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靜漠恬淡

solpee 2014. 6. 25. 21:11

靜漠恬淡jìng mò tián dàn

고요하고 산뜻한 모양. 속으로 정성을 간직하고 신성을 깃들게 하여 사기가 머물 곳이 없음.

 

謝靈運
江南倦曆覽,江北曠周旋。〔《長門賦》曰:貫曆覽其中操,周旋,已見上文。〕懷雜道轉迥,尋異景不延。〔《爾雅》曰:迥,遠也。又曰:延,長也。〕亂流趨正絕,孤嶼媚中川。〔《爾雅》曰:水正絕流曰亂。劉淵林《吳都賦》注曰:嶼,海中洲,上有山石。〕雲日相輝映,空水共澄鮮。表靈物莫賞,蘊真誰爲傳。〔鄭玄《禮記注》曰:表明也,謂顯明之也。馬融《論語注》曰:蘊,藏也。《說文》曰:真,仙人變形也。〕想像昆山姿,緬邈區中緣。〔《楚辭》曰:思舊故而想像。《列仙傳》曰:西王母,神人名。王母在昆侖山。司馬相如《大人賦》曰:迫區中之隘陝。〕始信安期術,得盡養生年。〔《列仙傳》曰:安期生,琅邪阜鄉人,自言千歲。《文子》曰:靜漠恬淡,所以養生也。《莊子·養生篇》曰:可以盡年。郭象曰:養生非求過分,蓋全理盡年而已。〕

 

亦作“静莫”。亦作“静寞”。 恬静淡漠;寂静冷漠。文子·守静》:“ 老子 曰:‘静漠恬淡,所以养生也。’”淮南子·泰族训》:“今夫道者,藏精於内,栖神於心,静莫恬淡,讼繆胸中。” 殷夫 《月夜闻鸡声》:“哟,友人,静寞的月夜不给你桃色的梦。”

 

竹头木屑[ zhú tóu mù xiè ]

대나무 끄트러기 나무 부스러기 같은 하찮은 폐물; 하찮은 폐물 이용할 정도 살림살이 알뜰살뜰하다.

 

晉나라 초, 파양(지금의 강서성 파양현)이라는 곳에 陶侃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명한 陶淵明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그는 군주에 대한 일관된 충성심으로 長沙郡公에 봉해졌으나, 그의 생활은 오히려 검소했다.

도간은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모친의 손에서 성장하였다.
도간이 젊었을 때 그곳의 관리는 도간에게 물고기를 기르는 연못의 관리를 맡겼다.

어느 날, 그는 절인 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의 어머니는 고기를 먹지않고 그를 꾸짖었다.
"네가 공공기관의 소유물을 나에게 가져오다니, 나의 마음이 매우 슬프구나."

훗날, 도간은 光州刺使를 지내게 되었다.
그는 공무가 없어도 한가롭게 놀지 않았다.


매일 아침 일백 개의 벽돌을 서재의 밖에 옮겨 놓았다가, 저녁에는 다시 서재로 가지고 들어 왔다.
매일 반복되는 이 일의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도간에게 물었다.
도간은 대답하였다.

 
"마당히 中原을 수복해야 하는데, 어찌 편안하게 놀 수만 있겠는가?"
당시 진나라는 중원의 영토를 빼앗기고 江南으로 물러나 있던 터였으므로, 도간의 이러한 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간은 무엇을 하든지 항상 절약하였다.

한번은, 그는 배를 만드는 일을 관리하게 되었는데, 배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대나무 뿌리와 톱밥 등이 남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배를 만드는데 아무 쓸모가 없는 페물이었다.
도간은 사람들에게 이것들을 전부 모아 기록해 놓도록 지시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時造船,木硝及竹頭,悉令擧掌之,咸不解所以].

어느 해, 새해 모임이 있던 날, 눈이 내린 후 날씨가 개이자, 관청의 박은 온통 진흙탕이 되었다.

 
도간은 즉시 톱밥을 꺼내 길위에 뿌렸다.
하찮은 물건이 큰 작용을 했던 것이다.
도간은 이후에도 남은 資材들을 모아서 급한 소용을 해결하였다.

요즈음 쓸만한 물건들이 자주 버려지고, 아파트 내부 개조를 위해 멀쩡한 시설물을 떼어 버리는 일이 잦다.

 
싫증이 났거나 구식이면 싸구려가 되기 때문이란다.
실로 통탄할 일이다.

우리 조상들은 "죽두목설"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대나무 조각과 나무 부스러기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사람, 부정과 불의에 타합하지 않고 지조를 굳게 지키는 대쪽같은 사람들이 많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出处】:《晋书·陶侃传》:“时造船,木屑及竹头,悉令举掌之,咸不解所以。”
【示例】:时节相存问,缓急相周致,虽~亦有以应吾之须者,笃吾妹之分义于我也。 ◎宋·陈亮《祭妹夫周英伯》

【故事】陶侃,字士行,东晋鄱阳人,后来迁居庐江浔阳,是晋末著名文学家陶渊明的曾祖父。由于他为西晋统治者“一贯尽忠”,从县吏一直做到荆、江二州刺史,并掌管其他六州军事,成为当时最有实力的人物。但他戎马生涯四十余年,却始终保持着勤俭节约的作风,还经常勉励部下珍惜一草一木,为国为民多做贡献。
  陶侃少时家境贫寒,父亲病后,全家只靠母亲一人纺线织布维持生活。为了培养他,母亲付出了全部的心血。他十六岁时,在县里谋到一个小吏的职位,负责管理鱼池。刚上任不久,他就给母亲弄回去一坛腌鱼,这是当时人们喜欢吃的东西。但他母亲很生气,把腌鱼封存不吃,并且责备他说:“你拿公家的东西送我,不但不能使我高兴,反而让我替你难过!”母亲的话使陶侃十分羞愧,从那以后再也没有拿过公家的东西。
  有一年,在荆州刺史的任上,因战备需要造一批战船,陶侃常去现场视察督导,发现大量的剩竹头和木屑扔得到处都是,觉得很可惜。这些东西本来都算是废物了,陶侃却叫人全部登记收藏起来。别人见他这样做,心中都暗自好笑。后来,一次新春集会,恰逢雪后初晴,厅前泥泞难走,陶侃便叫人把木屑拿出来铺在地上。这时,微不足道的木屑发挥了作用。
  有一次,东晋大将桓温要去讨伐蜀地,事先需要赶造不少船只,船板锯好了,但缺少竹钉,没法把船身装起来,陶侃便叫人把藏着的竹头取出来送给桓温,削成竹钉,船便装起来了。陶侃不但提倡节俭,而且非常反感那些毫不珍惜财物的人。一次,他去郊区,看见一个人拿着一把没有成熟的青稻穗,就问他为什么这样,那人说没什么,随手采的。陶侃很生气,训斥道:“你自己不种庄稼,还去糟蹋别人的!”当即把那个人抓起来教训了一通。
  公元315年,陶侃率兵击败杜弢的反晋武装,又攻克长沙,声威很大,权臣王敦因猜忌他,解除了他的兵权,陶侃被贬为广州刺史。因为公务少,陶侃一下子成了无事可做的闲人。但他并没有放纵自己,每天早晨把一百块砖搬到书房外面,晚上又搬进书房,天天来回地搬进搬出,常常累得满头大汗,谁也不知道他是什么用意。有人不解,甚至笑他,他却正色道,“我正当壮年,总有一天要平定中原,报效国家,生活悠闲不但会变懒,还会败坏身体,以后如何担当重任?”人们听了不禁肃然起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