蕭: 쑥 소. 規: 법 규. 曹: 무리 조. 隨: 따를 수
出典 : 사기(史記)
文意 : 소하가 제정한 법령 제도를 조참이 그대로 dl어받아 지킨다는 뜻이다.
解義 : 국정을 담당하는 사람은 정치상의 규정이나 제도를 간소화 해서 백성을 안심시키느지 않으면 국가를 안정시킬수 없다는 뜻.
曹参-公元 前190年,字敬伯,沛(今江苏沛县)人,西汉开国名将。萧规曹随,萧何创立了规章制度,死后,曹参做了宰相,仍照着实行。比喻按照前任的成规办事。汉朝刚刚建立时,人民饱受战乱之苦,迫切需要休养生息,发展经济。萧何顺应民意,制定了一系列鼓励人民生产的积极措施。到了曹参当丞相的时候,大的社会环境还是如此,因此曹参审时度势,采取“无为而治”的策略,遂留下了“萧规曹随"的佳话。
蕭何가 법을 만들고 曹參이 그대로 따랐다는 뜻으로, 예전부터 사람들이 쓰던 제도를 그대로 따르거나 이어 나가는 것을 이르는 말.
소하와 조참은 漢 고조 劉邦과 동향인 패현의 하급 관리 출신으로, 유방이 擧兵한 초기부터 따라 나선 최측근이었다.
서로 빈한할 때 둘도 없이 친했던 두 사람은 초한전쟁 승리 뒤 논공행상 때문에 사이가 벌어졌다. ‘한 번도 전장에서 말을 달린 일 없이 그저 붓과 입만 놀린(未嘗有汗馬之勞 徒持文墨議論)’ 소하가 일등 공신이 된 반면, 70여 군데 부상을 입으며 혁혁한 무공을 세운 조참은 뒤처졌던 것이다. 고조는 소하를 승상으로 삼아 곁에 두면서 조참은 산동지방 제후국의 상국으로 멀찌감치 떼 놓았다.
혜제 2년 소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참은 상경을 서둘렀다.
“내 곧 승상이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과연 사령장을 지닌 황제의 사자가 도착했다.
惠帝二年,蕭何卒。參聞之,告舍人趣治行,「吾將入相」。
居無何,使者果召參。
두 사람은 천하가 다 알 만큼 사이가 나빴지만, 소하가 죽으면서
자신을 후임으로 천거할 것을 조참은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임 승상 조참은 오로지 전임 승상이 만든 법을 충실히 따를 뿐 무엇 하나 고치는 일이 없었다. 다만 언행이 질박하고 꾸밈없는 이를 발탁하고, 눈에 보이는 실적과 명성만 탐하는 관리들을 내칠 따름이었다. 그 나머지는 밤낮으로 술만 마셨다. ‘승상이 그래서야 되겠느냐.’며
누가 간언이라도 할라치면 좋은 술을 대접하고, 또 말을 꺼낼 듯하면 다시 술을 권하고 대취하게 만들어서 결국은 그냥 돌아가게 만들었다.
擇郡國吏木詘於文辭,重厚長者,即召除為丞相史。吏之言文刻深,欲務聲名者,輒斥去之。日夜飲醇酒。卿大夫已下吏及賓客見參不事事,來者皆欲有言。至者,參輒飲以醇酒,間之,欲有所言,複飲之,醉而後去,終莫得開說,以為常。
승상이 이렇게 정무를 돌보지 않자 황제는 ‘先帝의 元勳이라고 감히 나를 경시하는가.’라며 화가 났다. 우회적으로 경고를 보내도 허사,
마침내 황제는 승상을 불러 면전에서 힐문했다.
《사기 曹相國世家》는 청년 황제와 늙은 승상의 문답을 이렇게 전한다.
조참: 폐하와 선제 중에 누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십니까?
혜제: 짐이 어찌 선제를 넘보겠는가.
조참 : 그러면 저와 소하 중 누가 더 낫습니까?
혜제: 그야 그대가 못한 것 같군.
조참: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폐하는 선제에 미치지 못하고 신 또한 소하만 못합니다.
선제와 소하 재상은 천하를 평정하고 또한 법령과 제도를 제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신 등은 그 제정된 법령과 제도를 굳게 지켜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혜제: 그대가 옳다. 그만하라.
版本原文
書巢墨莊
《书巢》是陆游所著,陆游(1125—1210),字务观,号放翁。汉族,越州山阴(今浙江绍兴)人。南宋诗人。少年时即受家庭中爱国思想熏陶,高宗时应礼部试,为秦桧所黜。孝宗时赐进士出身。中年入蜀,投身军旅生活,官至宝章阁待制。晚年退居家乡,但收复中原信念始终不渝。创作诗歌很多,今存九千多首,内容极为丰富。抒发政治抱负,反映人民疾苦,风格雄浑豪放;抒写日常生活,也多清新之作。词作量不如诗篇巨大,但和诗同样贯穿了气吞残虏的爱国主义精神。杨慎谓其词纤丽处似秦观,雄慨处似苏轼。著有《剑南诗稿》《渭南文集》《南唐书》《老学庵笔记》。
송나라 때 陸游가 자기 서재를 書巢, 즉 책둥지로 불렀다. 어떤 손님이 와서 물었다. "아니 멀쩡한 집에 살면서 둥지라니 웬 말입니까?" 육유가 대답했다. "당신이 내 방에 들어와 보지 못해서 그럴게요. 내 방에는 책이 책궤에 담겼거나 눈앞에 쌓였고 또 책상 위에 가득 얹혀 있어 온통 책뿐이라오. 내가 일상의 기거는 물론 아파 신음하거나 근심·한탄하는 속에서도 책과는 떨어져 본 적이 없소. 손님도 안 오고 처자는 아예 얼씬도 않지. 바깥에서 천둥 번개가 쳐도 모른다네. 간혹 일어나려면 어지러이 쌓인 책이 에워싸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소. 그러니 서소라 할밖에. 내 직접 보여드리리다." 손님을 끌고 서소로 가니 처음엔 들어갈 수가 없었고, 들어간 뒤에는 나올 수가 없었다. 손님이 껄껄 웃고는 "책둥지가 맞소" 하며 수긍했다. 육유의 '書巢記'에 보인다.
吾室之内,或栖于椟,或陈于前,或枕藉于床,俯仰四顾,无非书者。吾饮食起居,疾痛呻吟,悲忧愤叹,未尝不与书俱。宾客不至,妻子不觌,而风雨雷雹之变,有不知也。间有意欲起,而乱书围之,如积槁枝,或至不得行。则辄自笑曰:“此非吾所谓巢者邪?”乃引客就观之。客始不能入,既入又不能出。乃亦大笑曰:“信乎其似巢也。”
五代의 孟景翌은 일생 책만 읽었다. 문을
나설 때는 책 실은 수레를 따라오게 하면서 종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그의 서재를 書窟, 즉 책동굴이라고 말했다.
노나라 사람 曹平도 집에 책이 많았는데 없어질까 걱정해 돌을 쌓아 창고를 만들어서 책을 보관했다. 세상에서 이를 조씨의 書倉 곧
책창고라고 불렀다.
송나라 때 劉式이 세상을 뜨자 그
아내가 남편이 읽던 책 1000여 권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아들들에게 말했다. "이것을 네 아버지는 묵장墨莊이라고 했다. 이제 너희에게 배움을
증식시키는 도구로 준다." 묵장은 먹글씨로 이루어진 집이란 의미다. 서책은 그 자체로 집 한 채이다. 청나라 때 李鼎元과
胡承珙 등도 여기서 뜻을 취해 자기 호를 묵장이라 했다.
서재가 새 둥지나 짐승의 굴 같대서 서소와 서굴이다. 책창고와 먹물로 지었대서 서창과 묵장이다. 책
속에 묻혀 그들은 부지런히 읽고 또 읽어 큰 학자가 되었다. 남들 하는 걱정 다 하고 남 놀 때 놀면서 이룰 수 있는 큰일은 어디에도 없다.
공부는 단순 무식해야 한다. 문밖의 천둥 번개 소리가 들리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