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8講(12/11)
1.(行草)後孫傳家統裕德
繼家聲正道元無
極行之萬世榮
유덕한 가통이 후손대대로 물려지고 바른 도의 소리가 계승되어 만세토록 이어지리라.
2.(金)凌雲筆
縱橫正有凌雲筆
俯仰隨人亦可憐
凌雲? 휘날리는 구름
凌雲筆(手)? 詩文이나 筆力이 뛰어남을 비유.
凌雲志? 塵世를 벗어나 仙界에 듦 또는 그런 뜻
3. (隸)心地淸淨方爲道
退步原來是向前
揷秧詩 - 契此和尙
手把靑秧揷滿田 / 푸른 모 손에 쥐고 논에 가득 심으며
低頭便見水中天 / 고개 숙이니 물 속에 하늘이 보이네
心地淸淨方爲道 / 마음이 맑고 깨끗하니 비로소 도를 이루고
退步原來是向前 / 뒷걸음치는 것이 원래 앞으로 나아가는 것
手把青秧插满田低头便见水中天心地清净方为道倒退原来是向前。
扇面,唐代布袋和尚所作。行楷。从内容上启发人们遇事要步步相让,推步才是真正的进步。做人要低调才能掌管全盘,心净则烦恼尽
行书楷写,章草楷写俱有。整个作品顺畅奔放,字写得遒健大方,有布袋和尚那种无所求顺其自然的境界
4.(草)知其白守其黑爲天下式
흰 것을 안 다음에 검은 것을 보살펴야 세상의 본보기가 될 것
道德經 二十八章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 兒.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爲天下式,常德不 , 復歸於無極,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樸散則爲器. 聖人用之, 則爲官長, 故大制不割.
知其雄,守其雌,为天下溪。为天下溪,常德不离,复归于婴儿。知其白,守其黑,为天下式,为天下式,常德不忒,复归于无极。知其荣,守其辱,为天下谷。为天下谷,常德乃足,复归于朴。朴散则为器,圣人用之,则为官长,故大制不割。
* 本文 第 二十八章 = 그 숫컷을 알고 그 암컷을 지킴으로써 천하가(만물이 흐르는) 시내가 된다 시내라 하는 것은 늘상 덕이 존재하여 떠나지 않으니 거듭 어린 아기에 돌아간다 그 흰 것은 알고 그 검은 것을 지킴으로써 천하의 방책이 된다 천하의 방책은 떳떳한 덕이 존재하여 어긋나지 않음을 뜻하니 거듭 없음이 다한경계(無極)에 돌아간다 그영화를 알고 그욕됨을 지킴으로써 천하가 골짜기가 된다 천하가 골짜기가 되면 떳떳한 덕이 이에 유족 하게 됨이라 거듭 순박함에 돌아간다 순박함이 그릇이 된다 성인이 사용하시니 곳 벼슬의 어른(官長)이 되는지라 크게 제압할려 해도(*譯者附言=어떤 것으로 든)배어 넘기지 못한다.
5.(篆)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남자를 위하여 화장을 한다.
6.(篆)一默
秋史는 不二禪蘭圖에서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若有 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
「난 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우연히 하늘의 본성을 그렸네. 마음속의 자연을 문을 닫고 생각해 보니, 이것이 바로 摩詰의 不二禪이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毘耶離城에 있던 유마힐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답하겠다」
이 뜻은 『유마경』의 「불이법문품」에 있는 내용인데, 모든 보살이 선열에 들어가는 상황을 굳이 설명하는데 최후에 유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모든 보살들은 말과 글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추사가 이 불이선으로 난을 설명한 것은 지면에다 난을 그리는 것보다는 마음속에 그리는 것이 진정한 난을 그리는 예술의 경지라는 뜻이 될 것이다.
화면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려 쓴 화제이다.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謳竟 又題”
(초서와 예서, 奇異한 글자를 쓰는 법으로써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이 또 쓰다)
초서, 예서, 그리고 흔히 쓰이지 않는 괴벽한 글자[僻字]를 쓰는 법으로 난을 그렸으니 보통 사람들이 그 뜻을 어찌 알고 좋아하며 즐길 수 있겠는가를 묻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해 버리고 만다.
화면 왼쪽 아래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내려 쓴 화제가 있다.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처음에는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다만 하나가 있을 뿐이지 둘은 있을 수 없다. 선객노인)
이 화제는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를 말하고, 하늘의 본성을 사출해 낸 득의 작은 하나가 있을 뿐이지 둘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只可有一 不可有二’를 난 그림은 하나이면 족하지 두 번 그릴 일이 아니다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앞의 화제의 내용에 나오는 유마의 불이선과 관련지어 해석할 수도 있다.
佛家에서 ‘不二’를 말할 때 ‘불이’는 즉 ‘一’로써 法性 또는 眞如를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불이’는 두 개가 대립하고 있으면서도 조화를 깨뜨리지 않고 있으며, 그 조화 속에서도 대립의 양상은 없어지지 않는 절대 평등, 절대 조화의 개념이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화제가 있다.
“吳小山見而 豪奪可笑”
(오소산이 이 그림을 보고 얼른 빼앗아 가려 하는 것을 보니 우습도다.)
그림의 본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림만 탐내어 가져가려는 미련함에 웃음을 짓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림의 깊은 뜻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본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꼴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할 바엔 소산 스스로가 그 뜻을 터득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럴 것 같지도 않으면서 그림만 탐내어 빼앗아 가려고 하니 가소롭다는 것이다.
鐘聲法文 중에서
淸話濃時尺還短 / 맑은 이야기 아무리 길어도 짧고
坐禪倦時寸猶長 / 좌선이 실증나면 아무리 짧은 설문도 오히려 길다.
萬言萬當不如一默 / 만마디 말 아무리 옳아도 침묵만 못하고
百戰百勝不如一忍 /백번 싸워 백번 이기더라도 참는 것만 못하네.
一默如雷. 隱樵 鄭命壽 선생 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