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擧案齊眉 , 举案齐眉 , jǔ àn qí méi

solpee 2016. 6. 19. 09:53

擧案齊眉 , 举案齐眉 , jǔ àn qí méi

【뜻】

밥상을 들어 (그 높이를)눈썹에 맞추다. 밥상을 눈썹 높이만큼 받들어 올린다는 뜻으로, 아내가 남편을 깍듯이 존경하거나 부부가 서로 존경하고 화목하게 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출전】

梁鴻은 자가 伯鸞으로 扶風 平陵縣 사람이다. 아버지는 王莽 때 城門校尉로 北地에 살다가 거기서 죽었다. 양홍은 어린 나이에 난세를 만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돗자리에 아버지를 말아서 매장했다. 후에 양홍은 태학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가난하지만 절조를 숭상했고 널리 책을 읽어 두루 학식을 쌓았다.

공부를 마친 후 양홍은 上林苑에서 돼지를 쳤는데 그만 실화를 하여 다른 집들까지 태워 버렸다. 그는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돼지로 손실을 갚았다. 어떤 사람이 돼지로는 보상이 부족하다고 하자 양홍은 자기에게는 다른 재산이 없으니 그의 집에서 일을 해 주는 것으로 보상하겠다고 했다. 주인이 허락하자 양홍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다. 이러한 소식이 온 마을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양홍이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고 하며, 양홍에게 일을 시킨 사람더러 지나치다고 비난했다. 이웃의 노인은 양홍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보고 그 주인을 비난하고 양홍의 성실함을 칭찬했다. 주인도 양홍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고 돼지를 돌려주었지만 양홍은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양홍의 높은 절조를 흠모하여 자기 딸을 시집보내려고 했으나 양홍은 모두 거절했다. 같은 마을의 맹씨 집에 딸이 있었는데 몸은 뚱뚱한 데다가 얼굴은 시커멓고 몹시 추했다. 힘은 장사여서 돌로 된 큰 절구를 들어 올릴 수 있었는데 나이 30이 되도록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가 결혼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묻자 그녀는 “양홍처럼 덕 있는 사람이라면 시집을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양홍은 이 소식을 듣고 예를 갖추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했다.

여자는 베옷, 짚신, 방직용 광주리, 새끼 꼬는 기구 등을 구해 놓고는 시집가는 날에 화장을 하고 잘 차려입고 갔다. 그런데 결혼 후 며칠이 지나도 양홍이 색시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색시가 궁금하여 그 까닭을 물었다. 양홍은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을 걸치고 짙은 화장을 하는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깊은 산속에서라도 살 수 있는 여자였소.”라고 대답했다. 색시는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다고 대답하고는 머리 모양도 옛날처럼 하고 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양홍은 기뻐하며 그녀에게 德曜라는 자와 孟光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 후부터 아내는 화장도 않고 산골 농부 차림으로 생활하다가 남편의 뜻에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 농사짓고 베를 짜면서 살았다.

「후에 이들은 吳 땅으로 가 명망이 있는 귀족인 皐伯通에게 의지하며 곁채에서 살면서 남의 방앗간지기로 일하며 생활을 꾸려 나갔다. 양홍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 아내는 늘 밥상을 차려, 양홍 앞에서 감히 올려다보지 아니하고 밥상을 눈썹 위까지 들어 올려 바쳤다.(遂至吳, 依大家皐伯通, 居廡下, 爲人賃舂. 每歸, 妻爲具食, 不敢於鴻前仰視, 擧案齊眉.)」

고백통은 이 부부의 사람됨을 예사롭지 않게 여겨 자기 집에서 살게 하고 허드렛일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그 결과 양홍은 수십 편의 훌륭한 책을 저술할 수가 있었다. 후에 양홍이 죽자 고백통은 열사인 要離의 곁에 양홍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으며, 장례를 마치고 맹광을 고향인 부풍으로 돌아가게 해 주었다.

이 이야기는 《後漢書 〈逸民傳 · 梁鴻〉》에 나온다. 그 후 사람들은 금실이 좋은 부부를 가리켜 ‘梁孟’이라 하고, 부부간에 금실이 좋은 것을 ‘거안제미’라 이르게 되었다.

같은 뜻으로 ‘鴻案相莊’이 있다. ‘鴻案’은 ‘양홍의 밥상’이란 뜻으로 《紅樓夢》 제49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林黛玉이 방에서 쉬고 있는데 賈寶玉이 찾아와 《西廂記》의 제3본 제2절 〈鬧簡〉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언제부터 맹광이 양홍의 밥상을 받았던가?(是幾時孟光接了梁鴻案.)”라고 말했다. 이 말은 양홍이 맹광이 눈썹 위까지 들어 올려 바치는 밥상을 받았다는 ‘거안제미’의 전고를 反用한 것으로, ‘참,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지, 언제부터 양홍이 맹광에게 밥을 차려 주고 맹광은 양홍이 차려 주는 밥상을 받았단 말인가? 부부 관계가 이렇게 서로 존중하는 관계로 변했단 말인가?’라는 뜻이다. 이 말에서 ‘양홍이 차린 밥상’이라는 뜻의 ‘梁鴻案’이 나왔고, 이것이 다시 ‘鴻案’이 되었으며, 부부가 서로 존경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원래 ‘擧案齊眉’는 부녀가 남편을 존경하는 婦道를 각별히 지키는 것만을 의미했지 부부가 서로 존경한다는 뜻은 없었는데, ‘鴻案相莊’이 나온 이후로 ‘擧案齊眉’도 부부간에 서로 존경한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相莊’은 서로 정중하게 대하며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淸나라 沈復은 《浮生六記》에서 ‘鴻案相莊’이란 성어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鴻案相莊하기를 23년, 해가 갈수록 정도 더욱 깊어진다.(鴻案相莊卄有三年, 年愈久而情愈密.)」

要離는 오왕 闔閭를 도와 衛나라에 피해 있는 전왕 僚의 아들 공자 慶忌를 암살한 사람이다.(▶ 三十六計의 제34계 苦肉計 참조)

 

《举案齐眉》原指妻子给丈夫送饭时把托盘举得跟眉毛一样高,后形容夫妻互相尊敬、十分恩爱。

【出处】
《后汉书·梁鸿传》:“为人赁舂,每归,妻为具食,不敢于鸿前仰视,举案齐眉。”
【古文】
梁鸿字伯鸾,扶风平陵人。势家慕其高节,多欲女之,鸿并绝不娶。
同县孟氏有女,状肥丑而黑,力举石臼,择对不嫁,至年三十。
父母问其故,女曰:“欲得贤如梁伯鸾者。”鸿闻而聘之。
女求作布衣、麻屦,织作筐缉绩之具。
及嫁,始以装饰入门,七日而鸿不答。
妻乃跪床下,请曰:“窃闻夫子高义,简斥数妇。妾亦偃蹇数夫矣,今而见择,敢不请罪。”
鸿曰:“吾欲裘褐之人,可与俱隐深山者尔,今乃衣绮缟,傅粉墨,岂鸿所愿哉!”
妻曰:“以观夫子之志耳。妾亦有隐居之服。”乃更为椎髻,著布衣,操作而前。
鸿大喜曰:“此真梁鸿妻也,能奉我矣。”字之曰德耀,名孟光。
......
遂至吴,依大家皋伯通,居庑下,为人赁舂。
每归,妻为具食,不敢于鸿前仰视,举案齐眉。
【译文】
梁鸿字伯鸾,扶风平陵人。有权势的人相中了他的品性,有很多想把女儿嫁给他,梁鸿全都拒绝不娶。
同县姓孟的有个女儿,长得又胖又丑还黑,力气大到能举起石臼,由于挑剔配偶一直没嫁,拖到了三十岁。
父母问她原因,她说:“我想嫁象梁伯鸾那样贤德的人。”梁鸿听到这件事情后就向她下娉礼求婚。
她要求父母准备好布衣,草鞋,纺织用的筐缉绩这些工具。
等到都要嫁出去的那一天,她才打扮了一下进门,七天过去了可是梁鸿并没有搭理她。
鸿妻于是跪于床边,说道:“私下里听说夫君你品德高尚,三言两语就打发走了很多女的。你妻子我也回绝刁难过很多男的,今天竟然被你嫌弃,哪敢不向你请罪。”
梁鸿说道:“我想结发的人,是能和我一起隐居到深山里的人,现下的你穿绮缟,擦粉墨,哪可能是我梁鸿所希望找的那个人!”
鸿妻说:“这样做看看你的心愿而已。你老婆我也有隐居的服装。”于是换成椎髻,穿布衣,持工具走了过来。
梁鸿非常开心地说:“这原来真的是我梁鸿的妻子啊,她一定能照顾我的。”梁鸿为她定字为德曜,取名孟光。
......
于是到了吴。投靠于大家族皋伯通,住在他家门屋旁边,受雇帮人舂米营生。
每到回家,妻子为他准备吃的的时候,在梁鸿面前都是用低头顺从的目光,把盘子都端到了和眉毛一样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