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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4일 오후 06:04

solpee 2016. 3. 24. 18:05

無下의 竹畵

 

 

 

☞. 竹畵의 意義

 

 竹畵의 標準은 眞善美貞이다. 作家가 事物의 形態를 그리는 것은 客觀的이고 眞善美貞을 表現하는 것은 主觀的이다.

 竹은 淸貧한 선비의 表象이며 志操높은 文人들의 崇拜物이다.

竹畵는 山水畵와 마찬가지로 胸中逸氣가 必要하다.

最初로 부터 五代까지 寫眞的 또는 寫實的이었다가 荊浩(约850-?五代后梁画家) 등으로 인하여 寫意的 精神이 고조되어 작가들의 자각으로 사물에 대한 胸中逸氣 即 胸中之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胸中逸氣란 山水畵에서와 마찬가지로 작가가 竹畵를 그리려면 죽의 印象을 마음 속에 스케치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이 印象은 한두 번 보고 느낀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험과 습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淸末의 吳昌碩(淸,1844.8.1 —1927.11.29)은 梅畵를 그리기 위해 매화밭에서 2년동안 기거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즉 竹의 형태를 控制하여 物質과 精神이 平行하고 또 技巧와 表現力이 일치하여 한 폭의 竹畵 속에 詩情·音情·畵情 등이 솟아나 한 폭의 竹畵 앞에서도 마치 거대한 竹林 속에 있는 듯한 인상을 주어야 한다.

 

중국 역대화가 중에 文同(宋1018~1079年)·柯九思(元1290—1343)·方厓(元僧)·王紱(明 1362~1416)·夏昶(1388—1470)·李衎 (1245-1320)등은  모두 胸中逸氣로 正確한 構想力을 가진 작가들로 寫意的 思潮로 이어오다가 明代 이후부터는 寫趣的 思潮로 변화되었다.

그 대표화가는 徐渭(1521-1593)·石濤(1642年-1708年)·鄭燮 (1693-1765)등인데 그들의 작품은 오랜 臨摹와 경험으로 쌓인 통달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정원의 竹이나 산속 죽의 眞意를 깊이 연구하지 않고 오직 揮灑筆墨의 흥취로 竹畵를 그렸는데 이것을 寫趣라 한다.

이것은 '물질은 멀고 마음은 중요하다'는 이론으로 淸代 鄭燮의 말을 인용한다면 '紙上之竹' 즉 종이 위의 대란 뜻으로 작가가 작품을 그릴 때는 竹의 진실한 형태도, 정신적 인상도 필요없으며 다만 筆墨의 淋漓的 趣味가 필요한 것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元代의 倪瓚이 그의 繪畵論에서 '초초한 逸筆로는 그 形似를 구하지 않는다(“逸气”、“逸笔草草”、“不求形似”、“写胸中逸气”、“聊以自娱” )' 라고 한 말과 일치한다.

 

☞.竹畵起源

 

다수가 五代의 李夫人(于五代郭崇韬之妻李氏)으로 보고 있으나 關羽(三國時代,?-220年)의 石竹刻이 있으므로 竹畵는 이미 三國時代부터 전해진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러나 竹畵가 독립된 畵科로 繪畵史에 등장하게 된 것은 宋代부터이다.

宋 徽宗 宣和(1119~1125)년간에 간행된 「宣和畵譜」에 당시 秘府에 소장되고 있었던 名畵 中 아홉번째로분류되어 있다. 그 敍目에 말하기를 "架雪凌霜 如有特操 虛心高節 如有美德/눈을 등지고 서릿발을 세우고 지조를 남달리 가지고 있으며 속은 빈 채 높은 節槪의 美德이 있다."라고 하였다.

五代의 李夫人은 달밤에 홀로 앉아 적막을 달래며 창문에 비치는 竹影을 그려 마침내 墨竹畵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宋의 黃庭堅은 그의 「道臻師畵竹序」에서 말하기를 "墨竹始於近世 不知其所師承 初吳道子作畵 運筆作卷 不加丹靑己極形似 故世之精識博物之士 多藏吳生墨本/墨竹은 근세에 시작하였는데 그 師承을 알지 못한다. 처음 吳道子(唐 约公元680~759年)가 彩色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 형태를 매우 가깝게 그려 매우 근사하였다. 그러므로 학식이 높은 선비들이 吳道子의 墨竹本을 많이 소장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위의 두 예문에서 볼 때 이부인 보다 오도자의 설이 타당하다 하겠다. 그러나 그 畵法은 오직 雙鉤勒의 白描法에 불과하였다. 그 例로 唐代 寺刹인 開元寺에 王維의 石刻竹畵가 現存하고 있는데  이 王維의 竹畵도 雙鉤勒 石刻이다. 그것은 매우 寫實的인 畵法으로 記錄의 「己極形似」라는 말과 일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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