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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去來辭

solpee 2015. 4. 3. 06:47

歸去來辭 - 陶淵明
歸去來兮 / 돌아가야지
田園將蕪胡不歸 / 논밭이 묵는데 어찌 아니 돌아가리
旣自以心爲形役 / 스스로 마음이 몸의 부림 받았거니
奚惆愴而獨悲 / 어찌 홀로 근심에 슬퍼하고 있으리
悟已往之不諫 / 지난 날은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으니
知來者之可追 / 이제 앞으로는 그르치는 일 없으리
實迷途其未遠 / 길이 어긋났으나 멀어진 건 아니니
覺今是而昨非 / 지난 날은 잘못됐지만 이제부터 바르게 살리라
舟遙遙以輕颺 / 고운 물결 흔들흔들 배를 드놓이고
風飄飄而吹衣 / 바람 가벼이 불어 옷자락을 날리네
問征夫以前路 / 지나는 이에게 앞길 물어 가야하니
恨晨光之熹微 / 희미한 새벽빛이 갈길 먼 나에게 한스럽네
乃瞻衡宇 / 어느덧 이르러 집이 바라다 보이면
載欣載奔 / 기쁜 마음에 달리듯이 집으로 가리
童僕歡迎 / 어린 종이 나와 반가이 맞이하고
稚子候門 / 어린 아들 문 앞에 기다려 서있겠지
三徑就荒 / 세 갈래 오솔길에 잡초 우거졌어도
松菊猶存 / 소나무와 국화는 그대로 남아 있겠지
携幼入室 / 어린 아들 손잡고 방으로 들어서면
有酒盈樽 / 술항아리 가득한 술이 나를 반기리
引壺觴以自酌 / 술병과 술잔 끌어당겨 혼자 마시며
眄庭柯以怡颜 / 뜰의 나무를 지그시 보며 미소지리라
倚南以寄傲 / 남쪽 창에 기대어 멋대로 있노라면
容膝之易安 / 작디작은 방이지만 편하기 더 없으리
園日涉以成趣 / 정원은 매일 거닐어도 풍치가 있고
門雖設而常關 / 문은 나 있으나 늘 닫아 두고 있으리
策扶老以流憩 / 지팡이 짚고 가다가는 쉬기도 하고
時矯首而遐觀 / 때로는 머리 들어서 멀리 바라보리다
雲無心以出岫 / 구름은 무심히 골짝을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 날다 지친 저 새 돌아올 줄을 알거늘
翳翳將入 / 해가 어스름에 넘어가려 할 때에는
撫孤松而盤桓 / 서성이며 홀로 선 소나무 쓰다듬어 보리


歸去來兮 / 돌아왔구나
請息交以絶遊 / 사귐도 어울려 놀음도 이젠 그치리
世與我而相違 / 세상과 나는 서로 어긋나기만 하니
復駕言兮焉求 / 다시 수레에 올라서 무엇을 구하리
悅親戚之情話 / 친한 이웃과 기쁘게 이야기 나누고
樂琴書以消憂 / 음악과 글을 즐기며 시름을 삭이리
農人告余以春及 /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음을 알리면
將有事於西疇 / 서쪽 밭에 나가서 일도 하여야겠네
或命巾車 / 때로는 천막을 두른 수레를 몰아서
或棹孤舟 / 때로는 외로운 배의 삿대를 저어서
旣窈窕以尋壑 / 깊고 굽이져 있는 골짝을 찾아가보리
亦崎嶇而經丘 / 험한 산길 가파른 언덕길을 지나면
木欣欣以向榮 / 물오른 나무들은 꽃을 피우려 하고
泉涓涓而始流 / 샘물은 퐁퐁 솟아 졸졸 흘러내리리라
善萬物之得時 / 모두가 철을 만나 신명이 났건마는
感吾生之行休 / 나의 삶 점점 더 저물어 감 느끼겠지
已矣乎 / 다 끝났네
寓形宇內復幾時 / 세상에 몸이 다시 얼마나 머무르리
曷不委心任去留 / 가고 머뭄을 자연에 맡기지 않고서
胡爲乎遑遑欲何之 / 어디로 그리 서둘러 가려 하는가
富貴非吾願 / 부귀는 내가 바라던 바도 아니었고
帝鄕不可期 / 신선 사는 땅은 기약할 수 없는 일
懷良辰以孤往 / 날씨가 좋은 날은 홀로 나아가서는
或植杖而耘耔 / 지팡이 세워 두고 김매고 북돋워 보리
登東皐以舒嘯 / 언덕에 올라가서 길게 휘파람 불고
臨淸流而賦詩 / 맑은 시냇가에 앉아 시도 지어보리라
聊乘化以歸盡 / 자연을 따르다 죽으면 그만인 것을
樂夫天命復奚疑 / 천명을 누렸거늘 더 무엇 의심 하리


據七去之義

先生爲風憲長, 先生之同年進士, 有不協於家室者, 欲出其妻, 遣所親之人, 據七去之義, 來稟於先生. 先生正色, 答曰, 夫婦, 人倫之始, 萬福之原, 所關至重. 婦人之性, 陰暗無知, 雖有所失, 爲君子者, 當率以正, 使之感化, 共成家道, 此是厚德. 如或未盡於表率之道, 而遽欲去之, 不近於薄乎. 況此一家倫理間事, 外人不敢容議, 商量自處可也. 聞之者歎服而去, 先生之厚德類此. 

 

선생(조광조)이 대사헌으로 있을 적에 선생과 같은 해에 진사가 된 동기 중에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내를 쫓아내고 싶어서 선생에게 친한 사람을 보내 칠거지악을 근거로 문의하였다. 선생이 정색을 하고 대답하였다.

“부부는 인륜의 시작이며 만복의 근원이니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요하다. 부인의 성품은 어둡고 무지하니,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군자로서는 바른 도리로 이끌고 감화시켜 함께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두터운 덕이다. 모범을 다하지도 않고서 갑자기 쫓아내려 한다면 너무 야박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이것은 한 집안의 윤리에 관한 일이니, 바깥사람이 감히 논의할 수 없다. 헤아려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이 탄복하고 돌아갔다. 선생의 두터운 덕이 이와 같았다.
-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어류(語類)」, 『정암집(靜菴集)』 부록 권2

조선 초기 사림파의 영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일화이다. 조광조의 벗은 아내와 갈라설 생각으로 ‘칠거지악’이 이혼 사유가 되는지 조광조에게 문의하였다. 조광조는 남편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았지만, 그의 답변을 통해 칠거지악이 도덕적으로도 온당치 않고 당시 현실과도 거리가 멀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칠거지악은 『대대례기(大戴禮記)』 「본명(本命)」에 나온다.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일곱 가지 이유가 있으니,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버리고, 아들이 없으면 버리고, 음란하면 버리고, 질투하면 버리고, 나쁜 병이 있으면 버리고, 말이 많으면 버리고, 도둑질하면 버린다.”

  도둑질은 범죄임이 분명하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도 당시의 도덕관념상 잘못이라 치자. 하지만 아들이 없거나 병이 있는 건 아내의 잘못은 아니다. 게다가 말이 많다는 따위의 터무니없는 이유로 아내를 쫓아낼 수 있다니, 남녀 차별적이고 부조리한 관습임에 분명하다. 현대 여성으로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억누르기 어려울 것이다. 돌아갈 곳이 없거나, 삼년상을 함께 치렀거나, 앞서는 빈천했다가 뒤에는 부귀해진 경우는 버릴 수 없다는, 이른바 삼불거(三不去)의 예외 조항도 그 분노를 가라앉히기는 역부족이리라.

  『대대례기』는 서한(西漢)의 예학자 대덕(戴德)이 분서갱유로 사라진 예서(禮書)의 편린들을 기억에 의지하여 엮은 책이다. 그 예서들의 배경은 순장(殉葬)과 인신공양이 횡행하던 시대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관념 자체가 없던 시대였다. 하물며 여성의 권익에 대한 고려가 있을 리 만무하다. 칠거지악은 그러한 시대의 산물이다.

  칠거지악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주자(朱子)의 힘이다. 주자는 『소학(小學)』을 편찬하면서 『대대례기』를 인용하여 칠거지악을 언급하였다. 이후 『소학』이 초학자의 필독서로 자리 잡으면서 칠거지악은 마치 유교 사회의 보편적인 관념인양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주자학이 지배하던 조선 시대에는 칠거지악을 이유로 아내를 쫓아내는 일이 가능했을까? 조광조의 벗처럼 그러한 시도를 했던 남편들이 없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조선의 법전에는 이혼에 관한 조항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합법적으로 아내를 쫓아낼 수 있는 출처(出妻) 조항이 명시된 『대명률(大明律)』과 다른 점이다. 이혼을 하려면 국왕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아무리 아내의 잘못이 분명하더라도 이혼은 쉽게 허락해 주지 않았다. 칠거지악 같은 애매한 사유로 이혼을 허락해 주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유학자들도 입을 모아 칠거지악의 부당성과 비현실성을 지적하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여성의 재혼이 자연스러웠던 고대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여성의 재혼을 금지하므로 칠거지악 같은 사소한 이유로 아내를 쫓아낼 수는 없다고 하였다. 성리학적 이념에 투철한 원리주의자로서 주자의 말이라면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조차 칠거지악만은 따르지 않았다. 특히 아들이 없거나 나쁜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내쫓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밖에도 칠거지악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 호남 유학자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는 국법이 이혼을 금지하므로 아내가 칠거지악을 저질러도 쫓아낼 수 없다고 하였다. 구한말의 유학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칠거지악을 시행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하였다. 여성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누이는 어릴 적 독서하는 오라버니에게 따져 물었다. “아들이 없는 건 운명인데 무슨 죄가 있다고 칠거지악에 넣은 것입니까?”

  우리 전통 사회가 남성 우위의 사회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비록 현실적 구속력은 없었으나 칠거지악이라는 관념이 존재 자체만으로도 여성에게 억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은 유교문화권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우리 전통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결코 낮은 편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불평등한 부부관계의 역사는 짧다. 조선 시대에 칠거지악을 핑계로 아내를 내쫓는 일이 빈번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다.


장유승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