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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17일 오후 04:22

solpee 2015. 12. 17. 16:27

無名子集詩稿 尹愭

又有御畵墨竹障子賜西山詩曰


휴정은 일체의 승직(僧職)을 버리고 서울을 떠난 뒤 자신의 빛을 갈무리하여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으나 도(道)를 물으러 찾는 이는 날로 늘어났다. 이 무렵 이른바 ‘기축(己丑)의 옥(獄)’이라 불리는 역모사건(逆謀事件)이 발생했다. 선조 22년(1589) 10월,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기도가 조정에 알려져 그 일당은 모조리 잡히고 정여립은 자살했으나 역모에 가담한 무리 중에 승려 출신이 많은데다 역모의 본거지가 계룡산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여러 절이라는 점이 불교계를 난처하게 했다.

이때 포도청에 검거돼 문초를 당하던 무업(無業)이라는 이가 휴정의 ‘향로봉시’를 들어 마치 모반(謀反)에 가담한 것처럼 진술하고 그의 제자인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도 끌어들여 관련이 있는 듯이 무고했다. 역모의 혐의를 받은 휴정은 묘향산에서, 유정은 강릉에서 각각 붇잡혀 옥에 갇히게 된다. 휴정은 비록 역모의 누명을 쓰고 잡히긴 했으나 그의 태도는 의연했으며 말은 분명하고 조리 있었다. 선조는 휴정의 억울함을 간파, 즉시 석방하게 한 뒤 그의 시집(詩集)을 열람하고는 뛰어난 문장과 충정(忠情)에 감탄하며 자기가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폭에 시 한수 [一絶]를 지어 하사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잎은 붓끝에서 나왔고
뿌리는 땅에서 난 것 아니네
달빛 비쳐도 그림자 드리우지 않고
바람이 흔들어도 소리 아니 들리네
葉自毫端出 根非地面生
月來難見影 風動未聞聲

휴정은 임금의 특별한 배려에 감사드리는 뜻에서 시 한 수를 지어 올린다.

소상강 변의 우아한 대나무가
임금님 붓 끝에서 나와
산승이 향을 사르는 곳에
잎새마다 가을 소리 머금어 있네
瀟湘一枝竹 聖主筆頭生
山僧香爇處 葉葉帶秋聲


선조는 또 한 수를 지어 휴정에게 내린다.

동해변 금강산에서는
얼마나 많은 인걸이 나왔던가
태산 북두처럼 높은 이름
오늘의 여래이어라
東海有金剛 雄賢幾種胎
高名山斗仰 今世是如來

휴정은 임금의 시에 대해 답시를 짓는다.

세상 일 잊고 존재의 실상을 조견하나니
허령한 진면목 어찌 윤회(輪廻)에 들랴
금강산의 돌들은
모두 크고 작은 여래이어라
寂照非千世 虛靈豈入胎
金剛山下石 大小自如來

선조는 후한 상을 내리며 위로한 뒤 산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있은 지 불과 3년 만인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4월 14일 상륙한 왜군(倭軍)은 삽시간에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맹렬한 기세로 북상(北上)했다. 사세가 위급해지자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서북으로 향해 마침내 압록강 근처[龍彎]까지 이르렀다. 선조는 홀연 휴정이 생각나 좌우에 그의 소재를 묻고 시급히 찾아오도록 명한다[彦幾行狀]. 이때 휴정은 묘향산에서 칼을 짚고 분연히 일어나 의주로 가서 선조를 알현했다. 선조는 그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나라의 위급함이 이와 같으니 경은 부디 나라와 백성들을 구제해주오….”

휴정은 울면서 다짐한다.

“나라 안의 모든 승려들로 하여금 늙고 병들어 싸움터에 나갈 수 없는 이들은 각자 머물고 있는 절에서 불보살(佛菩薩)의 도움을 빌도록 하고, 그밖의 모든 승려들은 신이 통솔하여 싸움터에 나가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휴정의 충성에 감동한 선조는 즉석에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란 직책을 내렸다. 어전을 물러나온 그는 곧 전국의 제자들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모두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조선 건국 이래 조정으로부터 줄곧 억압 받아온 승려들이었으나 불교의 자비사상에 입각하여 나라과 백성을 위기로부터 건지려는 의승병(義僧兵)들은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다.

사명당 유정(惟政)은 강원도 관동(關東)지역에서 일어났고 처영(處英)은 호남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권율(權慄) 장군을 도와 행주(幸州)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했다. 휴정은 직접 문도를 1천5백여명을 거느리고 명나라 원병(援兵)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평양성 탈환에 이어 선조 26년(1593) 10월, 의승병들이 어가를 호위하고 서울로 돌아와 폐허가 되다시피 한 서울의 복구작업을 폈다. 의승병들의 전공(戰功)을 시기한 유신(儒臣)들의 비난 소리가 높아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병을 보낸 명나라 조정과 명군진중 및 적진에까지 휴정의 이름은 떨쳤다.

명나라군의 총지휘자인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을 비롯, 삼협총병(三協總兵)이하 여러 장수들은 다투어 글월을 보내 휴정의 전공(戰功)을 치하했다. 어떤 이(이여송)는 “나라를 위하여 적을 무찌르니 태양을 꿰뚫는 그 충성에 우러러 존경할 뿐”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여송은 또 송시(頌詩)한 수를 지어 휴정에게 보냈다.

공리에 관심 없이
불도만 닦더니
나라일 위급하매
산을 내려왔네
無意圖功利 全心學道仙
今聞王事忽 摠攝下山嶺

선조 27년, 휴정은 사직할 뜻을 임금께 아뢰었다.

“신의 나이 팔십, 이제 근력이 쇠하였아오니 군사(軍事)를 제자 유정 및 처영에게 맡기고, 도총섭의 인장(印章)을 반납하고 신이 본래 머물던 묘향산으로 돌아가고자 하나이다.”

이에 임금은 그의 뜻을 아름다이 여기고 늙음을 민망히 여겨 떠나는 그에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號)를 내렸다. 묘향산으로 돌아온 휴정은 또다시 유유자적한 본래의 한도인(閑道人)이 되었다. 선조 37년(甲辰, 1604) 1월 23일, 휴정은 원적암(圓寂庵)에서 조용히 열반을 준비하였다. 이날 따라 눈은 하염없이 내렸다.

휴정은 눈발 속에 견여(肩輿)를 타고 가까운 산내 암자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부처님께 절한 뒤 방장실(方丈室:주지실)로 돌아와KT다. 목욕재계하고 가사장삼을 수한 뒤 부처님전에 향을 사른 다음 그는 법상9法床)에 올라 마지막 설법을 했다. 설법을 마친 그는 붓을 가져오게 하여 자신의 모습을 그린 영정(影幀)에 시 한 수를 쓴다.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이더니
80년 뒤에는 내가 저것이고녀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昔在壬辰之亂。西山大師休靜。杖劒進謁。宣廟命爲八道十六宗都揔攝。而率其門徒及他僧一千五百。會于順安法興寺。助天兵戰于牧丹峯。斬獲甚多。克復京城之後。以勇士百人。迎大駕還京都。宣廟有贈詩曰。東海有金剛。雄賢幾鍾胎。高名山斗仰。今世是如來。又有御畵墨竹障子賜西山詩曰葉自毫端出。根非地面生。月影雖難見。風動未聞聲。休靜敬次曰。寂照非千世。虛靈豈入胎。金剛山下石。大小自如來。瀟湘一枝竹。聖主筆頭生。山僧香爇處。葉葉帶秋聲。弟子惟政等。以敎旨與衣鉢藏于頭輪山大芚寺。乃是入寂時遺囑云。當宁癸丑。因湖南僧上言。命西南道臣詳探事蹟。許其建影堂賜額。南曰表忠。西曰酬忠。命官給祭需歲祀之。又親製序若銘。以甲寅四月八日揭于祠中。其七世法孫碩旻。以其韻徧請于士大夫。余亦敬和三疊。  
仁天祐福國。高釋謝凡胎。雲漢昭回處。忠臣聳後來。西山映寶墨。孤竹倐天生。颯颯淸風起。如聞紙上聲。慧劒元消沴。靈根不染胎。阿誰國賴活。天遣異僧來。聖恩天下絶。孤竹筆頭生。萬古西山寺。蕭蕭如有聲。西山奮忠烈。孤高似墨胎。法孫藏寶墨。流映曁雲來。聖主嘉忠勇。恩波筆下生。西山孤竹節。千古樹風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