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挺身赴難tǐngshēnfùnán 앞장서서 나라(위난)를 구하러 나가다.

solpee 2016. 1. 10. 06:19

 

白沙論壬辰諸將士辨

-백사가 논한 임진년의 여러 장사에 대한 변론-

 

 

無奈白沙久而忘之 /어찌할 줄 모르는 백사는 오래되어 이를 망각하고

以梨峙認以爲熊峙。歟。/이치전투를 웅치전투로 인식하고 있음이여.

但梨峙則權元帥不與焉 /다만 이치전투는 권 원수가 참여하지 않았으니

寧有是理也 /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大抵梨峙。/대저 이치전투는

雖曰大戰。/비록 큰 전투라고 말하지만

其至比於幸州。/행주에 비하면

則大相懸絶。/서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

況熊峙小戰。/ 하물며 웅치의 작은 전투를

其視幸州。/행주와 같이 보는 것은

萬萬不侔。/너무나도 같지 않습니다.

若以熊峙爲最。/ 만일 웅치전투를 최고로 여기고

幸州次之。/행주 대첩를 다음으로 여긴다면,

則幸州之戰。/ 행주 전투를

人安得至今稱之也。/사람들이 왜 지금까지 칭송하겠는가?

及白沙撰權元帥碑銘遺事。/백사가 권 원수의 碑銘과 遺事를 지으면서

改熊峙爲梨峙。/웅치전투를 고쳐 이치전투로 기록하였으니,

則所謂親聞權聘君之說。/이른바 친히 권 빙군에게 들었다는 말이

何若是其相反耶。/어찌 이처럼 상반되는가?

定論果如是乎。/정론이 과연 이러한가?

變初。/변란 초에

釜,萊城陷。/부산과 동래성이 함락되고

鳥嶺軍潰。/조령의 군사가 궤멸되었을 때,

巡察使李洸領兵至公州。/순찰사 이광이 병사를 이끌고 공주에 이르렀는데

聞大駕西遷。/임금의 모신 수레 행렬이 서쪽으로 옮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卽令軍中曰。/ 곧장 군중에 영을 내리기를,

己未及矣。/『이미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으니

其各罷陣。/각각 진영을 해산하라.』하였다.

時權元帥駐板峙。/그 때 권 원수는 공주군 板峙에 주둔하고 있다가

與其參謀官前萬戶朴大壽及靑巖察訪姜弘壽等。/ 참모관 전 만호 박대수, 청암 찰방 강홍수 등과 더불어

馳見洸。/말을 달려 이광을 찾아가 보면서

謂之曰。/말하기를,

都城失守。/『도성을 지키지 못하여

君父播越。/ 임금께서 파천하였는데

則爲臣子者。/신하가 된 자는

所當挺身赴難。/마땅히 앞장서 달려가 전쟁터에서

與賊俱死。/ 적과 싸우다 함께 죽는 것이

職耳。/직분이거늘

公之罷兵。/공은 병사를 해산하였으니

有何意歟。/무슨 뜻이 있어서입니까?』하였다.

大壽按劍而前。/ 박대수가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앞으로나아가

瞪目睨視。/ 눈을 흘겨 노려보니,

洸流涕曰。/이광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吾未之思耳。/『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하였다.

欲還聚散。/다시 흩어진 병사를 모으려 했으나

卒軍已潰矣。/ 군졸은 이미 달아나 버렸으니

無可奈何。/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해설>

 

○無奈는 어찌 할 줄 모르다.

 

○寧은 편안할 영의 뜻도 있지만, “어찌”라는 뜻도 있다.

 

○懸絶은 아주 두드러지게 다름.

 

○李洸은 1541년(중종 36)~1607년(선조 40)의 인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감사로서 충청도관찰사 윤선각, 경상도관찰사 김수와 함께 남도 근왕병을 조직하여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서울을 수복할 계획을 세웠다. 5월에 스스로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목사 이경복을 중위장으로 삼고, 조방장 이지시를 선봉으로 하여 임천을 거쳐 전진하였으나 도중 용인에서 왜적을 만나 대치하고 있다가 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광의 조선군은 당황하여 결전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분산 도주하기에 바빴다. 이리하여 권율이 지휘하는 군사만이 제대로 퇴각하였을 뿐 남도 근왕군은 참패하여 각기 공주·전주·상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4만여의 근왕병이 2천미만의 왜군에게 궤멸됨으로써 한성 이남 지역에서는 더 이상 관군의 활약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광은 그 뒤 다시 전라도로 돌아가서 광주목사 권율을 도절제사로 삼아 웅치에서 적을 크게 무찌르고, 전주에 육박한 왜적을 그 고을 선비 이정란과 함께 격퇴시켰으나 용인전투에서의 패전 책임자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백의종군한 뒤 벽동군으로 유배되었다가 1594년(선조 27)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板峙는 충청남도 공주군에 있는 고개. 높이 86m

 

○挺身은 무슨 일에 앞장서서 나아감.

 

○無可奈何는 어쩔 도리가 없다.

 

 

論語 述而 제31장

 

子  與人歌而善이어든 必使反之하시고 而後和之러시다

 공자께서는 다른 사람과 노래를 부르고 잘하면 반듯이 다시 부르게 하고 자신도 따라 합창하였다.

 反 復也 必使復歌者 欲得其詳而取其善也 而後和之者 喜得其詳而與其善也 此見聖人氣象從容 誠意懇至 而其謙遜審密 不掩人善 又如此 蓋一事之微而衆善之集 有不可勝旣者焉 讀者宜詳味之

 

 반은 반복이다. 반듯이 반복하여 노래 부르게 한 것은 그 상세함을 터득하여 그 좋은 점을 취하고 反 復也 必使復歌者 欲得其詳而取其善也

이 후에 같이 합창한 것은 그 상세함을 얻고 그 좋은 점을 허여해 준 것을 기뻐한 것이다. 而後和之者 喜得其詳而與其善也

여기서 성인의 기상이 조용하고 성의가 간절하고 지극하여 그리고 겸손하고 세밀하여 此見聖人氣象從容 誠意懇至 而其謙遜審密

남의 좋은 점을 덮어두지 않음이 이와 같음을 볼 수 있다. 不掩人善 又如此

 대개 한 가지 일의 작은 것이지만 모든 장점이 모인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蓋一事之微而衆善之集 有不可勝旣者焉

독자는 마땅히 그것을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讀者宜詳味之 

掩目捕雀:눈을 가리고 새를 잡는다는 뜻으로, 일을 건성으로 함을 이르는 말 .후한서(後漢書) 

三二. 子曰 文莫吾猶人也아 躬行君子는 則吾未之有得호라

 공자가 말씀하셨다. "겉으로 드러난 문은 내가 남만 못하지 않다. 그러나 군자의 행동을 몸소 실행하지는 못했노라."

三三. 子曰 若聖與仁은 則吾豈敢이리오 抑爲之不厭하며 誨人不倦은 則可謂云爾已矣니라 公西華曰 正唯弟子 不能學也로소이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내가 어찌 성과 인 같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도를 행하기를 싫어하지 않고, 남을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만은 나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공서화가 말했다. "바로 이것이 저희 제자들이 배우지 못하는 점입니다."

 三四. 子 疾病이어시날 子路 請禱한대 子曰 有諸아 子路對曰 有之하니 에 曰 禱爾于上下神祇라하도소이다 子曰 丘之禱 久矣니라

 공자가 질병에 걸리자 자로가 기도를 청하니, 공자가 말씀하셨다. "과거에도 그런 일이 있었느냐?" 자로가 대답했다. "있었습니다. 뇌( )에 말하기를, '천지 신명에게 기도한다.' 고 하였습니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그런 정도라면 내가 기도한 지가 오래되었다."

三五. 子曰 奢則不孫하고 儉則固니 與其不孫也론 寧固니라

 공자가 말씀하셨다. "사치하면 공손하지 못하고, 검소하면 고루하다. 공손하지 못하다면 차라리 고루할 것이니라."

三六. 子曰 君子는 坦蕩蕩이오 小人은 長戚戚이니라

 공자가 말씀하셨다. "군자의 마음은 평탄히 넓고, 소인의 마음은 항상 근심에 차 있다.

三七. 子는 溫而하시며 威而不猛하시며 恭而安이러시다 

공자는 온화하면서 엄숙하고, 위엄이 있으면서 사납지 않으며, 공손하면서 편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