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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7일 오전 09:47

solpee 2014. 4. 7. 09:47

 

鞠躬盡瘁[ jū gōng jìn cuì ]
몸을 굽혀 힘이 다할때까지 노력한다.

 

출전】제갈량(諸葛亮) : <후출사표(後出師表)>

【고사】

   『이 성어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제갈량(諸葛亮)의 글에서 연유한다. 제갈량(諸葛亮)은 위(魏)나라를 정벌할 때 출진에 앞서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올린 <후출사표(後出師表)>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선제께서는 한을 훔친 역적과는 함께 설 수 없고, 왕업은 천하의 한 모퉁이를 차지한 것에 만족해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 여기시어 신에게 역적을 칠 일을 당부하셨습니다. 선제의 밝으심은 신의 재주를 헤아리시어, 신이 역적을 치는 데에 재주는 모자라고 적은 강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역적을 치지 않으면 도리어 왕업이 망할 것이니 어찌 일어나 치지 않고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이에 그 일을 신에게 맡기시고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그 같은 선제의 명을 받은 뒤로 잠자리에 누워도 편안하지 않고 음식을 먹어도 맛이 달지 아니했습니다. 북으로 위를 치려하면 먼저 남쪽을 평정해야 되겠기에 지난 5월에는 노수를 건넜습니다. 거친 땅 깊숙이 들어가 하루 한 끼를 먹으며 애쓴 것은 신이 자신을 아끼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왕업을 돌아보고, 성도에서 만족해 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여겨, 위태로움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제께서 남기신 뜻을 받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게 좋은 계책이 못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적은 서쪽에서 지쳐 있고 동쪽에서도 오나라에게 힘을 다 쓴 끝입니다. 병법은 적이 수고로운 틈을 타라 했으니 지금이야말로 크게 밀고 나아갈 때입니다. 거기에 관해 삼가 아뢰오면 아래와 같습니다.

 

   고제께서는 그 밝으심이 해나 달과 같고 곁에서 꾀하는 신하는 그 슬기로움이 깊은 못과 같았으나, 험한 데를 지나고 다침을 입으시며 위태로움을 겪으신 뒤에야 비로소 평안하게 되시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폐하께서는 고제에 미치지 못하시고 곁에서 꾀하는 신하도 장량(張良)이나 진평(陳平)만 못 하시면서도 장기적인 계책으로 이기고자 하시며 편히 앉으신 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십니다. 이는 바로 신이 이해하지 못할 첫 번째 일입니다.

 

   유요(劉繇)와 왕랑(王朗)은 모두 일찍이 큰 고을을 차지하여, 평안함을 의논하고 계책을 말할 때는 걸핏하면 성인을 끌어들였으되, 걱정은 뱃속에 가득하고 이런저런 논의는 그 가슴만 꽉 메게 하였을 뿐입니다. 올해도 싸우지 아니하고 이듬해도 싸우러 가기를 망설이다가 마침내는 손권에게 자리에 앉은 채로 강동을 차지하게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신이 풀지 못한 두 번째 일입니다.

 

   조조(曹操)는 지모와 계책이 남달리 뛰어나고 군사를 부림에는 손자(孫子)ㆍ오자(吳子)를 닮았으나, 남양에서 곤궁에 빠지고 오소에서 험한 꼴을 당하며, 기련에서 위태로움을 겪고, 여양(黎陽)에서 쫓기고, 북산에서 지고, 동관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뒤에야 겨우 한때의 평정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신하들이 재주도 없으면서 위태로움을 겪지 않고 천하를 평정하려 하니 그게 신이 알지 못할 세 번째 일입니다.

 

   조조는 다섯 번 창패(昌覇)를 공격했으나 떨어뜨리지 못했고, 네 번 소호를 건넜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복을 써보았으나 이복이 오히려 죽이려 들었고, 하후(夏侯)에게 맡겼으나 하후(夏侯)는 패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선제께서는 매양 조조(曹操)가 능력 있다고 추키셨으나 오히려 그 같은 실패가 있었는데 하물며 신같이 무디고 재주 없는 사람이 어떻게 반드시 이기기만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신이 알 수 없는 네 번째 일입니다.

 

   신이 한중에 온 지 아직 한 해가 다 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운(趙雲)ㆍ양군(陽群)ㆍ마옥(馬玉)ㆍ염지(閻芝)ㆍ정립(丁立)ㆍ백수(白壽)ㆍ유합(劉郃)ㆍ동등(鄧銅)과 그 아랫 장수 일흔 남짓을 잃었습니다. 언제나 맨 앞장이던 빈수(賓叟)ㆍ청강(靑羌)이며 산기(散騎)ㆍ무기(武騎)를 잃은 것도 천 명이 넘는바 이는 모두 수십 년 동안 여러 지방에서 모아들인 인재요 한 고을에서 얻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만약 다시 몇 년이 지난다면 이들 셋 중 둘은 줄어들 것이니 그때는 어떻게 적을 도모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알 수 없는 다섯 번째 입니다.

 

   지금 백성들은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습니다. 그러나 할 일을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 할 일을 그만둘 수 없음은 곧 멈추어 있으나 움직여 나아가나 수고로움과 물자가 드는 것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일찍 적을 도모함만 못합니다. 그런데도 한 고을의 땅에 의지해 적과 긴 싸움을 하려 하시니 이는 신이 알 수 없는 여섯 번째 일입니다.

 

   무릇 함부로 잘라 말할 수 없는 게 세상일입니다. 지난날 선제께서 초 땅에서 조조와의 싸움에 지셨을 때 조조는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천하는 이미 평정되었다 했습니다. 그러나 뒤에 선제께서는 동으로 오월(吳越)과 손을 잡고 서로는 파촉(巴蜀)을 얻으신 뒤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가시어 마침내는 하후연(夏候淵)을 목 베게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조조가 계책을 잘못 세워 우리 한이 설 수 있게 해준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되 뒤에 오가 맹약을 어기매 관우는 싸움에 져서 죽고 선제께서는 자귀에서 일을 그르치시어 조비(曹丕)는 다시 천자를 참칭할 수 있었습니다.

 

   무릇 일이 이와 같아 미리 헤아려 살피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신은 다만 엎드려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애쓸 뿐(鞠躬盡瘁 死而後已), 그 이루고 못 이룸, 이롭고 해로움에 대해서는 신의 총명이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여기서 유래하여 국궁진췌(躬盡瘁)는 마음과 몸을 다하여 나라 일에 이바지함을 뜻하게 되었다.』 

 

後出師表/諸葛孔明

  先帝慮漢賊이 不兩立하고 王業이 不偏安이라 故로 託臣以討賊也하시니 以先帝之明으로 量臣之才하사대 固知臣伐賊이 才弱敵彊也라 然이나 不伐賊이면 王業亦亡이니 惟坐而待亡으론 孰與伐之오 是故託臣而不疑也시니이다 臣이 受命之日에 寢不安席하며 食不甘味하야 思惟北征에 宜先入南일새 故로 五月渡濾하야 深入不毛하야 幷日而食하니 臣이 非不自惜也언마난 顧王業이 不可得偏安於蜀都라 故로 冒危難以奉先帝之遺意어늘 而議者謂爲非計러니 今賊이 適疲於西하고 又務於東하니 兵法에 乘勞라하니 此난 進趨之時也라 謹陳其事如左하니이다 高帝난 明並日月하시고 謀臣이 淵深이나 然이나 涉險被創하야 危然後安하니 今陛下未及高帝하시고 謀臣이 不如良平이어늘 而欲以長策取勝하야 坐定天下하니 此난 臣之未解一也오 劉繇王朗이 各據州郡하야 論安言計에 動引聖人하되 羣疑滿腹하고 衆難이 塞胸하야 今歲不戰하고 明年不征이다가 使孫策으로 坐大遂幷江東하니 此난 臣之未解二也오 曹操之計 殊絶於人하야 其用兵也 髣髴孫吳나 然이나 困於南陽하고 險於烏巢하고 危於祁連하고 偪於黎陽하고 幾敗北山하고 殆死潼關하야 然後에 僞定一時爾어늘 况臣이 才弱而欲以不危而定之하니 此난 臣之未解三也오 曹操 五攻昌覇不下하고 四越巢湖不成하고 任用李服而李服이 圖之하고 委任夏侯而夏侯 敗亡하니 先帝 每稱操爲能하사데 猶有此失이온 况臣駑下하니 何能必勝이리오 此난 臣之未解四也오 自臣到漢中으로 中間朞年耳로데 然이나 喪趙雲, 陽羣, 馬玉, 閻芝, 丁立, 白壽, 劉郃, 鄧銅等과 及曲長屯將七十餘人과 突將無前, 賨叟, 靑羌, 散騎, 武騎 一千人하니 此皆數十年之內의 所糾合四方之精銳오 非一州之所有라 若復數年이면 則損三分之二也리니 當何以圖敵고 此난 臣之未解五也오 今民窮兵疲라도 而事不可息이니 事不可息이면 則住與行이 勞費正等이어늘 而不及蚤圖之하고 欲以一州之地로 與賊持久하니 此난 臣之未解六也라 難平者난 事也니 昔에 先帝 敗軍於楚하시니 當此時하야 曹操拊手하야 謂天下已定이러니 然後에 先帝 東連吳越하고 西取巴蜀하야 擧兵北征에 夏候授首하니 此操之失計오 而漢事將成也러니 然後에 吳更違盟하야 關羽毁敗하고 秭歸蹉跌하며 曹丕稱帝하니 凡事如是하야 難可逆見이라 臣이 鞠䩑盡瘁하야 死而後已어니와 至於成敗利鈍은 非臣之明의 所能逆覩也로소이다.

 

揚湯(扬汤)止沸 [ yáng tāng zhǐ fèi ]

【意義】끓는 물을 퍼냈다가 다시 부어 끓는 것을 막다라는 뜻으로 根本적으로 問題를 解決하지는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出典】 三國志 권21 魏書 劉이傳.
上何進書.

【解義】삼국 시대, 南陽 安衆(지금의 하남 진평현)에 유이[자는 恭嗣]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형인 형주자사 劉表가 죽은 후, 曹操에게 귀순하여 그들의 후한 대우를 받았다.

당시, 曹操 휘하의 魏諷이라는 자가 반란을 모의하다 사람에게 고발을 당하였다. 조조는 즉시 위풍을 잡아 처형하였는데, 유이의 동생 劉偉 역시 위풍과 같은 무리였으므로 함께 사형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법률에 따르면, 유이도 동생의 범죄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조는 인재를 아낄 뿐만 아니라, 유이의 사람됨을 잘 알고 그가 동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물이라 판단하였다. 이에 조조가 유이를 무죄로 판결하자, 유이는 이를 감격해 하며, 공손하게 한 통의 서신을 써서 자신을 구하여 준 것에 감사했다.

그의 서신 가운데에는 이러한 대목이 있다.
" .... 저는 滅門의 큰 죄를 지었지만, 주군의 영명하심으로 사면을 받고, 끓는 물을 퍼냈다가 다시 부어 물이 끓는 것을 막듯이 저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해주셨으니[揚湯止沸, 使不焦爛], 감사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주군께서는 저의 실제적인 행동을 보시면 이를 아실 것입니다 .... ."

童卓은 上何進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끓는 물을 퍼 올려 식히는 것은 불을 끄고 장작을 꺼내는 것만 못하다[揚湯止沸 不如去火抽薪]."

펄펄 끓는 물을 식히려면 찬물을 가져다가 부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처리방법이다.
'양탕지비'하고자 한다면 잠간은 끓어오르는 것이 멈추는 듯이 보일지라도 이내 다시 끓고 말것이다.

与其扬汤止沸, 不如釜底抽薪

yǔqí yáng tāng zhǐ fèi, bùrú fǔ dǐ chōu xīn

끓는 물을 퍼냈다 다시 부어 끓는 막기보다는 끄고 장작 꺼내는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