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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體書勢

solpee 2015. 11. 5. 05:53

 

四體書勢


西晉•衛恒

衛恒(?~291),中國西晉書法家。著名的書法家衛瓘之子,字巨山,河東安邑(今山西省夏縣)人。官至秘書丞、尚書郎。惠帝時為賈後等所殺。他善草書,兼學隸、篆,所以他的草、章草、隸、篆都寫得極好。他根據自己的實踐,著有《四書體勢》,是研究中國書法的重要資料。

衛恒

昔在黃帝,創制造物。有沮誦、倉頡者,始作書契以代結繩,蓋睹鳥跡以興思也。因而遂滋,則謂之字,有六義焉。一曰指事,上下是也;二曰象形,日月是也;三曰形聲,江河是也; 四曰會意,武信是也;五曰轉注,老考是也;六曰假借,令長是也。夫指事者,在上為上,在下為下。象形者,日滿月虧,象其形也。形聲者,以類為形,配以聲也。會意者,以戈為武,人言為信是也。轉注者,以老為壽考也。假借者,數言同字,其聲雖異,文意一也。

옛날 黃帝께서 살아계실 제, 법률·문자·제도 등을 창제하시고 구체적인 실체를 만들었다. 沮誦·倉頡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처음 書契를 만들어서 결승을 대체하였으니, 대개 조수의 발자국 흔적을 보고서 생각을 일으켰다. 그런 까닭에 마침내 불어나게 되어, 바로 그것을 문자라고 하였으니, 六義가 있게 되었다. 첫째는 指事이고 上·下이다; 둘째는 象形이며 日·月이다; 셋째는 形聲이고 江·河이다; 넷째는 會意이고 武·信이다; 다섯째는 轉注이고 老·考이다; 여섯째는 假借이고 令·長이다; 대저 指事라는 것은 丄에서 上 으로 변화되었고, 丅에서 下로변화되었다. 象形이라는 것은 日은 가득하고 月은 일그러진 그 形을 모방하였다. 形聲이라는 것은 같은 부류로써 形이 되었고, 聲旁으로써 짝하였다. 會意라는 것은 止자와 戈자가 武자로 되었으며, 人자와 言자가 信자로 된 것이다. 轉注라는 것은 老자로써 고령을 뜻하는 글자가 되었다. 假借라는 것은 여러 음절이 같은 글자이며, 聲調는 비록 다르나 文意는 한결같다.

自黃帝至於三代,其文不改。及秦用篆書,焚燒先典,而古文絕矣。漢武帝時魯恭王壞孔子宅,得《尚書》、《春秋》、《論語》、《孝經》,時人已不復知有古文,謂之科鬥書。漢世秘藏,稀有見者。魏初傳古文者出於邯鄲淳,恒祖敬侯寫淳《尚書》,後以示淳而淳不別。至正始中,立三字石經,轉失淳法,因科鬥之名,遂效其形。太康元年,汲縣人盜發魏襄王塚,得策書十餘萬言,按敬侯所書,猶有仿佛。古書亦有數種,其一卷論楚事者最為工妙,恒竊悅之,故竭愚思以贊其美,愧不足以廁前賢之作,冀以存古人之象焉。古無別名,謂之《字勢》云。

 

 黃帝로부터 夏·商·周 三代에 이르기까지 문자 형체는 달라지지 않았다. 秦에 이르러 篆書를 사용하였고, 선조의 전적을 불태워서 古文이 다 없어졌다. 漢 武帝 시기 魯恭王이 孔子 古宅을 허물고『尙書』·『春秋』·『論語』·『孝經』을 얻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미 古文이 있는지를 더는 알지 못하였으니, 그것을 蝌蚪書라고 일컬었다. 漢代 밀장하거나 수장하여, 드물게 본 사람이 있었다. 三國 魏나라 초기 古文을 전하는 자는 邯鄲淳에서 비롯되었으니, 衛恒의 조부 敬侯는 邯鄲淳이 쓴『尙書』를 모사하여, 후에 邯鄲淳에게 보였는데, 邯鄲淳이 구별하지 못하였다. 正始年間에 이르러 三字石經을 세웠는데 오히려 邯鄲淳의 필법을 잃었다. 때문에 蝌蚪書의 명성이 있었으며, 마침내 그 형체를 본받았다. 太康元年에 汲縣 사람이 戰國시기 魏나라 襄王의 무덤을 구멍을 뚫고 발굴해서 죽간문서 십여만 글자를 얻었으며, 敬侯가 서사한 것에 비추어 비슷하게 할 여지가 있었다. 고서적 또한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그중 한권은 초나라 일을 논한 것이 가장 섬세하여, 衛恒은 마음속으로 기뻐했던 고로, 우둔한 생각을 다하여 그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전현의 작업에 참여할 수 없어 부끄러우며, 고인의 형상을 보존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옛날에 별다른 명칭이 없어, 이것을『字勢』라고 일컫고 말하련다.

 

黃帝之史,沮誦倉頡,眺彼鳥跡,始作書契。紀綱萬事,垂法立制,帝典用宣,質文著世。 爰暨暴秦,滔天作戾,大道既泯,古文亦滅。魏文好古,世傳丘墳,歷代莫發,真偽靡分。 大晉開元,弘道敷訓,天垂其象,地耀其文。其文乃耀,粲矣其章,因聲會意,類物有方。日處君而盈其度,月執臣而虧其旁;雲委蛇而上布,星離離以舒光。禾卉苯䔿以垂穎,山嵯峨而連岡;蟲跂跂其若動,鳥飛飛而未揚。觀其措筆綴墨,用心精專,勢和體均,發止無間。或守正循檢,矩折規旋;或方圓靡則,因事制權。其曲如弓,其直如弦。矯然突出,若龍騰於川;渺爾下頹,若雨墜於天。或引筆奮力,若鴻鵠高飛,邈邈翩翩;或縱肆婀娜,若流蘇懸羽,靡靡綿綿。是故遠而望之,若翔風厲水,清波漪漣;就而察之,有若自然。信黃唐之遺跡,為六藝之範先,籀篆蓋其子孫,隸草乃其曾玄。睹物象以致思,非言辭之所宣。

 

黃帝의 사관인 沮誦과 倉頡이 그 조수의 족적을 관찰하여, 비로소 書契를 만들었다. 만사를 다스리고, 법률을 垂敎하고 제도를 제정하였으며, 제도와 문물은 운용하고 선포하여, 질박한 내용과 우아한 외관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나 포악한 진대에 이르러, 하늘에 차고 넘치게 죄를 지어, 대도를 이미 상실하였고, 古文 또한 소멸되었다. 魏나라 文帝 曺丕는 옛것을 좋아하여,『九丘』와『三墳』을 당세에 전파하였는데, 역대에는 발굴되지 않아, 진위는 구분이 안 된다. 위대한 晉이 개국하여, 정도를 널리 펴고, 법칙을 두루 펼쳤으며, 하늘은 그 日月星辰 등 하늘의 온갖 형상을 드리웠고, 땅은 그 山川草木 등 대지의 온갖 형상을 빛냈다. 그 문채가 이내 빛나니, 찬란하구나! 그 문장이여! 소리로 인하였고 뜻을 모았는데, 만물과 유사하니 방법이 있었다. 日은 군왕의 자리에 처해 있어서 그 법도가 가득하고, 月은 신하의 직분을 집행하고 있어서 그 옆이 일그러졌다. 雲은 구불구불하게 겹쳐 쌓인 뱀과 같이 상공에 덮여있으며, 星은 길게 이어져서 빛을 펼쳤다. 禾는 무성한 모양을 하고 이삭을 드리웠으며, 山은 산세가 높고 험하고 산등성이를 연이었다. 蟲은 벌레가 꿈틀꿈틀 기어가는 모양을 하고 장차 움직이려는 듯하며, 鳥는 매우 빨리 날려하나 아직 비양하지 않았다. 붓을 준비하고 먹을 장식하는 것을 관찰하니, 생각이 정교하고 전일하며, 필세는 조화롭고 결체는 균일하며, 시작과 그침이 끊임이 없다. 正道를 지켰거나 절도를 따랐으며, 법도는 구부렸거나 돌렸으며, 方圓은 규칙이 없는 듯하나, 형편을 따라 유리한 형세를 만들었다. 그 굽은 것은 활과 같고, 그 곧은 것은 활시위와 같다. 용감히 돌출하니, 용이 개천에서 뛰어오르는 듯하고, 막막하게 아래로 무너지니, 비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하다. 어떤 것은 붓을 당기어 힘을 내니, 홍학과 고니가 높이 나는듯하여, 아득하고 멋스러우며, 어떤 것은 제멋대로 굴어 유연하고 아름다우며, 술은 깃털을 매달은 듯하여, 화려하고 안정된 모양이다. 그러므로 멀리 그것을 바라보니, 상서로운 바람과 세찬 물과 맑은 파도와 잔물결인 듯하여, 가까이 가서 그것을 관찰하니, 마치 자연과 같다. 정말로 黃帝와 唐堯시대에 유적은 六藝의 범례가 되어 선도하였으며, 籒文과 小篆은 대개 고문의 자손이고, 隸書와 草書는 바로 증손과 현손이다. 치밀하게 생각하여서 자연계의 사물 및 그 변화 현상을 보니, 언사는 선양할 바 아니다.  

 

昔周宣王時史籀始著大篆十五篇,或與古同,或與古異,世謂之籀書也。及平王東遷,諸侯立政,家殊國異,而文字乖形。秦始皇帝初兼天下,承相李斯乃損益之,奏罷不合秦文者。斯作《倉頡篇》,中車府令趙高作《爰曆篇》,太史令胡毋政作《博學篇》,皆取史籀大篆,或頗省改,所謂小篆者。或曰下杜人程邈為衙吏,得罪始皇,幽系雲陽十年,從獄中改大篆,少者增益,多者損減,方者使圓,圓者使方。奏之始皇,始皇善之,出為禦史,使定書。或曰邈定乃隸字也。

 

옛날 周 宣王시기 史籒가 처음 大篆 15편을 저술하였는데, 어떤 것은 古文과 같고 어떤 것은 古文과 달라,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籒書라고 일컬었다. 平王에 이르러 동쪽 洛邑으로 천도하니, 제후들은 자기의 정책을 세워, 대부가 통치하는 지역과 정책이 다르고, 제후가 통치하는 지역과 정책이 같지 않아서, 문자는 형체를 맞지 않게 하였다. 秦始皇帝가 처음 천하를 통일하자, 丞相 李斯는 바로 문자를 증감하고, 秦나라 문자와 부합된 것을 상주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李斯는『倉頡篇』을 지었고, 中車府令 趙高는『爰曆篇』을 지었으며, 太史令 胡毋敬은『博學篇』을 지었는데, 모두 史籒의 大篆을 취하였고, 어떤 것은 상당히 생략하고 고쳤으니, 이른바 小篆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下杜人 程邈이 衙吏가 되었는데, 秦 始皇에게 노여움을 사서 雲陽에 10년 동안 구금되자, 옥중에서 大篆을 개정하니, 적은 것은 더하고, 많은 것은 줄였으며, 모난 것은 둥글게 하고, 둥근 것은 모나게 하였다. 秦 始皇에게 이것을 상주하자, 秦始皇이 이것을 훌륭히 여기니, 출옥하게 하여 御史로 삼고, 그로 하여금 문자를 심사하여 결정하게 하였다. 어떤 사람은 程邈이 심사하여 결정한 것이 隸書라고 한다.

 

自秦壞古,文有八體:一曰大篆,二曰小篆,三曰刻符,四曰蟲書,五曰摹印,六曰署書,七曰殳書,八曰隸書。王莽時,使司空甄酆校文字部,改定古文,複有六書:一曰古文,即孔子壁中書也;二曰奇字,即古文而異者也;三曰篆書,即秦篆書也;四曰佐書,即隸書也;五曰繆篆,所以摹印也;六曰鳥書,所以書幡信也。及漢祭酒許慎撰《說文》,用篆書為正,以為體例,最新,可得而論也。秦時李斯號為工篆,諸山及銅人銘皆斯書也。漢建初中,扶風曹喜善篆,少異於斯,而亦稱善。邯鄲淳師焉,略究其妙,韋誕師淳而不及。太和中,誕為武都太守,以能書留補侍中、中郎將,善篆,采斯、喜之法,為古今雜形,然精密閑理不如淳也。邕作《篆勢》云:

 

 秦나라로부터 古文이 못쓰게 되었고, 문자는 8체가 있었는데, 첫째는 大篆이고, 둘째는 小篆이며, 셋째는 刻符이고, 넷째는蟲書이며, 다섯째는 摹印이고, 여섯째는 署書이며, 일곱째는 殳書이고, 여덟째는 隸書이다. 王莽시기 司空 甄酆으로하여금 문자의 일부분을 교정케 하여, 古文을 개정하고, 다시 六書가 결정되었는데, 첫째는 古文으로 바로 孔子 고택의 벽중에서 발견된 서체이고; 둘째는 奇字로 바로 古文이나 다른 것이며; 셋째는 篆書로 바로 秦나라 篆書이고; 넷째는 佐書로 바로隸書이며; 다섯째는 繆篆으로 생각한 바 印章에 모사한 것이고; 여섯째는 鳥書로 幡信에 서사한 것이다. 漢나라 祭酒 許愼에 이르러『說文解字』를 지었는데, 전서로써 표준 자형으로 하여 체제를 삼아서, 아주 새롭고, 적합하여 평가할만하다. 秦나라 때에 李斯는 능숙하다고 불려서, 여러 명산 및 동상의 銘文 모두 李斯가 썼다. 漢 建初年間에 扶風사람 曹喜는 전서에 능숙하였는데, 李斯와 다르고, 또한 착한사람으로 유명하였다. 邯鄲淳은 스승으로 삼고, 그 묘함을 대략 궁구하였으며, 韋誕은 邯鄲淳을 스승으로 삼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太和年間에 韋誕은 武都太守가되었고, 서예에 능숙하였기 때문에 오래토록 侍中에 임명되었으며, 魏氏 황족의 寶器銘文의 글은 모두 韋誕이 서사하였다. 漢末 또 蔡邕이 있었는데 侍中과 中郞將이 되었으며, 전서에 능숙하였고, 李斯와 曹喜의 필법을 채용하여, 古今이 섞인 형체를 만들었는데, 정밀하고 자유자재하나 邯鄲淳만 못하다. 蔡邕은『篆勢』를 지어 말하길:

 

字畫之始,因於鳥跡。蒼頡循聖,作則制文。體有六篆,要妙入神。或象龜文,或比龍鱗。紆體效尾,長翅短身。頹若黍稷之垂穎,蘊若蟲蛇之棼緼。揚波振激,鷹跱鳥震。延頸協翼,勢似淩雲。或輕舉內投,微本濃末;若絕若連,似露緣絲,凝垂下端。 從者如懸,衡者如編。杳杪邪趣,不方不圓。若行若飛,跂跂翾翾。遠而望之,若鴻鵠群遊,絡繹遷延。迫而視之,湍漈不可得見,指撝不可勝原。研桑不能數其詰屈,離婁不能睹其隙間。般倕揖讓而辭巧,籀誦拱手而韜翰。處篇籍之首目,粲粲彬彬其可觀。華豔於紈素,為學藝之範閑。嘉文德之弘蘊,懿作者之莫刊。思字體之俯仰,舉大略而論旃。

秦既用篆,奏事繁多,篆字難成,即令隸人佐書,曰隸字。漢因用之,獨符璽、幡信、題署用篆。隸書者,篆之捷也。上谷王次仲始作楷法,至靈帝好書,時多能者,而師宜官為最,大則一字徑丈,小則方寸千言,甚矜其能。或時不持錢詣酒家飲,因書其壁,顧觀者以酬灑直,計錢足而滅之。每書輒削而焚其捬,梁鵠乃益為捬,而飲之酒,候其醉而竊其。鵠卒以書至選部尚書。宜官後為袁術將,今巨鹿宋子有《耿球碑》,是術所立,其書甚工,雲是宜官書也。梁鵠奔劉表,魏武帝破荊州,募求鵠。鵠之為選部也,魏武欲為洛陽令而以為北部尉,故懼而自縛詣門。署軍假司馬,在秘書書勤書自效,是以今者多有鵠手跡。魏武帝懸著帳中,及以釘壁玩之,以為勝宜官,今宮殿題署多是鵠書。鵠宜為大字,邯鄲淳宜為小字,鵠謂淳得次仲法,然鵠之用筆,盡其勢矣。鵠弟子毛弘教于秘書,今八分皆弘之法也。漢末有左子邑,小與淳、鵠不同,然亦有名。魏初,有鐘、胡二家為行書法,俱學之于劉德升,而鐘氏小異,然亦各有其巧,今盛行於世。作《隸勢》云:

鳥跡之變,乃惟佐隸,蠲彼繁文,從此簡易。厥用既弘,體象有度,煥若星陳,鬱若雲布。其大徑尋,細不容發,隨事從宜,靡有常制。或穹窿恢廓,或櫛比針裂,或砥平繩直,或蜿蜒繆戾,或長邪角趣,或規旋矩折。修短相副,異體同勢。奮筆輕舉,離而不絕。纖波濃點,錯落其間。若鐘*設張,庭燎飛煙。嶄岩嵯峨,高下屬連,似崇台重宇,層雲冠山。遠而望之,若飛龍在天;近而察之,心亂目眩,奇姿譎詭,不可勝原。研桑所不能計,宰賜所不能言。何草篆之足算,而斯文之未宣。豈體大之難睹,將秘奧之不傳?聊佇思而詳觀,舉大較而論旃。

 

글씨와 그림의 시작은 조수의 족적에서 기인한다. 倉頡이 성인의 의도에 따라 법칙을 만들고 문자를 제정하였다. 字體는 여섯 가지 篆書가 있었는데, 아름답고 절묘하다. 거북의 무늬 같기도 하고, 용의 비늘 같기도 하다. 몸을 앞으로 굽히고 꼬리에 힘을 다하며, 날개를 길게 하고 몸을 짧게 하였다. 떨어뜨린 것은 기장의 늘어뜨린 이삭의 끝과 같고, 쌓인 것은 곤충과 뱀이 분란하게 뒤섞여 있는 듯하다. 파도가 높이 올라 성대하게 솟구치듯 매가 높이 날아오르니 새가 깜짝 놀라고, 목은 길게 빼고 양 날개를 조화되게 하니, 氣勢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어떤 것은 경쾌하게 들어 안으로 투합 되게 하였고, 처음을 경미하게 하고 끝을 왕성하게 하여, 끊어진 것 같기도 하고 이어진 것 같기도 하니, 마치 이슬이 가는 선을 따라 하단에 응결되어 드리워진듯하다. 방종한 것은 매달린 것 같고, 평평한 것은 역은 것 같다. 끝을 묘연하게 하고 취향을 이상하게 하였으며, 모지지도 않고 둥글지도 않으며,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것 같기도 하니, 꿈틀꿈틀 기어가는 모양이오, 공중을 비상하는 모양이다.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니 큰 기러기와 고니가 무리지어 노니는 듯하고 왕래가 잇달아 끊어지지 않고 배회한다. 가까이 가서 그것을 보니, 급류의 물가에서는 드러낼 수 없고, 의도가 겸양하여 근원을 다할 수 없다. 이재에 뛰어난 사람도 필세가 구불구불한 것을 셀 수 없으며, 시력이 좋은 離婁도 틈새를 볼 수 없다. 魯般과 는 읍양하고 재주를 사양하였다. 籒와 沮誦은 공수하고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서적의 목차를 처리하니 아름답고 산뜻하며, 내용과 외관이 함께 갖추어져 있어 성대하여 훌륭하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울이 고운 흰 비단에 펼치니 서예를 배우는 전범이 되었다. 학문의 덕이 넓고 깊어 찬양되었고, 작자가 막대하게 새긴 것을 찬미하였다. 글자 형태의 일거일동을 생각하여 대략을 들어 논할 지어다.

 

漢興而有草書,不知作者名。至章帝時,齊相杜度,號稱善作。後稱善作。後有崔瑗、崔寔,亦皆稱工。杜氏殺字安,而書體微瘦;崔氏甚得筆勢,而結字小疏。弘農張伯英者,而轉精其巧,凡家之衣帛,必先書而練之。臨池學書,池水盡墨。

下筆必為楷則,常曰:“匆匆不暇草書”。寸紙不見遺,至今世尤寶其書,韋仲將謂之“草聖”。伯英弟文舒者,次伯英;又有姜孟穎、梁孔達、田彥和及仲將之徒,皆伯英之弟子,有名于世,然殊不及文舒也。羅叔景、趙元嗣者,與伯英同時,見稱於西州,而矜此自與,眾頗惑之。故伯英自稱:“上比崔、杜不足。下方羅、趙有餘。”河間張超亦有名,然雖與崔氏同州,不如伯英之得其法也。

 

한나라가 흥함에 초서가 있었는데, 작자와 성명을 알지 못했다. 장제(章帝, 76-88) 때에 이르러 제상인 두도가 글을 잘 쓴다고 불렸다. 뒤에 최원과 최식이 있어 또한 모두 공교하다 일컬어졌다. 두도는 글씨를 마무리하는 것은 심히 안정되고 글씨의 형체는 조금 파리했다. 최원은 깊이 필세를 얻었으나 결자가 조금 성글었다.

   홍농 사람인 장지는 이로 말미암아 정미함으로 바꾸어 더욱 공교해졌다. 무릇 집의 옷과 비단에 반드시 글씨를 쓴 뒤에 표백하여 세탁했다. 연못에 임하여 글씨를 공부하여 연못물을 다 검게 했다. 붓을 내림에 반드시 모범이 되기 때문에 “바빠서 초서를 쓸 겨를이 없다.”라고 했다. 작은 종이도 버림을 당하지 않아 지금 세상에 이르러 더욱 그 글씨를 보배롭게 여기니 위탄은 이를 일러 ‘초성’이라 했다. 장지의 동생 장창(張昶)은 장지의 버금이다.

   또한 강후(姜)ㆍ양선(梁宣)ㆍ전언화 및 위탄의 무리가 있었는데, 모두 장지의 제자로 세상에서 유명하였으나 장창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다.

나휘(羅暉)와 조습(趙襲)은 장지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서주에서 칭찬을 받아 공교함을 뻐기고 스스로 자부하였으나 뭇사람들이 자못 이를 의심하였다. 그러므로 장지는 스스로 “위로는 최원과 두도에 비하여 부족하고, 아래로 나휘와 조습과 견주면 남음이 있다.”라고 했다. 하간 사람인 장초 또한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비록 최원과 같은 고을 사람이지만 장지가 그 법을 얻은 것만 같지 못하다.

 

崔瑗作《草勢》云:

書契之興,始自頡皇;寫彼鳥跡,以定文章。爰暨末葉,典籍彌繁。時之多僻,政之多權。官事荒蕪,其墨翰;惟多佐隸,舊字是刪。草書之法,蓋又簡略;應時諭指,用於卒迫。兼功並用,愛日省力;純儉之變,豈必古式。觀其法象,俯仰有儀;方不中矩,圓不副規。抑左揚右,望之若欹。獸跂鳥跱,志在飛移;狡兔暴駭,將奔未馳。或??點?,狀似連珠,絕而不離。畜怒怫鬱,放逸生奇。或淩邃惴栗,若據高臨危。旁點邪附,似螳螂而抱枝。絕筆收勢,餘綖糾結。若山峰施毒,看隙緣巇;騰蛇赴穴,頭沒尾垂。是故遠而望之,漼焉若注岸奔涯;就而察之,一畫不可移。幾微要妙,臨事從宜。略舉大較,仿佛若斯。

 

최원이 《초서체》를 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글의 흐름은 창힐과 史皇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새의 자취를 그려 문자를 제정하였다. 이에 후대에 이르러 전적이 더욱 많아졌다. 당시 대부분 편벽되었고 다스림은 권도가 많았다. 관청의 일이 거칠어져 먹과 붓을 수고롭게 했다. 오직 노예를 보좌하는 것만 쓰고 옛날 문자는 깍아버렸다. 초서의 법은 대개 또한 간략하다. 시대에 마땅하고 가르킴을 깨달을 수 있어 갑자기 다급함에 사용하였다. 공로를 겸하고 사용함을 아우르니 날을 아끼고 힘을 였었다. 순수하고 검소한 변화가 어찌 반드시 옛날 법식이랴?

 그 법과 형상을 보니 굽어봄과 우르러봄에 법도가 있다. 모나는 곱자를 적중하지 않고 둥글음은 그림쇠를 따르지 않으며 왼쪽은 누르고 오른쪽은 드날려 바라보면 마치 험한 것 같다. 놀라 발돋움하고 새가 머뭇거림은 뜻이 날고 이동하는 데 있고 교활한 짐승이 펄쩍 놀라는 것은 달아나려고 하나 아직 달리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다.

혹 농담이 어우러진 점의 형상은  구슬을 연결한 것과 같아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떨어지지 않으며 노함을 쌓아 울분하지 않으며 표일함을 방출하고 기이함을 나타낸다.

혹 깊은 골짜기에 침범하여 벌벌떨며 두려워하는 것은 마치 높은 데에 매달려 위험에 임한 것 같고 곁의 점이 비켜서 붙은 것은 마치쓰르라미가 나뭇가지를 움켜잡은 것 같다.

붓을 다하고 형세를 거두어도 남은 실이 꼬여 엉킨 것은 마치 독을 막는 가장자리 틈에서 뱀이 구멍에 다다라 머리를 묻고 꼬리를 세우는 것 같다. 그러므로 멀리서 바라보면 험준함이 마치 봉우리 위의 벼랑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 것 같고 나아갓 살피면 한 획도 옮길 수 없다. 기미와 묘함은 때에 임하여 마땅함을  좇는다. 간략하게 대개를 들면 마치 이와 같은 듯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