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燒酒

solpee 2016. 4. 6. 05:41

아라비아의 名醫인 아비센나(Avicenna)가 최초로 알코올의 蒸溜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몽골이 페르시아의 이슬람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증류방식의 술을 들여왔다. 한반도에는 고려 충렬왕 때 쿠빌라이 칸이 일본 원정을 목적으로 진출할 때 전해졌다고 한다. 특히 몽고의 주둔지이던 개성, 전진 기지가 있던 안동, 제주도에서 소주 제조법이 발달하였다. 《高麗史》에 공민왕 때 경상도 元帥 金鎭이 소주를 좋아하여 名妓와 부하를 모아 燒酒徒가 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기록이다.


Avicenna : 이슬람의 철학자ㆍ의사(980~1037). 이슬람 세계의 아리스터텔레스 학문의 대가로, 중세 유럽의 철학 및 의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 ≪醫學典範≫, ≪治癒의 書≫ 따위가 있다.

 

중국 술의 역사 대단히 길다. 仰韶文化(기원전 5000-3000)의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술그릇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기물이 있다는 점과 갑골문, 金鼎文 등에도 술과 연관된 문자가 있다는 점에서 지금부터 6천년 이전에 벌써 중국에서는 술이 생산되고 있었다고 한다.


중국 각 문화를 정리한 지도


 

그렇지만 언제 누가 술을 처음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예부터 의논이 분분한 만큼 단정도 어렵다.

 

술을 만드는 방법을 종이나 화약을 만드는 것처럼 어느 한 사람이 찾아냈을 턱이 없지만 중국인들은 굳이 어떤 이를 지칭해 그에게 술 창조자라는 花冠을 씌어주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최초로 술을 만든 이를 추정하는 여러 주장들이 제기돼 왔던 것이다. 술에 대한 이런 생각은 역사적 결과물을 대하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의 한 면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를 끈다.

 

 

1. 하늘이 술을 만들었다는 설

 

고대 중국인들은 사람과 하늘의 별을 불가분의 관계로 여겼다. 그들은 지상의 모든 사물과 각종 행위에 대응하는 별들이 천상에 있으며 이들 별이 사물을 조성하고 행위를 주재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인간 세상에 술이 있는 것도 하늘의 酒星이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서기 648년에 완성된 <晉書>에는 酒旗星座에 관한 기록이 있다. , 軒轅(黃帝)의 별자리 오른쪽 모서리 남쪽에 있는 세 별을 酒旗星이라고 하면서 이 별이 연회와 음식을 주관한다고 돼있다.

 

주기성은 곧 酒星이다. ‘주기성이란 표현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고대의 禮樂을 집대성한 <周禮>에서인데 이는 지금부터 3천년 이전이 된다.

 

'하늘에 酒星이 있어서 그가 술을 만든다.’는 말은 다분히 신화적 색채를 띠면서 인간과 천지 우주를 한 몸으로 인식했던 고대인들의 세계관에서 나온 것임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2. 원숭이가 술을 만들었다는 설

 

원숭이가 술을 만들었다는 전설 기록은 일찍이 明代에 있었으며 당시의 문인 李日華도 유사한 기록을 남겼다.

 

'黃山의 많은 원숭이들은 봄여름에 꽃과 과실을 채취하여 돌 구덩이에 담아 술을 만들었다. 향기가 넘쳐나 먼 데서도 맡을 수 있었다.’고 한 기록이 그것이며 淸代의 문인 李調元은 자신의 책에서 '경주瓊州(지금의 해남도)에는 원숭이들이 많았는데 깊은 바위 골짜기에서 술을 만들어 마셨다. 이는 쌀과 여러 가지 꽃으로 만든 것인데 맛이 매우 강렬하였다. 원숭이 술은 구하기도 매우 어려웠다.’고 적고 있다.

 

원숭이는 매우 민첩한 동물로서 대개 깊은 삼림에서 산다. 자세한 관찰을 통해 사람들은 원숭이들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후로 중국에서 원숭이 사냥을 술로 한다. 그리고 잡은 원숭이 골로 요리를 한다고 한다.

 

사냥법은 단순하다. 사람들은 원숭이가 다니는 곳에 단 맛이 나는 술을 갖다 놓고 녀석들이 나타나길 기다리면 된다.

 

달달한 냄새를 맡고 온 원숭이는 처음에는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숱을 핥아 먹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술의 유혹을 떨치지 못해 마구 마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술에 취해서 헤롱거리때 사람의 손에 잡히는 것이다.

 

이렇게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남아 또는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원숭이와 침판지를 잡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숭이가 만든 후아주라고 한다. 자연에서 땅에 떨어진 나무열매가 으깨지고 숙성되면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원숭이는 이걸 그렇게 좋아한다고 한다. 원숭이가 만든다는 전설의 명주인 후아주는 과일주답게 달콤하며 독특한 맛이 났다.

 

원숭이는 술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술을 만들 줄도 안다는 주장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그들은 과일이 풍부한 계절이 되면 많은 양의 과일을 돌 구덩이에 저장할 줄도 알았기 때문이다.

 

쌓인 과일들은 자연 균에 의해 발효가 되며 그 결과 사람들이 술이라고 부를 만한 액체까지 추출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원숭이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술을 만든 셈이다.

 

 

3. 儀狄이 술을 만들었다는 설

 

옛 책의 한 기록은 '술은 上皇 때부터 흥했지만 그것을 완성한 이는 儀狄이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고대 三皇五帝때부터 민간에 유행하던 각종 양조 방법을 의적이 통합 정리했으며 이를 후세에 전했다는 뜻이다.

 

기원전 2세기의 역사책인 <呂氏春秋>에는 '儀狄이 술을 만들었다.(儀狄作酒)'는 기록이 있으며 西漢劉向이 편술한 <戰國策>에는 더 자세한 설명이 있다.

 

'옛날에 제녀가 儀狄을 시켜 좋은 술을 만들게 했으며 이를 禹王(하나라 건국주)에게 바쳤다.

 

禹王이 이를 달게 마시고 말하길 '뒷날 꼭 술로서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라고 했다.

 

우임금은 儀狄을 멀리했으며 더 이상 술도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昔者, 帝女令儀狄作酒而美, 進之禹, 禹飮而甘之曰 後世必有以酒之國者, 遂疏儀狄, 而節旨酒).

 

이를 보면 儀狄은 지금부터 약 4천 년 전의 夏禹時代 사람이다. 많은 이들은 儀狄을 남자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이들은 여자로 보기도 한다. 고대에 술을 만든 이는 대부분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최고의 제사용 술을 '女酒'라고 부른 것도 그 때문이다.

 

<周禮>'天官'편에는 '女酒三十人', '奚三百人'이란 표현이 있는데 '女酒'는 당시 술 만드는 일을 관장하는 女子를 가리키고, ''는 노예들 가르키는 뜻이다.

 

儀狄에게 술을 만들게 한 帝女에 대해서도 天帝의 딸 혹은 임금의 딸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禹王의 후궁이라는 등 의견이 많다.

 

고서에 따르면 黃帝와 우 禹王 모두 술을 잘 마신 군왕이었다고 한다.

 

출토된 원시 채색도자기 시대의 수많은 술그릇들은 의적과 같은 시기의 것들이다. 때문에 儀狄이 술을 만들었다는 주장은 당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4. 黃帝가 술을 만들었다는 설

 

삼황오제 중에서도 黃帝를 중화인의 시조로 받드는 중국이다. 따라서 황제는 지혜의 화신이 되며 무수한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수많은 발견과 발명이 황제시대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이와 맥을 같이 하기에 술의 기원론에 황제가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많은 이들이 이른바 황제의 '湯液酒醪醴'의 논의를 가지고 황제를 술의 창시자로 존숭하는 것이다.

 

湯液醪醴는 옛 사람들이 사용하던 질병 치료제인 셈이다. 둘 다 오곡으로 만든 술의 일종인데 그중 맑은 것이 湯液이요 탁하면서도 단맛이 도는 것이 醪醴.

 

물론 이는 황제시대에 이미 사람들이 술을 만들 줄 알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漢代에 만들어진 <黃帝內徑>에는 황제와 기이 술 만드는 일을 토론하는 정경이 있다.

 

여기서 제시되는 옛날 방식의 양조법은 醪醴(단술)에 관한 것이다.

 

즉 동물의 젖으로 단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알려진 것처럼 <황제내경>은 후세 사람이 황제의 이름을 빌려 쓴 책이다.

 

 

5. 杜康이 술을 만들었다는 설

 

빼갈 중에 '杜康酒'라는 것이 있다. 陝西省에서 생산되는데 술 이름은 전설적인 인물 杜康에서 유래됐다.

 

어느 날, 杜康은 먹다 남긴 밥이 있어서 그것을 주먹밥으로 만들어 뽕나무의 구멍 속에 넣어 두었다.

 

밥이 쉬는 걸 늦춰 보려고 그랬는데 이내 杜康은 밥을 넣어 둔 사실마저 잊어 버렸다.

 

며칠 후 杜康은 어디선가 전해 오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뽕나무로 다가 갔는데 주먹밥은 없고 맑은 액체가 고여 있었다. 어느새 밥이 자연 발효를 거쳐 술이 됐던 것이다. 이것이 밥으로 만든 최초의 술이었으며 杜康釀造의 시조가 되었다.

 

나라를 세운 曹操는 그의 '短歌行'에서 이렇게 썼다.

 

'무엇으로 근심을 풀까? 오직 杜康 술이 그럴 수 있네. (何以解憂? 唯有杜康).'

 

이것이 바로 杜康이 술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세상 널리 퍼뜨린 유명한 시구인 것이다.

 

이후부터 사람들이 술의 기원을 말할 때는 꼭 杜康을 일컫게 되었고 그를 酒仙으로 존경해 마지않았다.

 

어떤 학자들은 杜康 나라 제6少康王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일찍이 수수로 술을 만들었다고 전하는 왕이다. 뽕나무 구멍에 주먹밥을 넣었다는 얘기며 누룩을 사용했다는 이야기 등은 나중 사람들이 덧붙인 전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杜康이 역사에 존재했던 인물임은 확실해 보인다.

 

<世本>, <呂氏春秋>, <戰國策>, <說問解字>와 같은 옛 책들이 모두 杜康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乾隆 19년에 고쳐 쓴 <白水題誌>에는 杜康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기술이 있다.

 

白水盟(금의 섬서성 백수현. 서안에서 북동쪽으로 1백 킬로 정도)陝北高原의 남쪽 끄트머리와 開中平原이 만나는 경계에 있는데 이곳 하천 바닥의 흰 모래 때문에 이 지명을 가졌다.

 

杜康仲宇이며 백수맹 康家衛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강가위는 지금도 남아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커다란 하천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이를 杜康河라고 부른다. 하천은 상류의 한 샘에서 시작된다. 생전에 杜康이 이 샘물을 길어 술을 빚었기에 杜康泉이라고 하는 샘이다.

 

하천 옆에는 벽돌로 가장자리를 두른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현지인들은 이것이 杜康의 묘라고 한다. 杜康의 사당은 분묘의 좌측에 있으며 여기에 두강의 彫像이 모셔져 있다.

 

1976년 어떤 부자인 백수현 사람이 두강천 부근에 현대식 양조장인 杜康酒廠을 세우고 술을 만들어 상품화 했는데 이것이 바로 杜康酒이다.

 

河南省 陽縣(양 남쪽)과 인근의 伊川縣에도 杜康酒廠이라는 술 회사가 있으며 똑같이 杜康酒라는 술을 생산한다.

 

汝陽伊川에서도 서로 자기네 고장에서 杜康이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누가 원조 두강이냐? 를 두고 말이다.

 

 

중국의 술 빼갈(白酒)

 

빼갈(白酒)’이란? 명칭..

중국 빼갈(白酒)은 세계의 이름난 증류주 중의 하나다. 그렇지만 빼갈(白酒)은 다른 나라의 증류주들보다 종류도 많고 만드는 방법도 훨씬 복잡하다.

 

중국에서는 빼갈(白酒)에 대해서 白酒(이저우)’란 통일된 명칭을 쓰고 있지만 더러 燒酒’ ‘白干 또는 백간인:白干?’ ‘高粱酒등으로 여러 호칭으로 불려진다. 그렇지만 빼갈(白酒)의 과학적인 명칭은 蒸溜酒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근래 우리나라에서 일본 술을 호칭할 때 사케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분명 우리나라의 淸酒와 구분하겠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포도주를 와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일반적인 풍조다. 이런 점들을 참작한다면 중국 술 빼갈(白酒)빠이저우(白酒)’로 불러야 마땅할 듯싶으나 이미 빼갈(白酒)’이란 말이 친숙하게 폭넓게 통용되고 있는 마당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빼갈(白酒)’이라는 명칭은 白酒의 또 다른 호칭인 白干에서 유래됐다. 원래 이는 河北省 衡水縣의 양조장에서 만들어지는 한 특정한 빼갈(白酒)의 호칭이었다.

 

1940년대 후반 이곳의 다리 공사장에서 일하던 기술자며 인부들이 이 술을 마셔보곤 정말 깨끗해 깔끔해서 좋아(眞潔, 好干)!”라고 칭찬한데서 유래됐다.

 

과 같아서 무색투명한 빛깔을, ‘은 수분이 거의 없는 높은 알코올 도수를 지칭했는데 이 말은 곧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白干의 중국식 발음이 빠이간이지만 말을 부드럽게 하는 (:?)’음이 첨가되면 빠이갈로 발음된다. 따라서 빼갈이란 말은 우리말이라기보다 중국말에 더 가깝다. 드물게는 빼주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白酒의 중국식 발음 빠이저우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밖에 술의 재료를 나타내는 高粱酒=수수라는 호칭도 통용되고 있지만 대중적인 것은 못 된다.

 

 

빼갈은 언제부터 있었나?

 

빼갈은 언제 처음 만들어졌나, 누가 처음 만들었나, 등에 대한 논의는 중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분분했다. 이와 관련된 주장들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東漢(서25~220)시대부터라는 주장

 

90년대 상하이박물관에서 발견된 동한시대의 청동 증류기가 이 주장의 시작이 되었다. 감정 결과 이 증류기의 제조 연대는 동한의 초기 혹은 중기로 밝혀졌다. 전문가들이 이 증류기를 이용하여 증류 실험도 해보았는데 그 결과 알코올 26.6-30.4도의 증류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밖에 安徽省 저주(?州-추저우)黃泥鄕에서 출토된 똑같은 모양의 청동 증류기도 한 점 있지만 연구가들은 이 기구가 증류주를 만드는데 쓰였다는 결론은 유보하였다. 아무튼 적잖은 이들이 이들 유물을 근거로 동한시대에 이미 증류주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폭넓은 지지는 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동한시대의 술을 언급하고 있는 많은 史料들 가운데서도 증류주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자 자료의 증명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설득력도 떨어지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빼갈의 기원을 西周時代(원전 11세기-기원전 8세기)까지 끌어올리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대개 빼갈 회사 쪽에서 나온 것이다.

 

예컨대 山西省 汾酒회사의 홍보물에서는 甲骨文金鼎文에 있는 자가 술을 뜻함을 전제하고 자의 書法 형상이 고대 蒸飮器를 닮았다면서 이 주장에 신빙성을 주려고 애쓰고 있는 경우 등이다.

 

 

2. 唐代에 있었다는 주장

 

증류주가 당대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다. 비록 당시의 문헌에 빼갈 생산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燒酒’ ‘白酒라는 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白居易<長慶集>에 실려 있는 여지루대주(?枝樓對酒에는 여지열매가 처음 익으면 닭 벼슬 색을 띠고 소주를 처음 열면 호박향기가 난다. (?枝新熟鷄冠色 燒酒初開琥珀香. 여지=중국 남방에서 나는 과실. )라는 구절이 있다.

 

陶雍의 시 到蜀後記途中經歷에는 성도에 당도하니 소주가 익어가네, 이 몸은 다시금 장안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네. (自到成都燒酒熟 不思身更入長安)’라는 시구가 있다.

 

이밖에도 李肇가 지은 <國史補>에는 술에 대한 기록도 있는데 그 중에는 술로는 劍南의 소주가 있다. 酒則有劍南之燒春(劍)은 지금의 사천 동북지방. ‘와 같다.’는 표현도 있다.

 

唐代說을 펴는 이들은 소주가 증류주란 전제에서 이 기록들을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의 소주가 곧 증류주라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 이 주장 또한 전문가 세계에서는 인정을 못 받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 하겠다.

李白처럼 杜甫의 최후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는 가운데 두보가 빼갈(?) 때문에 죽었다는 주장은 그 옛날에 제기됐다. 당대의 鄭處誨가 쓴 <明皇雜錄>의 기록이 그것이다. ‘두보가 뇌양(?陽: 동정호 근처)에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큰물이 져서 열흘 넘게 먹을 것이 없었다. 현령이 배를 갖고 와서 두보를 맞았으며 소고기를 굽고 白酒를 대접했다... 과식을 한 두보는 그날 저녁에 죽었다.’

 

근대의 지식인 郭沫若은 여기에 한 술 더 떠 나름의 과학적 고증을 보탠다. 그날 두보는 배고픈 참에 상한 고기를 먹었는데 당시의 술이 고기의 독소를 촉진하고 혈액의 순환을 막아 심장을 마비시켰다고 했던 것이다.

 

이 말이 참인지 아닌지는 따질 수 없지만 아무튼 두보 죽은 지 60여년 뒤 진사가 된 鄭處誨는 두보의 餓死說을 퍼뜨린 최초의 인물이 된다. 나뭇잎 같은 쪽배 하나에 가족을 싣고 成都를 떠난 두보가 長江을 타내려 여러 해 만에 동정호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병색이 깊었다. 폐질환에 당뇨가 있는데 눈까지 어두웠다. 그런 그가 시골 사또가 보내온 고기와 술을 먹었다는 기록을 끝으로 홀연 세상을 떠났으니 응당 뒷사람들의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마신 백주가 당시의 소주임은 짐작이 가나 그것이 증류주(빼갈)이었다는 증거는 여전히 없다.

 

 

3. 宋代에 만들어졌다는 주장

 

송대의 문헌에는 白酒’ ‘燒酒등과 함께 蒸酒라는 술 이름도 나타난다. 蘇舜卿중에 때에 매화 흩날리니 응당 시구를 얻긴 하지만 앞가슴 적실 술이 없음을 괴로워하네. (時有飄梅應得句 苦無蒸酒可沾巾)’에 나오는 증주가 바로 그것이다.

 

燒酒에 대한 더 분명한 기록은 남송의 趙希鵠이 쓴 <調類編>에 있다. ‘燒酒에 취해 깨지 못할 때는 급히 녹두 분탕 (만두 혹은 수제비 같은 것)의 절편을 냉수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면 곧 편해진다. (燒酒醉不醒者 急用綠豆粉湯皮切片 將筋?開口 用冷水送粉片下吼卽安).’

 

또 같은 燒酒 사람인 宋慈<洗寃錄(최초의 법의학책)>에는 燒酒의 약효가 적혀 있기도 하다. ‘살모사가 사람을 해쳤을 때는 입안에 식초나 燒酒를 머금고 상처를 빨아 그 독을 뽑아낸다. (??傷人....令人口含米醋或燒酒, ?傷以吸撥其毒).’

 

이밖에도 송대의 史籍 중에 증류기에 관한 기록이 있다는 점도 빼갈의 송대 기원설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 남송의 張世南이 쓴 <游宦記聞>에 기록된 증류기가 그 본보기다. 물론 이 증류기는 花露(화장용 물)를 만드는 데 쓰인 것으로 술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道術을 다룬 <丹房須知>란 책에도 증류기의 도형이 있는데 이 주장을 펴는 이들은 이것이 증류 소주를 만드는 데 쓰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4. 元代에 시작되었다는 주장

 

증류주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기록은 明代의 약물학자 李時珍이 쓴 <本草綱目>에 있다. ‘燒酒는 옛 법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원나라 때 처음 만들어졌다. 그 방법은, 짙은 밑술과 원료 지게미를 시루에 넣어 찌면 증기가 위로 올라가는데 그릇으로 맺힌 방울을 받아내면 된다. 무릇 모든 발효 술은 증류하여 소주로 받을 수 있다. 요즘은 찹쌀, 수수, 차조, 보리 등을 쪄서 하는데 누룩과 함께 항아리에 넣어 7일 정도 발효시킨다. 이를 시루에 넣어 증류하면 되는데 물처럼 맑고 맛이 짙은 술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燒酒非古法也, 自元時始創, 其法用濃酒和糟入甑, 蒸冷汽上, 用器蒸取滴露. 凡酸壞之酒皆可蒸燒. 近時惟以?米或黍或?或大麥蒸熟, 和曲釀瓮中七日, 以甑蒸好, 其淸如水, 味極濃烈, 盖酒錄也.)’

 

이 기록을 보면 14세기 초에는 분명 증류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원대에 시작됐다는 단정적 표현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사료 중에는 이를 뒷받침 해줄 분명한 설명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여러 주장들을 종합해서 판단할 경우 宋末, 元初 시기(13세기)에는 분명 빼갈 제조방법이 일반에 퍼져 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따라서 중국 증류주(빼갈)의 역사는 7-8백 년 정도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