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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1일 오후 08:02

solpee 2016. 6. 21. 20:03

松筠節勁

《始产公新作双樗庵命光为诗》
                                   -司马光

間氣生王佐

多才秉國鈞。

節勁仰松筠。

 

底绩承平業,

遗榮壽考身。

结廬依散木,

退讓樂天真。

 

☞.王佐

☞.

☞.

☞. 

☞.司馬光(1019~1086)

〈資治通鑑〉을 편찬했다. 그는 고결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다. 유교경전을 공부했으며, 과거에 합격한 후 고속 승진했다.

1069~85년에는 개혁가 왕안석의 급진적인 개혁에 반대하는 당파인 구법당을 이끌었다. 유교경전 해석에 보수적 입장을 취했던 그는 단호한 조치보다는 도덕적인 지도력을 통해, 그리고 엄청난 변화보다는 기존 기구의 활성화를 통해 훌륭한 정부를 만들 것을 주장했다. 죽기 직전에 왕안석 일파의 신법당을 조정에서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며, 자신은 문하시랑, 즉 재상에 임명되어 왕안석이 시행한 개혁정책을 대부분 폐지했다.

근래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사마광을 호의적으로 평가한 반면 왕안석은 그 반대로 평가했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서에서는 왕안석의 개혁에 반대한 사마광의 정책이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고 여긴다. 사마광은 편찬국 관리들과 함께 BC 403~AD 995년의 중국역사를 다룬 〈자치통감〉을 편찬했는데, 이 책은 공자가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는 〈春秋〉에 필적하는 편년체 역사서로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서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유교적 도덕론의 관점에서 인물·기구를 비평했다. 그의 관심은 대부분 정치적 사건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제례·음악·천문·지리·경제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들도 다루었다. 그의 도덕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자치통감〉에는 엄격하고 비판적인 기준을 나타내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는 수많은 사료에서 나타난 모순을 다루고, 사료의 신빙성에 대한 그 나름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치통감과는 별도로 〈資治通鑑考異〉를 편찬했다.

1949년 이후 중국공산당 정권이 유교를 공격했음에도, 사마광의 학문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뛰어난 시인이며, 현대 중국의 아동서적에 나오는 영웅이기도 하다. 특히 유년시절에 같이 놀던 친구가 물독에 빠졌을 때 돌로 그 독을 깨뜨려 친구를 구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花外小車>

김홍도, <花外小車>,종이에 연한 색, 52.6×111.9cm, 간송미술관

 

北宋때 얘기다. 낙양에 살고 있던 司馬光은 자신의 別墅에서 邵雍(1011-1077)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대정치가 사마광은 편년체 역사서《資治通鑑》을 편찬한 인물로 북송 고전문화의 발달에 큰 역할을 한 명사였다. 아무나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옹도 사마광 못지않게 낙양에서 이름이 알려진 학자였지만 隱者였다. 명리에 목숨을 거는 시정잡배가 아닌 만큼 마음이 움직여야 몸이 따라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소옹이 사마광을 만나기로 했다. 신분 고하를 떠나 둘의 마음이 통했음을 알 수 있다. 사마광은 즐거운 마음으로 소옹을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술상 위의 안주가 다 식었다. 소옹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사마광이 싫었던 것일까? 헌데 바람맞은 사마광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짐작된 바가 있어 빙그레 웃으며 시 한 수를 읊조렸다.

 

“淡日濃雲合復開 / 옅은 해 짙은 구름에 가렸다 다시 열리고 

 碧嵩淸洛遠縈回 / 숭산 낙수 저 멀리 둘러 있네

 林間高閣望已久 / 숲 속 높은 누각에서 바라본 지 오래건만

 花外小車猶未來 / 꽃 밖에서 작은 수레는 아직도 오지 않네"

              (사마광, <約邵堯夫不至>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