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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시

solpee 2015. 7. 9. 15:35
- 백열다섯 번째 이야기

 

  광복 70주년을 맞아 특별 기획을 마련하였습니다. 7월 9일부터 8월 20일까지 4회 분의 ‘한시감상’ 
내용은 개화기/일제 강점기의 한문 작품들을 번역 소개함으로써 당시 지식인들의 눈으로 본 시대상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광복이 갖는 의미를 재조명하려 합니다.

 

2015년 7월 9일 (목)

 

안중근 의사의 거사 소식을 듣고

평안도 장사가 두 눈을 부릅뜨고
양 죽이듯 나라 원수 통쾌하게 죽였네
내 죽기 전에 좋은 소식 듣게 되니
국화 옆에서 미친 듯 노래하고 춤추네

블라디보스토크항에 송골매가 솟구치고
하얼빈역에서 벽력이 불을 뿜었네
얼마나 많은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추풍에 놀라 일시에 수저를 떨어뜨렸나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으랴
소인배들은 언제나 금성탕지를 무너뜨렸지
다만 하늘을 떠받칠 이런 인물을 얻어서
외려 망해갈 때 나라의 빛을 발하게 하네

平安壯士目雙張
快殺邦讎似殺羊
未死得聞消息好
狂歌亂舞菊花傍

海蔘港裏鶻摩空
哈爾濱頭霹火紅
多少六洲豪健客
一時匙箸落秋風

從古何甞國不亡
纖兒一例壞金湯
但令得此撑天手
却是亡時國有光

 

- 김택영(金澤榮, 1850~1927)
「의병장 안중근이 나라의 원수를 갚았다는 소식을 듣고[聞義兵將安重根報國讎事]」
『소호당시집정본(韶濩堂詩集定本)』 권4 「기유고(己酉稿)」

 

     


  김택영의 자는 우림(于霖)이고, 호는 창강(滄江)ㆍ소호당(韶濩堂)이다. 창강은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명성을 떨쳐 이건창(李建昌), 김윤식(金允植) 등 당대의 문호들에게 인정받았고 1891년 뒤늦게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국의 현실에 절망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중국 퉁저우(通州)에서 짱치앤(張騫)의 도움을 받아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일자리를 구해 옌푸(嚴復), 투지(屠寄) 등 중국 명사들과 교류하며 조선의 시문집, 역사서를 간행하면서 생활하였다.

  이처럼 중국에 망명 중이던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사건을 듣고 의분에 북받쳐 위와 같은 시를 지은 것이다. 당시 안중근의 의거는 중국인들에게도 놀라운 사건으로 회자되었는데 암담한 망명 생활 중이던 창강에게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준 한줄기 빛과 같은 쾌거였다.

  위의 시를 보면 첫 수에서는 나라의 원수를 통쾌히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에 겨운 심정을 유감없이 드러내었고, 둘째 수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와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활약을 노래해 당시의 상황과 주변의 평가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수에서는 매국노들로 인해 스러져가던 나라에 영웅이 나타나 역사에 마지막 빛을 발해주었다는 것으로 망국의 위안을 삼고 있다.

  창강은 이후 안중근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다가 1916년에 「안중근전(安重根傳)」을 지었는데, 지금까지 명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그가 일찍이 평안도에서 교육 활동을 하였고 우리 교민들이 많이 거주하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사를 모아 훈련하는 등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애국 활동을 수행해 왔으며, 하얼빈의 거사가 일시적인 울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음을 밝혔다.
  본문에서는 안중근이 거사를 치르기 위해 하얼빈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을 마치 옆에서 목격한 듯 생생한 문장으로 상세히 전달하고 있는데, 이는 『사기(史記)』의 형가(荊軻)가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러 떠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안중근이 거사하러 떠나기 전에 불렀다는 비분강개한 「장부가(丈夫歌)」 역시 형가의 「역수가(易水歌)」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런 점은 창강이 안중근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뜻을 드높이 쌓아야 하네 / 丈夫處世兮 蓄志當奇
시대가 영웅을 만듦이여, 영웅이 시대를 만들도다 /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북풍이 매섭고 추움이여, 내 피는 끓어오르는구나 / 北風其冷兮 我血則熱
분개하여 한번 떠남이여, 반드시 도적을 도륙하리라/慷慨一去兮 必屠鼠賊
모든 우리 동포여 공업을 잊지 말라 / 凡我同胞兮 毋忘功業
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 /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창강은 「안중근전」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논(論)을 두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 … 예로부터 충신 의사는 항상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말았는데 지금 안중근은 그 뜻을 장대하게 달성하고 죽었다. 천하의 이 소식을 들은 자들은 마치 깊은 밤중에 혼자 자다가 벽력 소리를 들은 것처럼 놀랐으니, 아아! 천년에 한 번 있을 위대한 공업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거사를 성공한 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이었겠지만 그가 잡힌 뒤 200여 일 동안 뜻을 굽히지 않고 살아간 것으로 말하자면 그의 의지이니, 이것이 실로 어려운 것이다.”

  창강은 1927년 78세의 나이로 중국 퉁저우에서 병사하였다. 그해 4월, 랑산(狼山)에 장사 지내었는데 묘비에는 ‘한국시인김창강지묘(韓國詩人金滄江之墓)’라고 썼다.

 

 

글쓴이 : 김성애(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