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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4일 오후 08:22

solpee 2014. 4. 24. 20:24

赣水流韵 辉耀千载

 

江西省位于长江中下游南岸,是中国东南大三角的腹地,山川壮美,物华灵秀。其东、西、南三面翠岭环抱,境内章、贡二水汇成赣江,奔腾北泻注入烟波浩渺的鄱阳湖。唐人诗句“襟三江而带五湖,控荆蛮而引瓯越”,点明了江西作为要冲和通道的地理优势。
   江西历史悠久,文化璀璨,是中华文明的重要发源地之一,这里升起了稻作文明的曙光,点燃了人类烧造陶器的火焰,开拓了华夏最早的铜业基地,铸就了中国瓷都景德镇的辉煌。汉晋以降,文化名人灿若群星。陶渊明、欧阳修、王安石、曾巩、黄庭坚、朱熹、文天祥、宋应星、汤显祖、朱耷等历史文化名人及白鹿洞、白鹭洲等书院使江西“人杰地灵”的美誉名副其实

1.山中問答

                                                      李白 

 

問余何事棲碧山/어찌 서벽산에 사느냐고 물으면

笑而不答心自閑/말 없어 그저 웃으니 마음조차 한가롭네!

桃下流水杳然去/복사꽃잎 계곡따라 흘러가는 아스라한 곳

別有天地非人間/여기가 바로 세속을 벗어난 별천지가 아니던가... 

                   

2. 望天門山

                                             李白

                                                                                                                          

天門中斷楚江開/천문산 허리 질러 초강이 흐르니

碧水東流至此廻/푸른 물 동으로 흘러 여기서 구비치네

兩岸靑山相對出/초강 양쪽 푸른 산 마주 우뚝 솟았는데

孤帆一片日邊來/돛을 편 배 한 척 하늘가에서 내려오네 

 

3.万卷(六經)读罢方拈笔,

五岳归来自有诗(不朝自)。

山川出云既霖雨,

日月合壁为文章

 

噬臍(脐)莫及[ shì qí mò jí ] 
☞배꼽을 물려고 해도 입이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니 곧 기회를 잃고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기원전 7세기 말 춘추전국시대 초(楚) 나라 문왕(文王)은 영토를 넓히기 위해 신(申) 나라를 공략키로 했으나 신 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등(鄧) 나라를 지나야만 하는데 이때 등 나라의 왕 기후(祁侯)는 문왕의 삼촌이었다.

   문왕이 병사들을 이끌고 등 나라에 도착하자 기후는 문왕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때 기후의 신하 추생, 담생(聃甥), 양생(養甥)이 기후에게 문왕은 머지않아 우리 등 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지금 없애지 않으면 배꼽을 물려고 해도 입이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늦기 전에 계획을 세우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기후는 조카를 죽이면 후세 사람들이 자신을 욕할 것이라고 하면서 간언을 묵살했다가 결국 10년 후 기후는 조카 문왕에 의해 멸망됐다.

   서제막급은 등 나라 기후의 신하가 기후에게 앞날을 예측하고 간언한 데서 유래하며 일이 끝난 뒤에는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뜻으로 후회하기 전에 현명하게 대처하라는 말이다.

   서제막급의 또 다른 유래는 사람에게 붙잡힌 사향노루가 자신의 배꼽에서 나는 사향 냄새 때문에 붙잡힌 줄로 여겨 자신의 배꼽을 물어뜯었다는 데서 나온 말로 사향노루는 이미 붙잡힌 다음에 배꼽을 물어뜯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줄도 모른 채 배꼽을 물어뜯은 것으로 원말은 서제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BC 8세기에서 BC 3세기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변혁시대를 칭한다.

   춘추시대의 시초는 BC 770년 주(周) 왕조가 뤄양(洛陽)으로 천도한 후로 노(魯) 나라의 연대기 춘추의 최초의 해(BC 722)라고 한다.

   전국시대의 시초는 진(晉)의 유력 귀족인 한(韓), 위(魏), 조(趙) 3씨가 실권을 잡은 해(BC 453) 또는 이 3씨가 정식 제후(諸侯)로 승격한 해(BC 403)이며 BC 221년 진(秦) 나라 시황제(始皇帝)의 통일로 끝이 난다.

   이 시대의 정치는 춘추에서 전국에 걸친 전국시대는 서주시대(西周時代)의 봉건제도(封建制度)가 해체되고 진(秦), 한(漢) 황제 아래에서의 중앙집권 체제가 형성돼가는 과도적 시대이다.

   춘추시대는 서주 이래의 제후국이 100여 개나 존속하고 있어서 전통적 기풍이 강했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강국이 약국을 병합해 진(秦), 초(楚),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의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성립했다.

   각국의 군주는 스스로 왕을 자칭하고 광대한 영역을 통치할 관료기구를 정비했으나 그 중에서도 서방의 진은 적극적인 정치개혁에 의해 부국강병에 힘써 마침내 천하통일에 성공했다.

   사회경제를 보면 이 시대의 정치적 변동은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며 춘추시대 말에는 철제농구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전국시대에는 우경(牛耕)이 시작됐으며 치수관개(治水灌漑) 공사도 각국에서 시행돼 경지면적이 증대했다.

   이렇게 새로 개척된 농지에서의 수확이나 산의 나무, 해변의 소금, 물고기 등 산물에 대한 과세로써 전국시대의 각국 군주는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한편 소금이나 철(鐵)의 생산 판매업자도 거리(巨利)를 취했으며 교환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쟁기 모양을 본뜬 포전(布錢), 소도(小刀)의 형을 이룬 도전(刀錢) 등 청동제 화폐가 유통됐다.

   이런 경제적 발전은 사회조직에도 변화를 가져와 이제까지의 씨족 결합이 무너지고 5인 평균가족이 독립할 수 있는 경제생활을 영위하게 됐으며 그들 중에는 몰락해 노예가 되는 자도 나왔으나 한편으로는 광대한 토지를 취득하고 유력한 호족(豪族)을 중심으로 동족이 결집하는 호족도 나타났다.

   가문의 배경이 없더라도 본인 자신의 재능이나 자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했으며 몰락한 귀족의 자손을 비롯한 상공업자나 농민들도 입신출세하기 위해 군주나 유력 인사에게 접근해 법률, 군사, 외교 등 각자 재질에 따라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자가 속출했다.

   군주나 유력 관료 측에서도 부국강병을 위해 널리 인재를 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타국에서 온 망명자도 등용했다.

   이 시대의 사상은 제자백가(諸子百家) 또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말처럼 이 시대는 중국 사상사상(思想史上) 드물게도 그 활동이 활발했던 시대였다.

   정치, 사회적 변동을 배경으로 해 어떻게 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각자가 자기의 소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발언했기 때문이다.

   공자, 맹자, 순자 등의 유가(儒家)는 효제(孝悌), 인의(仁義), 예(禮)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묵자를 비조로 하는 묵가(墨家)는 가족이나 국가의 경제를 초월한 겸애(兼愛)의 정신을 역설했으며 상앙, 한비(韓非)와 같은 법가(法家)는 법의 일원적 지배, 군주권력의 절대화에 의해 부국강병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한 정치에 기대를 거는 제학파에 대해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개농주의(皆農主義)를 주장하는 농가나 인위적 정치도덕의 폐기를 주창하는 노자, 장자 등의 도가(道家)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활발하던 사상활동도 진, 한 제국의 성립을 전후해 정통사상의 기준이 나타남과 함께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