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襄之仁 , sòng xiāng zhī rén
宋나라 襄公의 仁.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거나 불필요한 동정이나 배려를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비유하는 말이다.
【출전】
춘추시대 송나라 桓公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 玆父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이이가 바로 양공이다. 양공은 서형인 目夷를 재상에 임명했다. 양공 7년, 송나라 땅에 운석이 비처럼 쏟아졌는데 이를 본 양공은 자신이 패자가 될 징조라며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양공 8년, 당시의 패자인 齊나라 桓公이 죽었다. 양공은 야망을 이루기 위해 제나라로 쳐들어가 공자 昭를 세워 추종 세력을 만들었다.(당시 제나라 환공은 管仲이 죽은 후에 관중이 추천한 隰朋을 등용하지 않고 자신이 신임하는 내시 竪刁를 재상에 임명하였다. 수조는 재상이 된 지 3년 만에 개방, 역아 등과 공모하여 난을 일으켜 환공을 남문에 있는 침전 수위의 방에 가두어 굶어 죽게 만들었다. 환공이 죽자 그의 다섯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서로 다투느라 장례도 치르지 못해 환공의 시체가 67일 동안 방치되어 시체에서 생긴 구더기가 문밖까지 기어 나올 정도였다. 양공은 이 틈을 타 제나라를 친 것이다. ▶ 知子莫如父 참조
양공은 점점 교만해졌다. 목이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이라며 간언했으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그해 가을 盂 땅에서 회맹했는데, 楚나라가 양공을 포로로 잡아갔다가 겨울에 풀어 주었다. 이런 치욕을 당하고도 양공의 야망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듬해 여름, 양공은 자기를 무시하고 초나라와 통교한 鄭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해 가을,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다. 양공이 초나라와 싸우기로 결정하자 대부 子魚가 불가하다고 간했지만, 양공은 초나라 군대를 泓水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다. 송나라 군대가 먼저 홍수에 도착했고, 초나라 군대는 나중에 도착하여 막 강을 건너고 있었다. 목이가 건의했다. “저쪽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건너기 전에 쳐야 합니다.(彼衆我寡, 及其未濟擊之.)”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초군이 강을 건너와 전열을 정비하고 있자 목이가 지금 치자고 했다. 양공은 적군이 진용을 정비한 후에 치자고 했다. 초나라 군대가 전열을 가다듬은 후에 송나라가 공격을 했는데 송나라는 대패했고, 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사람들은 모두 양공을 비난했다. 그러자 양공이 말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곤란하게 만들지 않고, 전열을 갖추지 않은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했소.(君子不困人於阸, 不鼓不成列.)” 자어가 탄식했다. “싸움이란 승리하는 것이 공을 세우는 것이다. 무슨 예의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왕의 말대로 해야 한다면 처음부터 싸울 필요도 없이 노예가 되었어야 하지 않은가!(兵以勝爲功, 何常言與. 必如公言, 卽奴事之耳, 又何戰爲.)” 양공은 이 싸움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史記 〈宋微子世家〉》에 나온다. ‘송양지인’의 고사에 대해 《左傳 〈僖公 22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송양공이 홍수에서 초나라와 싸웠다. 송나라 군대는 전열을 갖추었고 초나라 군대는 아직 강을 건너지 못했다. 司馬(자어)가 말했다. “저쪽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습니다. 아직 건너지 못했으니 지금 치도록 합시다.” 송양공이 말했다. “안 되오.”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넜으나 아직 전열을 갖추지 못했다. 자어가 공격하자고 다시 고하자 송양공은 또 안 된다고 했다. 초나라 군대가 전열을 갖춘 다음에 송나라가 공격을 했으나 송나라 군대는 대패했고, 송양공은 다리를 다쳤다. 그의 호위무사들은 모두 살상을 당했다. 송나라 사람들이 송양공을 허물하자 송양공이 말했다. “군자는 부상당한 적의 병사를 다시 살상하면 안 되고, 나이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으면 안 되는 것이오. 옛날의 군사작전은 지세가 험준한 곳에 의지하지 않았었소. 과인은 비록 망국(商나라. 송나라는 옛날 상나라 땅으로, 宋人은 상나라의 후손들이다. 그래서 송나라를 가리킬 때 상이라고도 한다.商은 殷이고 東夷族 나라다.)의 후예지만 전열을 갖추지 않은 적을 공격할 수는 없소.” 자어가 말했다. “전쟁을 모르시는군요. 강한 적이 지세가 험한 곳에서 아직 전열을 갖추지 못한 것은 하늘이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불리한 지형에 있을 때 공격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두려워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지금 강한 자들은 모두 우리의 적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포로로 잡아야 할 판에, 반백의 늙은이를 가엽게 여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병사들에게 무엇이 치욕이라는 것을 밝히 알게 하고 작전을 하는 것은 적을 죽이기 위함입니다. 부상을 당해 아직 죽지 않았는데 왜 재차 살상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차마 재차 살상을 못 한다면 그들을 애당초 살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차마 반백의 늙은이를 포로로 잡지 못한다면 적에게 굴복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군대는 유리한 국면을 이용해 싸우는 것이고, 북과 징을 울려 사기를 돋우는 것입니다. 유리한 국면을 이용하는 것이라면 적이 곤경에 처했을 때를 이용해야 하고, 사기를 돋웠다면 적이 전열을 갖추지 않았을 때 공격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宋公及楚人戰於泓. 宋人旣成列, 楚人未旣濟. 司馬曰, 彼衆我寡, 及其未旣濟也, 請擊之. 公曰, 不可. 旣濟而未成列. 又以告. 公曰, 未可. 旣陣而後擊之, 宋師敗績. 公傷股, 門官殲焉. 國人皆咎公. 公曰, 君子不重傷, 不擒二毛. 古之爲軍也, 不以阻隘也. 寡人雖亡國之餘, 不鼓不成列. 子魚曰, 君未知戰. 勍敵之人, 隘而不列, 天贊我也. 阻而鼓之, 不亦可乎. 猶有懼焉. 且今之勍者, 皆我敵也. 雖及胡耇, 獲則取之, 何有於二毛. 明耻敎戰, 求殺敵也. 傷未及死, 如何勿重. 若愛重傷, 則如勿傷, 愛其二毛, 則如服焉. 三軍以利用也, 金鼓以聲氣也. 利而用之, 阻隘可也. 聲盛致志, 鼓儳可也.)」
세상 사람들은 송양공의 이런 행위를 두고 ‘宋襄之仁’이라며 비웃었다고 하는데, 이 ‘송양지인’이란 말은 《十八史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송양공이 제후의 패자가 될 욕심으로 초나라와 전쟁을 했다. 공자 목이가 초나라 군대가 아직 진을 형성하지 못했을 때 치자고 청했다. 양공이 말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곤란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오.” 그러다가 초나라에 패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송나라 양공의 인이라고 하며 비웃었다.(宋襄公欲霸諸侯, 與楚戰. 公子目夷, 請及其未陣擊之. 公曰, 君子不困人於厄. 遂爲楚所敗. 世笑以爲宋襄之仁.)」(《十八史略 〈春秋戰國)〉》)
그런데 ‘송양지인’과 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은 당시의 전쟁 방식 때문이었다. 춘추시대에는 상대국을 복속시키는 것이 전쟁의 주된 목표였으므로 전쟁이 제법 신사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전쟁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농사철에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백성들에게 질병이 도는 때를 택해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는 자국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적국이 국상을 당하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상대방 나라의 기근을 틈타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는 적국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한겨울과 한여름에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는 자국과 적국 양국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戰道. 不違時, 不歷民病, 所以愛吾民也. 不加喪, 不因凶, 所以愛夫其民也. 冬夏不興師, 所以兼愛民也.)」(《司馬法》)
「싸울 장소나 시간을 정하고, 북이 울리면 전쟁을 시작하고, 기습 공격은 절대 안 되고 정면공격만 허락되었다(不偏戰).」(《公羊傳 〈桓公 10년〉》의 何休 注)
「반백의 늙은이를 포로로 잡으면 안 되고(不擒二毛), 부상당한 적의 병사를 재차 살상하면 안 되었다(不重傷).」(《左傳 〈僖公 22년〉》)
그런 반면에, 전국시대에는 춘추시대와는 달리 전쟁의 목표가 상대국의 영토를 겸병하고 군사력을 말살시키는 쪽으로 변하여 전쟁이 잔인해지고 기계가 백출하면서 병법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였던 춘추시대에 비해 철기시대(BC400년경에 철기 문화가 들어옴)였던 전국시대에는 무기가 더욱 발달하고 전투도 더욱 치열해졌다.
용례
경쟁자나 경쟁 회사를 죽이려면 철저하게 죽여야 한다. 공연히 ‘송양지인’을 베풀었다가는 도리어 내가 당할 수가 있다.
春秋五霸之一的宋襄公在与楚国的泓之战中,由于坚持自己的战术而失败,从此,人们便将宋襄公的这种战术思想称为“宋襄之仁”。
宋襄公出兵伐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