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016년 4월 1일 오후 08:07

solpee 2016. 4. 1. 20:07

 

 

 

梅月堂 茶詩

 

養茶


年年茶樹長新枝/ 해마다 차나무에 새 가지 자라는데
蔭養編籬謹護持/그늘에 키우노라 올올 엮어 보호하여
陸羽經中論色未/육우의 대경에는 색 맛을 논하였는데        

官家榷處取槍旗/관가에서는 槍旗만을 취한다네.

 

春風未展芽先抽 /봄바람 불기 전에 싹이 먼저 피고 
穀雨初回葉半披/ 곡우절 돌아오면 잎이 반쯤 피어다네

好向小園閑暖地/ 조용하고 따뜻한 작은 동산을 좋아하니
不妨因雨着瓊蕤/비에 옥같이 꽃 드리워도 무방하리니

매월당은 나무를 심어 가꾸고 산야초를 심어 그 속에서 글 읽고 거문고 타며 자연의 순응대로 살면서 차나무를 가꾸었다, 차나무는 본래 양지식물이 아니라 반음지식물이라 그늘 밑에 생육 좋았다. 예부터 차를 竹露라 하였다. 매월당은 식물양생학을 통달하게 잘 알고 있어 이미 죽로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행하였다 즉 차나무는 해마다 새 싹이 나오니 질 좋은 찻잎을 얻기 위해 그늘에 기우야 좋은 찻잎이 생산되므로 올을 만들어 보호하였다

중국 당대 사람 육우는 다경을 저술하여 차의 색과 맛을 좌우함을 알려 관리들에게 어린 찻잎의 성장 수준에 따라 찻잎을 따라했다 그런데 차나무는 성질이 급하여 이른 봄기운 느낌을 얻기 전에 벌서 새 찻잎이 나와 눈 속에 새 찻잎을 따셔 만든 차를 雪芽茶를 생산하지만 량이 적고. 경제적 가치가 부족하니 차를 따는 적기를 곡우 절을 중심으로 1주일 전후이라 한다. 그러나 경주지방은 남부지방보다 기후기 낮아 찻잎이 반쯤 피었지만 기후의 변화가 적어 따뜻함이 이어져 빗물에 찻잎이 깨끗이 청소되어 옥같이 꽃을 드리워도 더 좋을 거라 감탄하였다

매월당 김시습 21살 때 발생한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옥좌에 오른 ‘왕위 찬탈 사건’에 천재의 운명을 ‘狂人의 삶’으로 바꾸어 버렸다.

당시 三角山(북한산)에서 글을 읽다가 이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즉시 방문을 닫아걸고 사흘 동안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매월당 김시습은 천재의 길 아니라 방랑의 길에 차를 약으로 마셨다 귀양살이, 방랑자에 필수 약이 차약이다 정처없는 또돌이 방랑자가 읊은 시 가운데 地爐란 시를 소개한다


산방은 맑고 고요한데 밤은 어찌 기는가/山房淸悄夜何長
한가로이 등불 듣구며 흙마루에 누웠다네/閑剔燈火臥土床
다행이 땅화로 있어 더욱 나를 배부르게 하네/賴有地爐偏饒我
손님오실 때 다시 찻물을 끓인다네/客來時復煮茶湯

산방은 어느 곳이든 고요하다 여름밤은 짧고 겨울밤은 길다 가을밤은 귀뚜라미소리에 잠 못 이른다,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 유배되어 18년 간 귀양살이를 했다 귀양살이의 죄인에게 한 치의 은혜 없이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움, 그리움이 쌓인다, “ 다산은 봄에는 임 그리워 잠 못 이루고. 여름은 모기떼와 놀이하느라 잠 못 이루고. 겨울밤은 엄동설한 바람 소리와 가야금 놀이로 잠 못 이루어 차 마시고 글 읽고 글을 쓴다 ” 조선조 천재 중의 천재가 방랑 생활의 아픔을 솔직히 표현한 이 차시에서 방랑자 모습 그대로 느끼게 한다.

춥고 배고프고 지루한 생활, 어찌할 생각도 없이 땅바닥에 그대로 누웠는데 땅에서 올라오는 찬 냉기를 참다못해 땅화로(地爐)에 불집의 차 끓어 마시니 배고플 땐에 배를 채우니 다른 방랑자가 올까 찻물을 끓이는 정성. 옛말에 “콩 한 조각으로 10명을 나눔하고 한 쪽이 남았다”는 격언이 차의 나눔이고 조선조 선비의 정신이다 다부를 쓴 이목선생은 차의 九德을 주장하였다

매월당 김시습은 하늘을 지붕 삼고 가는 곳마다 앉는 자리가 내 집이고 글방이며 첫자리이라 머무는 곳마다 땅화로가 있어 차 끓어 마실 수가 있다, 벼슬, 권력을 위해 형제도 선비, 바른 말하는 사람을 죽이는 험난한 세상 모든 것 싫었다.

그래서 스스로 죄인, 방랑자로 자칭한 매월당은 스스로 하늘을 볼 없는 부끄러운 날날, 인기척 없는 밤에 나셔 찻물을 기르고 차를 다리고 풍류를 즐기며 茶禪一味의 생활이고 선비의 절개를 지켰다, 외로운 산방에 앉아 차를 끓이는 연기에 감탄하여 옮은 시가 차 끓이기(煮茶)란 시 있다

솔바람이 가볍게 일어 차 끓이는 연기/松風輕拂煮茶烟
하늘 하늘이 홑 날리며 시냇가에 나부끼네/裊裊斜橫落澗邊
동창에 달 밝아도 잠 못 이루어/月上東窓猶未睡
물병 들고 돌아가 차디찬 샘물 긷네/挈甁歸去汲寒泉

속된 세상 싫어하는 천성 스스로 괴이하지만/自怪生來厭俗塵
문에 鳳자 쓴 이미 청춘 다보냈네/入門題鳳已經春
차 끓이는 누런 잎 그대는 아시는가/煮茶黃葉君知否
시 쓰면 숨어 사는 일 누가 알까 두럽네/却恐題詩洩隱淪

“ 옛 말에 저녁때가 되면 아이와 바람은 잔다는 속언처럼 저녁노을이 길게 하늘로 늘어지는 차 끓이는 연기, 맑고 깨끗한 시냇물에 하늘이 움직이나 냇물이 음직이나 분간 못하는 순간마다 동창에 뜬 달, 차디찬 샘물을 길렀다

세 속된 세상을 싫어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봉 같은 사람을 찾았지만 그런 인물은 보이지 않아 전체가 평범한 세속 사람만이 있다고 탄식의 소리만 늘어놓고 있다 오직 시 쓰며 숨어사는 일이 누설될까, 이런 일들마저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런 환경적 사정에 푹 빠져 달이 떠오는 밤이면 스스로 샘물을 길어와 차를 끓어 마시며 스스로 풍류의 멋에 취하였다 천재 가운데 천재의 선비가 스스로 절개를 지키는 지조를 차와 더불어 풍류 묵객 모습이 은둔의 철인이다

이런 조용한 풍류의 생활과 달리 유학자들 만나 간신배를 구탄 하였다 신숙주 . 정인지 정창손 등이 행차를 보게 되면 서슴없이 욕설을 날리며 세상을 탄식하며 성리학 사상에 염증을 포출 하였다

매월당 김시습은 스스로 차나무를 가꾸고 그 잎을 따서 만든 雀舌의 심요 함을 짓을 지어 울었다.

남국의 봄바람 가볍게 불려할 제/南國春風軟慾起
차나무 숲 잎 사이 아래 뽀족한 부리 숨겼네/茶林葉低含尖觜
가려낸 연한 싹 진정 신령스레 통하여/揀出嫩芽極通靈
그 맛과 풍류 鴻漸의 다경에 실렸다/味品曾收鴻漸經

紫芛는 새순을 가려 뽑어아/紫芛抽出旗槍間
봉병차와 봉단차는 그 모양을 본 딴 거라/鳳餠龍團徒範形
푸른 옥병 속에 넣어 타는 불로 끓이면/碧玉甌中活火烹
게눈 같은 거품 일고 솔바람 소리로 울리네/蟹眼初生松風嗚

산집은 고요한 밤에 손을 둘러 낮아/山堂夜靜客圍坐
차 한 잔 마시니 두 눈이 밝아지네/一啜雲膄雙眼明
당가에서 조금 맛보니 본인은 촌사람인가/黨家淺斟彼粗人
어찌 알리라 설차가 그처럼 맑은 것을/那識雪茶如許淸

雀舌이라 새 주둥이같이 뾰족할 때 어린잎을 따서 차를 만들면 맛 향 등 다섯 가지 맛이 동시에 풍기는 시기라 한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작설이란 이름을 지어 붙었고 작설차를 찬미하는 시를 지였다

고려 공민왕과 우왕을 보좌한 韓脩(1333-1384)가 경상도 안칠사가 보낸 햇차 작설을 찬하였다. 고려 말 조선 태종 때 사람 元天錫(1330- ?)이 원주 치악산에 은거하며 <연고차>의 시속에 작설 재배 내용이 나오며 조선 申淑舟 (1417-1475)가 전남 도갑산의 시에 작설 시가 있으며 김시습이 경주 남산 용강골 차밭에서 만든 작설차를 선사받고 쓴 徐巨正 (1429- 1488)이 지은 작설 시가 있다.

이 시구의 특징에서 南國春風軟慾起는 당나라 노동이 쓴 차 노래에 나오는 <겨울 잠자던 벌레들이 놀라 움직여 봄바람이 일어난다면 蟹蟲驁動春風起> 내용의 시구를 인용하였다 鴻漸이란 시구는 다경을 쓴 육우가 산가지에서 점쾌로 얻은 字를 접목하였다

매월당 김시습은 물을 잘 끓어야 좋은 찻 맛을 낼 수 있다 옛 어른들이 물을 끓는 정도를 게의 입 거품이 일어나는 모양과 김이 나오는 정도, 물 끓은 소리로 판단하였다 즉 물이 끓기 시작할 때 게의 눈같이 거품이 일어남을 비유하고 물 끓는 소리기 조용하고 아름다운 정적 소리가 차를 끓이는 적당한 온도이고 차 맛을 좋게하는 시기로 보았다 차 한 잔이 잠을 쫓고 청정의 눈, 무명의 눈, 지혜의 눈 마음을 조용하게 禪定으로 인도함이 곧 차를 통해 얻는다,

매월당은 전국 명성대찰 명승지 마다 매월당 김시습의 설화가 전한다. 1466년(세조 12)에 때 일화, 매월당 김시습은 충청도 공주군의 지역유지들과 함께 동학사숙모전을 증축하고, 숙모전 옆에 단을 쌓고 사육신 과 단종에 관련되어 순절한 신하들을 추모하였는데 조정 관료들이 묵인하였다. 그때 선조는 등창으로 밤낮없이 신음할 때이라 한다 그 뒤 김시습이 증축한 건물은 영조 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후대에 1864년(고종 원년)에 萬化 스님이 다시 세웠다.

매월당 김시습이 어느 날 西江을 유랑하다가 서출 韓明澮의 시를 보고 운을 바꾸어 조롱한 시 내용을 소개한다.

한명회 시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靑春扶社稷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白首臥江湖

김시습 시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靑春亡社稷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白首汚江湖

매월당의 해학에 지나가는 사람마다 배꼽을 잡고 웃었다.
평생 차를 즐기며 명산 대첩을 방랑생활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향년 59세(1493)홍산 무량사에서 입적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가 큰 한을 품었다고 하였다. 뒤에 浮屠를 세웠다.

그 뒤 중종은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선조는 이율곡을 시켜 김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 때에는 해동의 佰夷라 하였으며 집의의 벼슬을 추증, 남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