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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0일 오후 02:40

solpee 2016. 6. 20. 14:41

增內<아내에게> 
                                 -白樂天

生爲同室親 / 살아서는 한 방에서 사랑하고
死爲同穴塵 /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히리라

 

他人尙想勉 / 다른 사람도 부부의 도를 지키는데
而況我與君 / 하물며 그대와 나는 더 할 나위 있겠는가 ?

黔婁固窮士 / 검루는 비록 가난한 선비였으나
妻賢忘其貧 / 현명한 부인은 가난을 잊었고

 
沂缺一農夫 / 기결은 한낱 농부에 불과하지만
妻敬儼如賓 / 처는 그를 귀빈처럼 공경했고

陶潛不營生 / 도연명은 생계를 못 꾸렸으나
翟氏自餐薪 / 부인 적씨는 스스로 살림 꾸렸고

梁鴻不肯仕 / 양흥은 벼슬살이 물리쳤으나
孟光甘布裙 / 그의 처 맹광은 베옷에 만족했네

君雖多(不)讀書 / 그대 비록 책도 많이 읽고 
此事耳亦聞 / 귀로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으리라

 
至此千載後 / 일천년이나 지나버린 오늘에도
傳是何如人 / 그들이 어떠한 사람으로 전하는가를

人生未死間 /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있는 동안은
不能忘其身 / 육신의 존재를 잊을 수는 없어

所須者衣食 / 배를 채우고 몸을 가리기 위해
不過飽與溫 / 따스하게 먹고 입어야 하지만

蔬食足充饑 / 배 고픔은 나물로 때우면 그만이지
何必膏梁珍 / 어찌 기름진 음식이 필요하며

 
繒絮足禦寒 / 거친 솜옷으로 추위만 막으면 되지
何必錦繡文 / 어찌 비단 옷에 무늬가 필요하겠는가

君家有貽訓 / 그대 집에 내려오는 가르침에도
淸白遺子孫 / 청렴결백을 자손에게 전하라 했으니

我亦貞苦士 / 나 자신 역시 고지식한 선비로서
與君新結婚 / 그대와 부부로 맺은 이상에는

庶保貧與素 (서보빈여소) 모쪼록 가난과 소박함을 지키어
偕老同欣欣 (해로동흔흔) 기쁜 마음으로 내내 해로하고 싶소


 

白居易(772~846)

 

字는 樂天, 號는 香山居士, 시호는 文. 河南省 新鄭縣 사람이다.

중당시대에는 과거제도가 효과를 거두어 그 시험에 통과한 진사 출신의 신관료집단이 진출하여 구문벌을 압도했는데, 백거이가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은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백거이는 800년 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했다. 이어서 書判拔萃科·才識兼茂明於體用科에 연속 합격했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翰林學士·左拾遺 등의 좋은 직위에 발탁되었다. 〈新樂府〉·〈 秦中吟〉 같은 풍유시와 〈翰林制誥〉처럼 이상에 불타 정열을 쏟은 작품을 창작한 것도 이때이다.

808년 37세 되던 해에 부인 楊氏와 결혼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 시 〈長恨歌〉에는 부인에 대한 작자의 사랑이 잘 반영되어 있다.

811년 모친상을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814년 다시 長安으로 돌아왔으나, 太子左贊善大夫라는 한직밖에 얻지 못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발생한 재상 武元衡 암살사건에 관하여 직언을 하다가 조정의 분노를 사 강주사마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은 백거이가 관계에 입문한 이래 처음 겪은 좌절이었으며, 또한 그의 詩心을 '한적'·'감상'으로 향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820년 憲宗이 죽고 穆宗이 즉위하자 백거이는 郎中이 되어 중앙으로 복귀했고, 이어 中書舍人의 직책에 올라 詔勅 제작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같은 천자의 배려에 감격하여 국가의 이념을 천명하는 데 진력했다. 822년 이후 杭州刺史·蘇州刺史를 역임했다. 洛陽으로 돌아온 뒤에는 秘書監·刑部侍郞·河南尹 등의 고위직과 太子賓客分司·太子少傅分司와 같은 敬老職을 거쳤으며, 842년 刑部尙書를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했다.

한림학사 시절의 동료 5명은 모두 재상이 되었으나 백거이는 스스로 '漁翁'이라 칭하며 만족해 했다. 이같은 성실하고 신중한 태도로 인해 그는 정계의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백거이는 문학 창작을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이라고 하는데, 문학 작가와 작품의 수가 크게 증가한 중당시대라 하더라도 이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형식이 다양하여 古體詩·今體始(율시)·樂府·가행·賦의 시가에서부터, 誌銘·祭文·贊·記·偈·序·制誥·조칙·奏狀·策·判·書簡의 산문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형식을 망라했다.

또한 그는 훌륭한 친구를 많이 사귀었는데, 친구들과 서로 주고 받은 시문에는 친애의 정이 물씬 배어 있다. 특히 元稹 및 劉禹錫과의 사이에 오간 글을 모은 〈元白唱和集〉과 〈劉白唱和集〉은 중당시대의 문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우정의 결실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에는 정치이념을 주장한 것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있는데, 모두 평담한 언어로 알기 쉽게 표현되었으며, 시에 봉급의 액수까지 언급하는 등 매우 당당했다.

때문에 평이하고 속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비상한 노력과 식견에 의해서 달성된 것이었다. 그는 1편의 시가 완성될 때마다 노파에게 읽어주고 어려워하는 곳을 찾아 고치기까지 할 정도로 推敲를 열심히 했다. 백거이가 자신의 시문에 일상어를 유효적절하게 구사한 것도 그의 표현을 간명하게 한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가 일상어를 사용한 것은 口語文學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文言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구어를 자신의 언어 속에서 활용하려 했을 따름이었다. 또한 그는 어휘를 매우 신중하게 선택했다. 고금古今文學에 나타난 어휘를 天地·山川·人事·鳥獸·초목에 이르기까지 1,870개 부문으로 분류하여 〈白氏六帖〉 30권을 펴냈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어휘를 선택하고 그 의미를 확인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李白·杜甫·韓愈 등 백거이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시인의 작품에는 송대 이래 많은 주석서가 있는 데 반해, 〈白氏文集〉에는 그러한 주석서가 없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종래의 주석서는 난해한 말에 관한 출전을 찾아내어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백거이의 작품에는 이러한 주석서가 필요없었던 것이다.

백거이는 문학을 2가지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그는 초기에 王者의 정치이념은 문학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위정자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이상에 불타던 젊은시절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新樂府序〉에서 "글은 임금·신하·백성·만물을 위해 짓는 것이지 글을 위해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본래 천하의 정치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작품은 백성의 뜻을 군주에게 전달함과 동시에 정치의 옳고 그름을 풍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詩經〉이야말로 이같은 문학의 본질을 잘 나타낸 작품이며, 후세 특히 六朝 이후의 문학은 기교만을 중시한 나머지 본래의 이념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809년에 완성된 통렬한 풍유시 〈신악부〉 50편을 비롯하여 〈백씨문집〉에 수록된 100분야에 대한 '판'(判)과 75편의 '策', 200편의 〈한림제고〉, 233편의 〈中書制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백거이가 지은 '詔'·'勅'·'制'·'誥' 등은 한림학사들에게 〈六典〉보다도 더 존중받았다. 〈六典〉은 칙명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당대 관계에서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글을 짓는 궁극적인 목적은 천자 대신 천자의 세계관과 이념을 그에 걸맞는 전아典雅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고, 조·칙·제·고 등은 그 주요한 서술형식이었다.

칙명을 받아 그러한 글을 짓기 위해서는 정확한 식견과 웅장한 필치를 지녀야만 했다. 뛰어난 작가는 '大手筆'이라 하여 커다란 영예를 부여받았는데, 백거이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백거이는 문학으로써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여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을 문학활동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815년 강주사마로의 좌천과 목종의 죽음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 문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인생의 문학을 추구하게 되었다.

長慶 4년(824) 목종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 원진에 의해 〈白氏長慶集〉 50권이 편찬되었다. 당시 백거이의 나이는 53세였으며 '장경'은 목종의 죽음과 동시에 새로이 바뀐 연호였다. 따라서 〈백씨장경집〉은 죽은 천자의 후한 대접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835년 백거이는 60권본의 〈백씨문집〉을 강주 [東林寺]에 봉납했고, 이듬해 65권본을 뤄양의 聖善寺에, 3년 후 67권본을 쑤저우의 南禪寺에 봉납했다.

842년 이전의 50권 이외에 '後集' 20권을 정리하고 이어서 845년 5권의 '續後集'을 편찬함으로써 합계 75권의 '大集'을 완성했다. 846년 8월, 75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