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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勤寂

solpee 2014. 6. 22. 08:53

慧勤寂

 

爲學三要

 

승려 草衣는 다산이 특별히 아꼈던 제자다.

다산은 처음에 그의 적극적이지 않은 태도가 성에 차지 않았던 듯 수십 항목으로 적어준 증언에서 진취적인 학습 자세를 반복하여 강조했다.이들 증언은 다산의 문집에는 모두 빠졌고,申櫶(1810~1884)이 초의에게 들렀다가 다산이 그에게 써준 贈言을 보고 베껴 둔 '琴堂記珠'란 기록 속에 남아 전한다.

 

다음은 그중 학문의 바탕을 갖추기 위해 지녀야 할 덕목을 말한 한 대목이다.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세 가지를 갖추어야만 성취함이 있다.

 

지혜롭지 않으면 굳센 것을 뚫지 못한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힘을 쌓을 수가 없다. 요하지 않으면 오로지 정밀하게 하지 못한다. 이 세 가지가 학문을 하는 요체다.”

 

學者必具慧勤寂三者, 乃有成就.

不慧則無以鑽堅; 不勤則無以積力; 不寂則無以顓精.

此三者, 爲學之要也.

 

爲學三要,

즉 학문에 필요한 세 가지 핵심 덕목으로 ··을 꼽았다.

굳이 불가의 표현을 쓴 것은 초의의 신분이 승려임을 배려해서다.

 

첫 번째 덕목은 지혜다. 지혜로 鑽堅, 즉 나를 가로막는 굳센 장벽을 뚫어야 한다.

 

두 번째는 근면이다. 밥 먹고 숨 쉬듯 기복 없는 노력이 보태져야 積力, 곧 힘이 비축된다.

 

세 번째로 꼽은 것은 뜻밖에 이다. 공부에는 고요와 침묵으로 함축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顓精, 精粹精華를 내 안에 깃들이려면 외부의 번화로부터 나를 차단하는 寂默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지혜로 속도를 내고 근면으로 기초 체력을 다져도 침묵 속에 방향을 가다듬지 않으면 노력이 헛되고 슬기가 보람 없다.

 

방향을 잃은 지혜, 목표를 놓친 노력은 뼈에 새겨지지 않고 오히려 이 된다.제 재주를 못 이겨 발등을 찍고 제 노력만 믿고 남을 우습게 보는 교만을 심는다.

 

을 가늠자 삼아 자칫 무너지기 쉬운 균형을 끊임없이 바로잡아야 한다고

일깨워 준 것이 절실하다.   

 

 *鑽 끌 찬.  堅 굳을 견 * 전달할 전. 粹 순수할 수. 寂 고요할 적. 默 잠잠할 묵. 毒 독 독.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 2014.06.18 05:41

 

[출전] 《申櫶琴堂記珠

 

[내용] 茶山 丁若鏞草衣선사는 사제간이다. 다산시문집에는 다산이 초의에게 준 5항목으로 된 爲草衣僧意洵贈言이란 글이 실려 있다. 그 외에 문집에 실린 초의에게 준 글은 서울로 돌아온 후인 1830년에 지은 시가 한 수 있을 뿐이다. 다산초당에서 초의와 나눈 교감에 견주어 남은 글이 너무 빈약하다. 한편 초의의 문집에는 다산에 관련된 시 몇 수와 편지 한 통이 실려 있다. 놀랍게도 申櫶琴堂記珠에 초의에게 준 다산의 글이 무더기로 실려 있다.

 

다산은 초의에게 다음과 같이 학문에 대한 경계의 말을 전한다.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세 가지를 갖추어야만 성취함이 있다. 지혜롭지 않으면 굳센 것을 뚫지 못한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힘을 쌓을 수가 없다. 고요하지 않으면 오로지 정밀하게 하지 못한다. 이 세 가지가 학문을 하는 요체다.”

(學者必具慧勤寂三者, 乃有成就. 不慧則無以鑽堅; 不勤則無以積力; 不寂則無以顓精. 此三者, 爲學之要也.)

 

爲學三要을 설정하고, 다시 鑽堅積力顓精의 단계를 제시했다. 지혜로 난관을 돌파하고, 근면으로 힘을 축적하며, 침묵으로 정밀함을 더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불가적 표현을 써서 초의에 대한 배려를 담았다. 구체적 공부의 장면은 이렇다.

 

주역에서는 아름다운 바탕을 간직하여 곧게 하되 때로 발휘한다.’고 했다. 산사람이 꽃 심는 일을 하다가 매번 꽃봉오리가 처음 맺힌 것을 보면 머금어 이를 기르는데, 아주 비밀스레 단단히 봉하고 있다. 이를 일러 含章 즉 아름다운 바탕을 간직한다고 한다. 식견이 얕고 공부가 부족한 사람이 겨우 몇 구절의 새로운 뜻을 익히고는 문득 말로 펼치려 드는 것은 어찌된 것인가?

(易曰: “含章可貞, 以時發也.” 山人業種花, 每見菩蕾始結, 含之蓄之, 封緘至密. 此之謂含章也. 淺識末學, 纔通數句新義, 便思吐發, 何哉.)

 

禮記

第十八 學記


성경재연구회 역


發慮憲 求善良 足以謏聞 不足以動衆. 就賢體遠 足以動衆 未足以化民. 君子 如欲化民成俗 其必由學乎.

사려 깊은 법도를 마련하고 어진 선비를 찾아 등용하면, 명성을 드높일 수는 있으나, 백성의 마음은 움직이지 못한다. 가까이 있는 신하의 말을 따르고 멀리 있는 신하의 마음을 헤아리면 백성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나, 백성을 교화하지는 못한다. 임금이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 세우는 길은 학문과 교육에 있다.


玉不琢 不成器. 人不學 不知道. 是故古之王者 建國君民 敎學爲先. 兌命曰 念終始典于學 其此之謂乎.

옥은 다음어지지 않으면 보배가 될 수 없으며,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 수 없다. 옛날 성왕은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릴 때 학문과 교육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兌命에서 “생각은 시종일관 배운 것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雖有嘉肴 弗食 不知其旨也. 雖有至道 弗學 不知其善也. 是故學然後知不足 敎然後知困. 知不足 然後能自反也. 知困 然後能自强也. 故曰 敎學相長也. 兌命曰 學學半 其此之謂乎.

아무리 좋은 음식도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 수 없으며 아무리 지극한 도도 배우지 않고는 그 훌륭함을 알 수 없다. 배운 뒤에야 아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가르쳐본 뒤에야 아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족함을 안 뒤에야 스스로 반성할 수 있으며 어려움을 안 뒤에야 스스로 분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서로가 자라는 일(성장)이다. 兌命에서 “가르치는 일의 반은 배우는 일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術有序 國有學.

옛날의 교육제도를 살펴보면 家(25家)에 ‘塾’이 있고, 黨(500家)에 ‘庠’이 있고, 州(12,500家)에 ‘序’가 있고, 國에 ‘學’이 있다. ‘學’에서는 매년 신입생을 받아들이고 2년마다 학업의 진전 정도를 시험한다.


比年入學 中年考校 一年視離經辨志 三年視敬業樂羣 五年視博習親師 七年視論學取友 謂之小成. 九年知類通達 强立而不反 謂之大成. 夫然後足以化民易俗 近者說服而遠者懷之. 此大學之道也. 記曰 蛾子時術之 其此之謂乎.

입학한 첫해에는 經書를 독송하고 그 뜻을 말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며, 셋째 해에는 학문을 공경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지를 시험하며, 다섯째 해에는 공부를 폭넓게 하고 스승을 가까이 하는지를 시험하며, 일곱째 해에는 학문의 깊은 뜻을 논의하고 좋은 친구를 골라 사귀는지를 시험한다. 여기까지가 ‘小成’의 과정이다. 아홉째 해에는 여러 분야의 이치를 통달하고 뜻을 세움이 굳건하여 흔들림이 없는지를 시험한다. 이것이 ‘大成’의 단계이다. 대성을 이루면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 잡는 일에 부족함이 없게 되며, 가까이 있는 사람은 기꺼이 복종하고 멀리 있는 사람은 그 덕을 사모한다. 이 과정이 대학의 길이다. 記에서 “어린 새끼는 흙을 물어 나르는 방법을 쉬지 않고 연습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大學始敎 皮弁祭菜 示敬道也. 宵雅肄三 官其始也 入學鼓篋 孫其業也. 夏楚二物 收其威也. 未卜禘 不視學 游其志也. 時觀而弗語 存其心也. 幼者聽而弗問 學不躐等也. 此七者 敎之大倫也. 記曰 凡學官先事 士先志 其此之謂乎.

대학에서 수업을 시작할 때 선생이 朝服 차림으로 聖人에게 나물을 올려 제사하는 것은 道에 대한 공경심을 보이기 위함이다. 詩經의 小雅 세 편을 익혀 노래하는 것은 공부가 개인의 사사로운 일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등교하면 북을 울리고 그 소리에 맞추어 상자에서 책을 꺼내게 하는 것은 책과 공부에 대하여 겸손한 태도를 가지게 하기 위함이다. 개오동나무 회초리와 싸리나무 회초리를 준비하는 것은 학문의 권위가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다. 천자가 다음 체제 날짜를 점칠 때까지 대학을 시찰하지 않는 것은 마음 놓고 공부하게 하기 위함이다. 학생들을 끊임없이 살피되 그들과 더불어 말하지 않는 것은 마음 놓고 공부하게 하기 위함이다. 어린 학생에게는 강의를 듣게 할 뿐 질문을 못하게 하는 것은 배우는 데에는 순서가 있어 건너 뛸 수 없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이 일곱 가지는 대학교육의 근본 원리이다. 記에서 “배운다는 것은 공적으로는 일을 익히고 개인적으로는 마음을 닦는다는 것이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大學之敎也 時敎必有正業 退息必有居學.

대학교육은 학교에서의 계절별 정규 교과의 학습과 그것들을 일상생활 속에서 닦고 익히는 집에서의 학습으로 이루어진다.


不學操縵 不能安弦 不學博依 不能安詩 不學雜服 不能安禮 不興其藝 不能樂學.

일상생활에서 때때로 현을 퉁겨 보지 않고는 그것을 즐기는 데까지 이를 수 없으며, 시에 표현된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을 가져보지 않고는 시를 즐기는 데까지는 이를 수 없으며, 온갖 雜服을 경우에 맞게 입어보지 않고는 예를 즐기는 데까지 이를 수 없다. 무엇을 배우든지 그것을 몸에 익숙할 정도로 직접 해 보지 않고는 배움의 즐거움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故君子之於學也 藏焉 修焉 息焉 遊焉. 夫然故 安其學而親其師 樂其友而信其道 是以雖離師輔而不反也. 兌命曰 敬孫務時敏 厥修乃來 其此之謂乎.

군자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첫째로 세상의 번잡한 일에서 떠나야 하며, 둘째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야 하며, 셋째로 혼자의 힘으로 정신을 집중하여 사색을 하여야 하며, 넷째로 동학하는 벗들과 항상 학문의 기쁨을 나누어야 한다. 이런 자세로 학문을 하는 사람은 배우기를 즐기고 스승을 따르며,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고 도를 믿으며, 스승이나 친구의 곁을 떠나더라도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한다. 兌命에서 “스승을 공경하는 마음과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꾸준히 학문에 힘쓰면 틀림없이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今之敎者 呻其佔畢 多其訊言 及于數進 而不顧其安 使人不由其誠 敎人不盡其材 其施之也悖 其求之也佛. 夫然 故隱其學而疾其師 苦其難而不知其益也. 雖終其業 其去之必速 敎之不刑 其此之由乎.

오늘날의 교육은 주어진 글귀만 외우게 하고 그 결과를 질문하여 責하며, 횡설수설하며, 진도 나가는 데에만 급급하여 배움의 즐거움을 느낄 여유를 주지 못한다. 사람이 남을 부리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성을 다하게 하지 못하듯이, 스승은 남을 가르치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재능을 다하도록 하지 못한다. 스승은 道에 어긋난 것을 가르치고 학생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학생은 공부를 싫어하고 스승을 멀리하며 공부의 어려움에 시달릴 뿐 그 좋은 점을 깨닫지 못한다. 비록 학업을 마친다고 하더라도 그 학생은 배운 것을 곧 잊어버리고 만다. 오늘날 가르침이 바로 서지 않는 것은 교육이 이와 같은 형편에 있기 때문이다.


大學之法 禁於未發之謂豫. 當其可之謂時. 不陵節而施之謂孫. 相觀而善之謂摩. 此四者 敎之所由興也.

大學 교육의 실제적 원리에는 ‘豫’, ‘時’, ‘孫’, ‘摩’의 네 가지가 있다. ‘豫’라는 것은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막는 것이다. ‘時’라는 것은 학생이 배울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가르치는 것이다. ‘孫’이라는 것은 학생에게 전달해야 할 내용을 건너뛰지 않고 차근차근 전달하는 것이다. ‘摩’라는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서로 복돋우고 견주면서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이 네 가지는 가르침을 흥하게 하는 근본 원칙이다.    


發然後禁 則扞格而不勝. 時過然後學 則勤苦而難成 雜施而不孫 則壞亂而不修. 獨學而無友 則孤陋而寡聞. 燕朋逆其師 燕辟廢其學. 此六者 敎之所由廢也.

사태가 잘못되고 나면 있는 힘을 다하여 막아도 걷잡을 수 없이 된다. 배울 때를 지나 배우도록 하면 학생이 아무리 힘들여 노력하더라도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루기 어렵다. 이것저것 되는 대로 전달하여 거기에 순서가 없으면 학습의 단계가 무너져 혼란이 생기고 학생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학생이 혼자서만 공부하여 서로 견주어 볼 기회를 가지지 못하면 자신의 좁은 견해에 머물러 지식이 넓어지지 못한다. 이 네 가지에, 친구와 어울려 흥청거리면서 스승의 뜻을 거스르는 것과 나쁜 놀음에 빠져 공부를 젖혀 두는 것을 합한 여섯 가지는 가르침을 폐하게 하는 근본 원인이다.


君子旣知敎之所由興 又知敎之所由廢 然後可以爲人師也. 故君子之敎喩也 道而弗牽 强而弗抑 開而弗達. 道而弗牽則和 强而弗抑則易 開而弗達則思. 和易以思 可謂善喩矣.

君子는 가르침을 흥하게 하는 원칙이 무엇이며 가르침을 폐하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군자의 가르치는 방법은 학생을 올바른 길로 이끌되 강제로 끌어당기지 않으며, 세게 다그치되 짓눌리지 않게 하며, 문을 열어 주되 끝까지 데리고 가지 않는다. 이끌되 끌어당기지 않으니 부딪침이 없고, 다그치되 짓누르지 않으니 어려움이 없고, 열어주되 끝까지 데리고 가지 않으니 스스로 사고하지 않을 수 없다. 부딪침이 없이 조화롭고, 어려움이 없이 용이하며, 스스로 사고하도록 이끄는 것, 이것이야말로 잘 가르치는 모습이다.


學者有四失 敎者必知之. 人之學也 或失則多. 或失則寡 或失則易 或失則止. 此四者 心之莫同也. 知其心 然後能救其失也. 敎也者 長善而救其失者也.
배우는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에는 네 가지가 있다. 가르치는 사람은 각각에 관하여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람들이 배우는 것을 보면 어떤 사람은 아는 것이 너무 많은 데서 잘못을 저지르고 어떤 사람은 너무 적은 데서 잘못을 저지른다. 또 어떤 사람은 공부를 너무 쉽게 생각하여 배움을 그르치고 어떤 사람은 도중에서 배움을 그만두어 버린다. 이 네 가지의 잘못은 배우는 사람의 마음이 제각기 다른 데서 생기는 것이니 만큼, 그 각각의 마음을 잘 알아야 그 잘못을 고칠 수 있다. 가르친다는 것은 잘하는 것을 더욱 잘 하도록 도와주며 잘못하는 것은 바로 잡아 주는 일이어야 한다.


善歌者 使人繼其聲 善敎者 使人繼其志. 其言也 約而達 微而臧 罕訾而喩 可謂繼志矣.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노래를 이어 나가게 만들며, 훌륭한 교사는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그 뜻을 이어 나가게 만든다. 그의 설명은 간결하지만 그 뜻은 넓고 풍부하며, 평범한 말 속에 깊은 뜻을 감추고 있으며, 이것저것 끌어대지 않으면서도 깨우쳐 주는 바가 있다. 이런 교사야말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뜻을 이어 나가도록 만든다.


君子知至學之難易 而知其美惡 然後能博喩. 能博喩 然後能爲師. 能爲師 然後能爲長. 能爲長 然後能爲君. 故師也者 所以學爲君也. 是故擇師不可不愼也. 記曰 三王四代唯其師 此之謂乎.

군자는 사람에 따라서 학문에 쉽게 이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렵게 이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아야 비로소 배우는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든 그것에 맞추어 가르칠 수 있으며, 이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어야 비로소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될 만한 사람이어야 한 나라의 임금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승이 된다는 것은 곧 임금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스승을 모시는 일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記에서 ‘三王 四代가 그렇게 빛난 것은 오직 훌륭한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凡學之道 嚴師爲難. 師嚴然後道尊. 道尊 然後民知敬學. 是故君之所不臣於其臣者二. 當其爲尸 則弗臣也 當其爲師 則弗臣也. 大學之禮 雖詔於天子 無北面 所以尊師也.

학문의 道는 스승이 위엄을 갖추는 일을 어렵게 여기는 데 있다. 스승이 위엄이 있어야 道가 존중되며, 도가 존중되어야 학생이 학문을 공경할 줄 알게 된다. 임금이 그의 신하를 신하로 대하지 않는 경우가 두 가지이니, 尸童으로 모시는 경우와 스승으로 모시는 경우가 그것이다. 大學의 禮에서 스승은 天子를 알현하는 경우에도 北面하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것은 스승에 대한 공경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善學者 師逸而功倍 又從而庸之. 不善學者 師勤而功半 又從而怨之. 善問者如攻堅木 先其易者 後其節目. 及其久也 相說以解 不善問者反此. 善待問者如撞鐘 叩之以小者則小鳴 叩之以大者則大鳴 待其從容 然後盡其聲. 不善答問者反此. 此皆進學之道也.

잘 배우는 사람은 교사가 힘써 노력하지 않아도 두 배의 성과를 얻고, 그것을 교사의 은덕으로 안다. 그러나 잘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교사가 힘써 노력하더라도 절반의 성과 밖에 얻지 못하고, 그것을 교사의 탓으로 돌린다. 질문을 잘 하는 사람은, 마치 단단한 나무를 벨 때 먼저 쉬운 부분부터 시작하여 점차 세부의 어려운 마디로 나아가듯이, 오랜 시간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질문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와는 반대로 한다. 질문에 잘 대답하는 사람은, 마치 鐘을 칠 때 작은 것으로 두드리면 작게 울리고 큰 것으로 두드리면 크게 울리는 것과 같이, 침착하고 조용하게 치면 그 종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그러나 질문에 잘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와는 반대로 한다. 이 모든 것은 학문을 진전시키는 올바른 방도이다.

 

記問之學 不足以爲人師. 必也其聽語乎. 力不能問 然後語之 語之而不知 雖舍之可也.

옛글을 읽고 외우게 하는 것만으로는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기에 부족하다. 스승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학생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는 것이다. 학생이 말을 제대로 못할 때 그 때 비로소 그가 배워야 할 내용을 말해 주며, 배워야 할 내용을 말해 주어도 알지 못하는 학생은 가르침을 포기해도 좋다.


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 始駕馬者反之 車在馬前 君子察於此三者 可以有志於學矣.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가죽옷 만드는 법을 반드시 배우고 훌륭한 궁장장이의 아들은 키 만드는 법을 반드시 배운다. 말을 길들이고 부리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그 말을 수레 뒤편에 매달아 수레 되를 따라 다니게 한다. 君子는 이 세 가지 例를 잘 살펴서 학문의 뜻을 세워야 한다.


古之學者 比物醜類. 鼓無當於五聲 五聲弗得不和. 水無當於五色 五色弗得不章. 學無當於五官 五官弗得不治. 師無當於五服 五服弗得不親.

옛날 사람들이 공부한 것을 보면 사물을 비교하고 유추하여 근본을 찾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북소리는 五聲의 어느 하나에도 해당하지 않지만 五聲이 조화를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되며, 물은 五色의 어느 하나에도 해당하지 않지만 五色이 빛을 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학문은 五官의 어느 하나에도 해당하지 않지만 五官의 일이 올바로 다스려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며, 스승은 五服 宗親의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않지만 친족이 화합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君子曰 大德不官 大道不器 大信不約 大時不齊. 察於此四者 可以有志於本矣. 三王之祭川也 皆先河而後海 或源也 或委也 此之謂務本.

군자가 말하기를 “大德은 특정한 관직에 구애되지 않고 大道는 특정한 기능에 구애되지 않으며, 大信은 특정한 약속에 구애되지 않고 大時는 특정한 규정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배우는 사람은 이 말의 뜻을 잘 살펴서 근본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한다. 三王이 河川에 제사지낼 때 江을 제사지내고 그 다음에 바다를 제사지낸 것은 강이 바다의 근원이고 바다는 강의 발단이기 때문이니, 이것은 곧 근본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