자인 극락암을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암자로 만들었다. 그는 1953년 극락암의 호국선원 조실로 추대돼 전국에서 찾아오는 선승과 대중에게 선문답과 설법으로 佛法을 깨우치며 禪風을 크게 일으킨 선사다. 특히 1973년부터 입적한 해인 1982년까지 매월 연 정기법회에는 전국에서 신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가 50년 동안 주석하며 선풍을 드날린 처소가 극락암의 조그마한 건물 ‘三笑窟’이다. ‘삼소굴’이라는 당호 역시 경봉이 지었다.

 

‘삼소굴’ 편액. ‘팔능거사’석재 서병오의 글씨다.

◆삼소굴의 의미

삼소굴의 ‘삼소’는 세 사람이 웃는다는 의미로 ‘호계라는 시냇가에서 세 사람이 웃는다(虎溪三笑)’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호계삼소’는 유교·불교·도교의 진리가 그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것을 상징하는 이야기다. 중국 송나라 陳聖兪가 지은 ‘廬山記’에 나온다.

東晋의 고승 慧遠(334~416)은 중국 불교 정토교의 開祖로 알려져 있다. 그는 처음에는 유학을 배웠고, 이어 도교에 심취했다. 그러나 스무살이 지난 뒤에는 승려가 되어 여산에 東林寺를 지어 머물며 수행했다. 입산 후 그는 ‘그림자는 산을 나서지 않고, 발자취는 속세에 들이지 않는다(影不出山 跡不入俗)’라는 글귀를 걸어두고, 다시는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그런 혜원은 찾아온 손님을 보낼 때는 언제나 사찰 아래 있는 시내인 ‘호계’까지 가서 작별 인사를 했다. 호계를 건너가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유학자이고 시인인 陶淵明(365~427)과 道士 陸修靜(406~477)을 배웅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淸談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호계를 지나고 말았다. 그의 수행을 돕던 호랑이가 그것을 보고 울음소리를 내자 문득 이 사실을 안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세 사람의 생몰연대로 보아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은 아닐 것이나, 송나라 이후 시인묵객들은 이를 소재로 시를 짓고 그림으로 그렸다. 그림은 ‘호계삼소도’ 또는 ‘삼소도’라 불리는데, 송나라 화승 石恪이 처음 그린 이후 많은 화가가 다양한 호계삼소도를 그렸다.

경봉도 작은 집에 ‘삼소굴’ 편액을 단 후 극락암을 벗어나지 않고 도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먹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삼소할 知音을 만나길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삼소굴 편액은 서화가로 이름을 떨쳤던 대구의 石齋 서병오(1862~1936) 글씨다. 석재는 ‘八能居士’로 불리던 천재 예술가로, 중국과 일본을 주유하며 탁월한 시·서·화 실력으로 당대 문인과 서화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인물이다.

극락암에는 석재의 글씨가 많이 남아있다. 삼소굴 옆의 ‘圓光齋’ 편액도 석재의 글씨다. ‘원광’은 경봉의 다른 호다. 극락암 누각인 ‘映月樓’ 편액 글씨도 석재가 썼다. 석재와 경봉은 서로 교유했으며, 경봉은 석재에게 서예를 배우기도 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