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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 八佾 第 三

solpee 2016. 1. 4. 12:34

論語 八佾 第 三

 

【第八章】子夏問曰、巧笑倩兮、美目盼兮、素以為絢兮。何為也。

子曰、繪事後(於)素。曰、禮後乎。子曰、起予者商也、始可與言詩已矣。

자하가 묻는다. "詩經 衛風 碩人에 '웃는 모습이 귀엽고 예쁘며 아름다운 눈에 선명한 눈동자여! 희게 빛남이여!(본래의 모습이 아름답다 또는 본래의 모습을 바탕으로 한다)' 라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공자가 답한다. "그림을 그릴 때 먼저 흰색으로 밑그림을 그린 다음에 문양을 그린다 또는 본래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여 그림을 그린다는 뜻이다." 그러자 자하가 크게 고무되어 묻는다. "그럼, 예가 나중이겠군요?"  공자가 크게 기뻐하며 " 나를 일깨워 주는 이는 상이로구나.너와 함께 비로소 시에 대해 논할 수 있겠구나?"

여기서 자하가 禮가 後라고 한것은 素인 仁愛 혹은 仁義라는 바탕을 素로 보고 그바탕인 인의가 사람의 본 바탕에 깔린 후에 繪事 즉 禮를 논할 수 있다는 것이다.

 

○手如柔荑오 膚如凝脂오 領如蝤蠐오 齒如瓠犀오 螓首蛾眉로소니 巧笑倩兮며 美目盼(변)兮로다. - 詩經 衛風 碩人

손은 마치 부드러운 띠같고, 피부는 마치 기름엉긴 듯하고, 목은 마치 굼뱅이같이 희며 길고, 치아는 마치 박속같고, 쓰르라미 이마같으며 누에나비 눈썹같음이로소니, 앙증스런 웃는 보조개하며, 까만 예쁜 눈동자이로다.

 

賦也. 茅之始生曰荑 言柔而白也. 凝脂 脂寒而凝者 亦言白也. 領 頸也. 蝤蠐 木蟲之白而長者. 瓠犀 瓠中之子 方正潔白而比次整齊也. 螓 如蟬而小 其額廣而方正. 蛾 蠶蛾也 其眉細而長曲. 倩 口輔之美也. 盼 黑白分明也. ○此章言其容貌之美 猶前章之意也.

賦이다. 띠풀이 처음 돋아난 것을 荑라 하며, 부드럽고 흰 것을 말한 것이다. 凝脂는 기름이 寒氣에 엉긴 것으로, 또한 흰 것을 말한 것이다. 領은 목이다. 蝤蠐는 木蟲(굼벵이)으로 희고 긴 것이다. 瓠犀는 박 속의 씨앗이니, 方正하고 潔白하며 나란히 순서대로 整齊한 것이다. 螓은 매미와 같으며 작은데, 그 이마가 넓고 方正하다. 蛾는 누에나방이니, 그 눈썹이 가늘고 길며 구부러져 있다. 倩은 보조개가 아름다운 것이요, 盼은 눈동자의 흑백이 분명한 것이다. ○ 이 章은 그 容貌의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니, 前章의 뜻과 같은 것이다.

倩好口輔也

(웃는 입모양이 예쁠천)은 好한 口輔이다.

新安陳氏曰口輔靣頰也易咸其輔左傳輔車相依

新安陳氏曰: 口輔는 靣의 頰(볼협)이다. 易에 ‘咸其輔’라 하였고, 左傳에 ‘輔車相依’라 하였다.

 

*참고: 易 咸其輔 左傳 輔車相依

1)易 咸其輔

☱ ☶

(:兌上艮下 澤山咸)彖曰: 咸은 感也니 柔上而剛下하야 二氣 感應以相與하야 止而說하고 男下女라 是以亨利貞取女吉也니라. 天地感而萬物이 化生하고 聖人이 感人心而天下和平하나니 觀其所感而天地萬物之情을 可見矣리라.

 

<上六, 咸其輔頰舌이라>

【傳】上 陰柔而說體 爲說之主. 又居感之極 是其欲感物之極也. 故不能以至誠感物 而發見於口舌之間 小人女子之常態也 豈能動於人乎. 不直云口而輔頰舌 亦猶今人 謂口過曰唇吻曰頰舌也. 輔頰舌 皆所用以言也.

上은 陰柔이면서 說體이니, 說之主가 되는 것이다. 또 感之極에 居하니 是는 그 感物하고자 하는 極인 것이다. 故로 能히 至誠으로서 感物치 못하고서 口舌之間에서만 發見되니, 小人과 女子의 常된 態인 것이거늘, 어찌 能히 人을 動케 할 수 있겠는가? 直으로 口라 云하지 아니하고서 輔頰舌이라 한 것은, 또한 마치 今人들이 口過를 謂하길 唇吻(입술순,입술내밀문)이라 曰하고 頰舌이라 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輔(보조개), 頰, 舌은 모두 言으로서 할 때 所用되는 것이다.

【本義】輔頰舌 皆所以言者而在身之上. 上六 以陰居說之終 處咸之極 感人以言而无其實. 又兌爲口舌 故其象如此 凶咎可知.

輔, 頰, 舌은 모두 言할 수 있는 까닭인 것이고, 身之上에 在하는 것이다. 上六은 陰으로서 說之終에 居하고 咸之極에 處함이니, 感人에 言으로서만 하여 그 實함이 无한 것이다. 또 兌하기를 口舌로서만 하기에 故로 그 象이 如此하니, 凶하고 咎임을 可히 知할 수 있는 것이다.

2)左傳 輔車相依(僖公 二年,五年)

僖公 二年 虞師晉師滅下陽.僖公 二年에 虞師와 晉師가 下陽을 滅하다.

晉荀息請以屈産之乘與垂棘之璧 假道於虞以伐虢. 公曰 是吾寶也. 對曰 若得道於虞 猶外府也. 公曰 宮之奇存焉. 對曰宮之奇之爲人也 懦而不能强諫. 且少長於君 君暱之 雖諫 將不聽. 乃使荀息假道於虞曰 冀爲不道 入自顚軨 伐鄍三門. 冀之旣病 則亦唯君故. 今虢爲不道 保於逆旅 以侵敝邑南鄙 敢請假道以請罪于虢. 虞公許之 且請先伐虢. 宮之奇諫 不聽 遂起師. 夏 晉里克荀息帥師會虞師伐虢 滅下陽. 先書虞 賄故也. 虢公敗戎于桑田. 晉卜偃曰 虢必亡矣. 亡下陽不懼而又有功 是天奪之鑒而益其疾也. 必易晉而不撫其民矣 不可以五稔.진나라 荀息(荀叔)이 굴땅에서 나는(屈産:生良馬) 네 필의 말과 수극(垂棘:出美玉)땅에서 나는 둥근 옥으로, 虢나라를 치는 것으로서 虞나라 길을 빌릴 것을 청한데, 晉公이 왈: <이것은 우리 보배로다.>라 하자, 對曰: <만일 虞나라에게 길을 빌릴 수만 있다면, 마치 외부 창고에 보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라 하였다, 公曰: <宮之奇(虞臣)가 그곳에 있도다.>라 하자, 對曰: <宮之奇의 사람됨은 유약(懦)하여 능히 강하게 諫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虞君과 어려서 함께 자라(自少長於公宮) 君이 그를 사사로이 여겨, 비록 諫하여도 장차 듣지 않을 것입니다.>라 하니, 이내 순식으로 하여금 虞나라에게 길을 빌리게 하였다. 曰: <기(冀:國名)가 不道하여 전령(顚軨:地名)으로부터 침입해와 명(鄍:虞邑)의 三門을 벌하였으나(冀嘗伐虞至鄍), 冀가 지금 이미 病한 것은 즉 또한 오직 君 때문입니다(言虞能伐冀使病 稱虞彊以說其心). 지금 虢이 不道하여 역려(逆旅:客舍)에 보루(堡壘:保)를 쌓고 폐읍(敝邑)의 南鄙를 침공하였으니, 감히 길을 빌림을 청하여 虢에게 罪를 청할까 합니다.>라 하니, 우공이 그것을 허락하건대 虞가 먼저 虢나라를 칠 것을 또 청하자, 궁지기가 諫하였으나 듣지 않고 드디어 군사를 일으켰다. 여름에 진나라 이극과 순식이 虞나라 군대를 이끌고 虢나라를 정벌하고 수도 하양(下陽)을 滅하였다. 虞를 먼저 기록한 것은 뇌물(賄)을 탐하였기 때문이다(惡貪賄). 虢公이 桑田(虢地)에서 戎을 패퇴시키니, 晉의 복언(卜偃)이 曰: <虢은 반드시 亡하리다. 下陽이 망하였는데도 두려워하지 않고 또 戰功이 있으니, 이것은 하늘이 성찰(鑒:所以自照)을 빼앗고 그 疾을 더해줌이며, 반드시 晉을 쉽게 생각하고 그 民을 慰撫하지 못할 것이니, 가히 5년(五稔:熟)도 가지 못할지로다(爲下五年晉滅虢張本).>라 하였다.*下公穀作夏 下陽虢邑晉始見經下는 公羊과 穀梁에서 夏로 썼다. 下陽은 虢邑이며 晉이 비로서 經에서 보이기 시작하였다.

 

3-8-2 子曰繪事後素(繪胡對反)

子曰: 繪事는 素보다 後이니라.

繪事繪畫之事也後素後於素也考工記曰繪畫之事後素功

繪事는 繪畫之事(무늬있는비단회)이다. 後素는 素보다 後라는 것이다. 考工記曰: ‘繪畫之事는 素功보다 後이다.’라 하였다.

周禮冬官考工記畫繢之事青與赤謂之文赤與白謂之章白與黒謂之黼黒與青謂之黻五采備謂之繡凡畫繢之事後素功

周禮의 冬官 考工記에 ‘畫繢之事(채색고울회)에, 青與赤을 謂之文이라 하고, 赤與白을 謂之章이라 하고, 白與黒을 謂之黼(도끼 모양의 흑백색 꽃무늬 수:보)라 하며, 黒與青을 謂之黻(弓字 둘이 서로 등진 모양의 수:불)이라 하고, 五采가 備함을 謂之繡(오색을 갖춘 수:수)라 하나, 무릇 畫繢之事는 素功보다 後인 것이다.’라 하였다.

 

3-8-3 曰禮後乎子曰起予者商也始可與言詩已矣

曰: 禮가 後乎잇까? 子曰: 起予者 商이로니, 始로서 可히 與로 言詩할 수 있을지로다!

禮必以忠信為質(此禮字以儀文之禮言)

禮에는 반드시 忠信으로서 質을 삼아야 하나니(此의 禮字는 儀文之禮로서 言한 것이다.),

猶繪事必以粉素為先起猶發也起予言能起發我之志意

繪事는 반드시 粉素로서 先을 삼아야 함과 같은 것이다. 起는 發함과 猶이다. 起予는 能히 我之志意를 起發할 수 있음에 言한 것이다.

朱子曰起予者謂孔子言繪事後素之時未思量到禮後乎處而子夏首以為言正所以起發夫子之意非謂夫子不能而子夏能之以教夫子也○聖人豈必待學者之言而後有所起發盖聖人胷中包藏許多道理若無人叩擊則無由發揮於外一畨説起則一畨精神也

朱子曰: 起予라는 것은, 孔子께서 ‘繪事後素’라 言할 時에는 (子夏가)‘禮後乎’의 處에 到할 것에 思量치 못하였는데, 子夏가 首(먼저)로 言을 삼았으니, 正히 夫子之意를 起發하게된 所以임을 謂한 것이지, 夫子께서 不能하심에 子夏만이 그것에 能之하여 夫子를 教하였음에 謂한 것이 아니다. ○聖人께서 어찌 반드시 學者之言을 待한 而後에야 起發한 바를 有할 수 있겠는가? 대개 聖人의 胷中에는 許多한 道理를 包藏하고 있으나, 마치 人의 叩擊이 無일지면 則 이로 말미암아 外로 發揮됨도 無인 것과 같으니, 一畨(차례번)의 説을 起하게 하면 則 一畨의 精神이 (外로 發揮)인 것이다.

 

子夏问曰:“‘巧笑倩兮,美目盼兮,素以为绚兮’.(1)何谓也?”子曰:“绘事后素(2).”曰:“礼后乎?”子曰:“起予者商也(3),始可与言诗已矣.”
【注释】
(1)巧笑倩兮,美目盼兮,素以为绚兮:前两句见《诗经·卫风·硕人》篇.倩,音 qiàn,笑得好看.兮,语助词,相当于“啊”.盼:眼睛黑白分明.绚,有文采.
(2)绘事后素:绘,画.素,白底.
(3)起予者商也:起,启发.予,我,孔子自指.商,子夏名商.
【译文】
子夏问孔子:“‘笑得真好看啊,美丽的眼睛真明亮啊,用素粉来打扮啊.”孔子说:“这是说先有白底然后画画.”子夏又问:“那么,是不是说礼也是后起的事呢?”孔子说:“商,你真是能启发我的人,现在可以同你讨论《诗经》了.”

 

论语·八佾》有一段著名美文。

子夏问曰:“‘巧笑倩兮,美目盼兮,素以为绚兮。’何谓也?”子曰:“绘事后素。”
曰:“礼后乎?”子曰:“起予者商也!始可与言‘诗’已矣。”[1] 
文章绚丽,一波三折。字面上好懂,其实不然。从东汉开始,人们一直误读。请看关键句“绘事后素”,[魏]何晏集解引东汉郑玄注:“绘画,文也。凡绘画,先布众色,然后以素分布其间,以成其文。”
郑玄注之后,[宋]邢昺疏文进一步阐释:“案《考工记》云:‘画绘之事,杂五色。’下云:‘画缋之事,后素功。’是知凡绘画,先布众色,然后以素分布其间,以成文章也。”
疏文引入二句《考工记》文字,确属孔子说“绘事后素”的原始依据。有据可查,似乎不用怀疑其正确。
怀疑仍在。郑玄注“绘事后素”根本不符合绘画操作实际,更难配合通读“素以为绚”的妇女彩妆,以及诗乐也不可能在“礼后”。[宋]朱熹的《论语集注》不从,他另行注释“绘事后素”:“‘绘事’,绘画之事也。‘后素’,后于素也。《考工记》曰:‘绘画之事,后素功。’谓先以粉地为质,而后施五采;犹人有美质,然后可加文饰”。[2] 
郑玄的先布众色后勾白线,众色先于素;朱熹改为先粉地后施五采,五采(众色)后于素。先于素变后于素,改动很大。朱熹之后还有人引用“白受采”助其言,似可联系理解“素以为绚”。不过,朱熹的创新也不符合绘画操作实际,素为粉地不能服人。
清代凌廷堪不客气地写道:“朱子不用旧注,以‘后素’为后于素。于《考工记》注亦反之,以‘后素功’为先以粉地为质而后施五采。近儒皆以古训为不可易,而于‘礼后’之旨,则终不能会通而发明之,故学者终成疑义”。
凌廷堪等清代儒家重礼学研究,子夏部:“礼后乎?”孔子给予崇高肯定,“绘事后素”的“素”指礼,主旨十分重大。若按朱熹的创解,礼为一张白纸,重大意义没有了。
虽然如此,后于素有合理处。元明的科举考试都用朱熹的《论语集注》为标准,影响至今。今日的教育部《中学语文教学大纲》指定书目《论语通译》注释“绘事后素”:“‘绘事’,画画。‘后’,后于,在……之后。‘素’,白地子。意思说:画画总是先有个白地子,然后才能画。一说,女子先用素粉施面,然后才用胭脂、青黛等着色,打扮得漂亮”。
仍是照朱熹注释写的,其全文今译难读:
子夏问道:“‘美好的笑容真好看啊,美丽的眼睛黑白分明眼珠转啊,粉白的脸庞着色化妆绚丽多彩好打扮啊。’是什么意思呢?”孔子说:“先有了白地子,然后才画上画。”(子夏)又问:“(这使我想到,)礼节仪式是不是在(仁德之)后呢?”孔子说:“能阐明我的意思的是你卜商呀!现在开始可以同你谈论《诗》了。”
今译作者因关键的“绘事后素”造成的掣肘,“礼后乎”以下尽力补救礼仪仁德,真是用心良苦。我查过今日书店的《论语》白话译本,大多取朱熹说,仍属误读。请看一版、再版的李泽厚著《论语今读》的译文:
子夏问道:“‘美的笑容,酒涡微动;美的眼睛,黑白传神;洁白纸上,灿烂颜色’这是什么意思?”孔子说:“先有白底子,而后才绘画。”子夏说:“那么礼在后?”孔子说:“启发我的是你呀,这样才可以与你讲诗了。”[5]
礼在后不译,他在《记》中表示不同意定论“仁内礼外”或“仁先礼后”,“我以为,礼乃人文,仁乃人性,二者实同时并进之历史成果”,想说什么?不懂。何况师徒问答,与礼对举的不是仁。“素以为绚”指妇女,译文说成白纸画颜色也明显不合。
久攻不下。让我们先放一放,另起头。
相关联的《周礼·考工记》的“凡画缋之事,后素功”。确为“绘事后素”的母本,让我们观注它。不过,这也是一个老大难问题,也肇端于郑玄注:“素,白采也,后布之,为其易渍污也。不言绣,绣以丝也。郑司农说以《论语》曰:“缋事后素。”
郑玄(公元127—200年)字康成,兼通古文经学今文经学,有东汉最大的博学家之名,遍注群经。由于他的权威性,画缋之事后布白采之说影响至深。因为后勾白线使五采显出形象,所以重要性超过五采。他其实是望文生义,曲解“画缋之事”,更不懂“后素功”,还弄巧反拙地猜测后布白采的原因是“为其易渍污也”。郑司农即郑众,先于郑玄注《周礼》,故引用。郑众以此言说孔子的“缋事后素”是对的,但在意义的理解上犯了相同错误。
“绘事后素”,就是“凡画缋之事,后素功。”
“绘事”即“画缋之事”。
“后素”即“后素功”。
这是明显的,无异议。工匠们的“凡画缋之事,后素功”早出,孔子的“绘事后素”晚出,理当如此。指明这一点很有必要。于是从早出的言论求解更有利。
为了能破解千古之谜,先分开追究:什么是“画缋之事”?什么是“后素功”?
从《考工记》出发破解这两道难题,才是正路。它的文句多,前文中就埋藏着答案,让我们找出来。
首先要明白,“画缋之事”,古今有别。郑玄时代他知道的“画缋”是美术的全过程操作,而古代的“画缋”,包括民间的“画缋”,仅限于美术的后半段工作,不是全过程。《考工记》的“画”专指笔涂五采颜料成采图,其“缋”是刺绣五色丝线成绚丽花纹,他们仅仅局限于设色操作部分。我联系民间的“画缋”说明《考工记》的“画缋”,好懂,因国为民间美术中一直保留了“画”为“涂采”,“缋”为“配色”的古老说法,同于“画缋之事”的“画缋”。
画和缋,《考工记》称为“设色之工”,一点也不含糊。指出“设色之工五”,并具体列出名称,“设色之工:画、缋、钟、筐、巾荒、。”即不同专业的画工、缋工、钟工、筐工、
巾荒工五种设色工。郑玄注中说“不言绣,绣以丝也。”他误将“画缋”作一词,这其实是两工,缋从丝,缋工即丝绣工。《考工记》还交待“钟氏染羽”,筐人阙,“慌氏涑丝”,后三工较为特殊,一般人不知。于是,设色五工被《考工记》简要地说成“画缋之事”,又被孔子直呼为“绘事”。全体妇女从事丝绣配色,是设色工中最庞大的一支队伍,简称“绘事”很恰当。
“画缋之事”“绘事”,设色工之事。《考工记》首先说“画缋之事,杂五色。”注意:“杂五色”——青、赤、黄、白、黑,正是专指设色操作部分。这之后才说“凡画缋之事,后素功”。如果不嫌啰嗦,此言等于说:凡是各个专业青赤黄白黑相杂的设色之事,全都“后素功”。素功先行,绘事在后,“绘事后素”,手工艺工匠口耳相传的对程序步骤的经验总结。
《考工记》使用的概念不孤,广泛见于文献,通行于社会,用于民间。例如《仪礼·乡射礼》:“大夫布侯,画以虎豹,士布侯,画以鹿豕。”侯为箭靶。《周礼·春官·司常》:旗物“皆画其象焉”。几个“画”字都是指画工设色,彩画布侯与旗帜,以完成作品。《尚书·顾命》描写公元前1004年周成王死时的灵堂装饰有“画纯”。何谓“画”?旧传:“彩色为画。”唐人孔颖达进一步阐释:“《考工记》云:‘画缋之事,杂五色。’是‘彩色为画’。盖以五彩画帛以为缘。”灵堂张挂的帷幕都“画缘”,即布帛边沿装饰彩色花纹。这里的传与疏都有正确,可见《考工记》来历久远。
《尚书·益稷》:“絺绣以五采,”就是缋。缋或作绘,从丝,絺即细线(不一定是蚕丝),绣为飞针走线操作,缋是统称。缋属于设色,今天民间绣女叫配色线。缋,绘同音同义,文献混杂使用,毫无区别。若从字面上看,缋从“贵”,绣品珍贵;绘从“会”,特指会集:杂五色。汉唐以来绘为通用字。
明白了“画缋之事”是设色,再问“后素功”?孔子的“绘事后素”,也推重“素”的功用。“素”指什么?这是全文的核心。
“素”义本色、底色、白色、无色(不杂五色),但此“素”用法特别,今日难见。肯定地说,“素”不是郑玄后布的“白采”,杂五色中已有白色颜料。也绝不是朱熹的“粉地”,一张白纸不值钱。细加推究,无论《论语》或《考工记》所言,“素”是思想真正乘重点。
当我们知道“画缋之事”为设色,那么无论画工设色、缋工设色,就要有人先起草图,草图无采色,称为“素”,在语言双声习惯上理当叫“素描”。素为黑色或单一色线描,素描纹样未完成,设计稿,也称白描(无采色,不是白粉勾线)。今日美术界通行白描,不再叫素描,以免与西方传入的油画素描相混。素是白描设计。《考工记》所记画工缋工只负责设色,自己不会起白描稿,白描稿靠传承稿本,另有专人学习应用。虽然正文中没有明确交待(有脱落阙文),很显然,白描稿是基础,技术要求高,民众尊为画师,先行一步,再交给画工设色,缋工设色,由他们完成创作。
在民间,设计木版年画墨稿的师傅地位崇高,以秘藏稿本作资料设计新样,人很少,而为年画涂彩的工人满街村。农村妇女织好白布等待游方的“花儿匠”来白描,再配色绣花。贵州农村难见“花儿匠”,大都找巧手要剪纸底稿,也有自己剪,或到场坝上买。中国南方各省剪的花样也是“素”——花样设计,半成品,功用不同于北方窗花,是完成品。
素有白描起稿以利设色的意义,可惜它处罕见。《国语·吴语》:“夫谋,必素见成事焉,而后履之。”旧注:“素犹豫也。履,行也。”豫通预,预先设计方案。此素如同预谋,预先谋及成事,然后照着方案履行。运筹帷幄,决胜千里。这正是白描稿的作用,履行以后获成事。
到了唐代,寺庙壁画盛行,《唐朝名画录》有“素龙”“绘事未毕”“设色未终”等记载,都是素为白描的直证。可见民间一直通用素为素画、白画、白描、粉本、画稿、画样,只是注经家们不懂。画圣吴道子白描,弟子工人布色,唐宋画史资料广为记载。吴道子自己称草图为粉本,大家都懂。
“后素功”:后于白描设计而获成功。
工匠来说,在前在后计程序,原本不分高低贵贱,但从工艺步骤上也强调了素功的奠定性作用。而孔子的“绘事后素”素为礼,提升素描为第一功,绘事为第二功,有了等级。农业国家的礼突出等级。
考察到此,《考工记》的“凡画缋之事,后素功”。今译就很容易:凡是画工设色,缋工设色,都在白描起稿后而成五彩图纹之功。对于传统绘画来说,这其实是常识,至今民间美术普遍如此。湖北江陵马山一号战国楚墓出土的绣品丰富精彩,目击者说:可以看到预先用淡墨或朱砂起稿的实物。素描在先,绣以五采在后。解放前,敦煌莫高窟藏经洞大批白描画稿的发现,早已引起全世界注目。白描画样受到历代壁画工珍藏,有的还标明用色。
为了理解孔子的“绘事后素”,我们全力考察《考工记》,获得满意收获。现在回到《论语·八佾》子夏和孔子对话上,似乎好懂,“绘事后素”:绘画设色后于素描;其它文句跟上,浅层次通读已容易办到。必须指出,儒家师徒这次交谈大有深义,值得细嚼慢咽。他们讨论礼的意义,文采华丽,思想严肃,对于认识儒家是难得的教材,不能轻易放过。孔子弟子卜商号子夏,从民间几句婚礼歌开始的对话,两个来回,起伏跌宕,很有教益。但读时要抛弃《诗经》诗序和《论语》有关旧注,不受其限制,仿佛第一次见面,只就字面文句来理解。这是本文又一个主要任务。
《诗·卫风·硕人》为齐侯女庄姜嫁到卫国作卫庄公夫人,婚礼上,喜气红火的卫国民众尽情歌唱她无比美丽,俏妙动人。歌声富丽,生动感人,新娘新郎身份高贵,估计后来民间婚礼都流行演唱,借以表达客人庆贺之情。当子夏听到歌唱新娘“巧笑倩兮,美目盼兮,素以为绚兮”时,心旌摇动,深受感染,情不自禁地问身旁老师:“何谓也?”这几句诗歌明白如话,不难懂,他是不知道怎么形容自己的美感,脱口而出“何谓也”?子夏从新娘心情喜悦,绚丽如花的角度提问,“素以为绚”重在“绚”,绚丽该如何欣赏?子夏问后,原以为老师必有同感,自会赞许。但主张文质彬彬的孔子看他忘乎所以,重“绚”轻“素”,偏于节庆形式外表,不给予支持。轻巧地用“绘事后素”作答,不温不火,暗含平素本质的重要性,而采色表现仅仅居第二位功劳。针对性很强,恰到好处。
比较出真知。“素以为绚”的素与“绘事后素”的素,同为素,同为基础,同是本质,同是决定性的原本形象,或浓妆淡抹总相宜的形象,或设色各异的白描形象。不过,小的差别在于“素以为绚”的素是女人生来的高妙形象,“绘事后素”的素是“后素功”,素描功第一位,设色功第二位。虽然“素以为绚”重在“绚”,但“绚”并不贬低原女人的天生形象,不为“素”“绚”排坐次,而只是锦上添花。答语“绘事后素”有坐次,“素”第一,五采绘第二。所以说孔子四两拨千斤,轻巧地纠正了子夏一时激动而自然流露出的偏颇。子夏一听“绘事后素”,老师强调后素功,立刻警觉,从感性回归理性。同时由素想到礼,想到儒家主张礼是立人之本,马上改问:“礼后乎?”引出新的戏剧性一幕。
礼为素!这其实是孔子当时还没有想到的,来得突然,所以高度肯定:“这是你的发明,是你卜商启发了我!从此以后我们可以共同讨论诗了。”教学相长,生动的一例。
礼为素,重在礼,“绘事后素”的主旨。仅就主旨而论,汉唐宋元明清二千多位注释家看法相同。无论他们怎样误识绚素绘事,总要拉扯到礼为素、重在礼上来,这是对的。子夏问,孔子答,两个来回,第一次是铺陈,第二次见精神,精神重在礼。孔子经常提醒弟子们重礼。《论语》篇中,《雍也》:“子曰:君子博学于文,约之以礼,亦可以弗畔矣夫!”《子罕》有弟子说:“夫子循循然诱人,博我以文,约我以礼。”《颜渊》重见“子曰:博学于文,约之以礼,亦可以弗畔矣夫!”还进一步强调:“非礼勿视,非礼勿听,非礼勿言,非礼勿动。”类似的言论很多,可见子夏临场觉悟不偶然,仍是孔子平日教导的结果。
“巧笑倩兮,美目盼兮,素以为绚兮。”描写新娘的经典名句,三句来自民歌,可能《硕人》后出,女性一生最美时刻被精彩地唱出,活灵活现。天生丽质通过化妆、戴首饰、穿上花衣裳,立即变成阳光下的鲜花。民歌好懂,任何翻译都会损伤,所以我不译。孔子的“绘事后素”来自百工经验,概括精当,也令人叫绝!都是“博我以文”的文,民间分散知识。
《孟子·万章下》说:“孔子之谓集大成。”分散的原生态的民歌与手工艺知识在走向中华民族文化进程中,正是孔子“集大成”。见之于《八佾》的师徒问答事虽小,却生动、绚丽、真切、深刻地反映出这一伟大过程。
礼为素,那么与礼对应的是什么叫?这个问题众说纷纭。前引《论语通译》认为“礼节仪式对应仁德”,实属无赖,前人注释札记造成的。在孔子思想中礼就是仁,礼仁不成对。明摆着:礼为素,乐为绚;礼乐对举。令人惊异的是,我查过的所有注释均未言及!
孔子与弟子们熟悉民间画绘操作过程,“绘事后素”,素描直白,杂五彩后喜庆欢乐,可知素与彩对,礼与乐对。此乐为五彩美术,也为人心欢乐。再看“巧笑倩兮,美目盼兮,素以为绚兮”。婚庆活动,艺术会集,歌声四起,喜气洋洋,礼为素,乐为绚,礼乐成对。此乐为艺术音乐,也为人心欢乐(lè),艺术音乐(yuè)和欢乐二义,都是礼乐的乐,文娱属性。一切动人的欢乐喜庆都是礼的仪式,完成礼的需要;一切绚丽的五彩设色都是为了纹样,用纹样来说明礼的意义。
在孔子主张中,礼乐不分。礼别异,乐和同。因为春秋时期家族亲情势力大,集体人又少,自觉和同占上风,节日礼乐主导生活。国家行政和法律权威在秦汉以后大增,但仍用礼的名义,而乐的治理功能大减,所以集权国家的读书人难知小国寡民施行乐治的分量。
有了这样的基本认识,旁证好找。《孔子家语·论礼》:“古之人与上古之人,达于礼而不达于乐,谓之素。”礼乐相辅而行,无乐行礼,就好像未杂五采的素描。《礼记·仲尼燕居》也有:“不能乐,于礼素。”又有:“达于礼而不达于乐,谓之素。同于“素以为绚”和“绘事后素”的礼乐,文艺娱乐的欢乐人人自愿,并不看低乐的功用。子夏用民歌“素以为绚”三句,引出孔子的百工知识“绘事后素”;再用礼居前、乐居后的儒家思想提问,意外受到老师的高度赞扬。我们今天新解读懂了这段话,更意外地感到儒家学派的根在民众中间。
《论语·泰伯》:“子曰:兴于诗,立于礼,成于乐。”这个“诗”不是狭窄的三百首《诗经》,是民歌,甚至是民间广义的口传知识,包括百工经验,所以我不加书名号。“兴”,兴起,一切知识兴起于民众口传知识。孔子汇集,并提高到礼乐。“兴于诗,立于礼,成于乐”。我以为这是孔子“集大成”的心得,民间文化走向民族文化的纲领,使农业社会传统礼乐与新的天下一家实现了无缝对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