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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事不忘, 後事之師

solpee 2014. 3. 31. 05:48

 

오늘은 陽 甲午年 (陰 甲午年,桓紀9211,神紀5911,檀紀4347,西紀 2014) 陰 戊辰月(三月小) 初1日 辛丑 月曜日 春分(01:57)節 末候 始電[시전: 번개가 잦아진다]候 이자 木蘭(兰:mùlán)風(배나무 꽃 바람)이 부는 候입니다.

 

日出은 06:20, 日入은 18:53, 月出은 06:22, 月入은 19:32 입니다. 오늘 낮은 12시간 33분 34초 입니다.

合朔 03:45시 입니다.

3월의 月份,別稱,異稱은 寎月병월,稧月계월,五陽月오양월,桃李月도리월,甲乙갑을,太嘷태호,句芒구망,桐始華동시화,虹始見홍시견,萍始生평시생,薦鮪천유(다랑어잡이),麥祈實맥기실,大合樂대합락,遊牝于牧유빈우목,嘉月가월, 季春계춘, 姑洗고세, 暮春모춘, 竹秋죽추, 惠風혜풍 , 燕更來연경래, 穀雨곡우, 晩春만춘, 送春송춘, 蠶月잠월, 載陽재춘, 殿春전춘, 辰月진월, 淸明청명, 花月화월, 喜月희월, 嘉桃節가도절, 桃月도월, 芳辰방진, 韶華소화, 艶陽염양, 春和춘화, 夬月쾌월,春暄춘훤, 春和춘화, 春晩춘만, 暄姸훤연, 和風화풍, 花雨화우, 秒春묘춘.

 

【陰曆3月3日】-踏靑節, 上巳, 元巳, 重三,令節,삼짓날

☞.木蘭(兰:mùlán)同義語: yìng春花 (방언) , 望春花 (방언) , 辛夷 , 杜兰 , 木笔

 

前事不忘, 後事之師(师)

이전의 경험(經驗)을 잊지 않으면 이후에 귀감(龜鑑)이 됨을 비유한 말.


【유어】 覆車之戒(복거지계: 앞차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뒤차가 교훈(敎訓)을 얻는 다는 말.
【출전】《전국책(戰國策) 조책(趙策)》

 

【내용】 전국(戰國) 초기, 진(晉)나라 경대부(卿大夫) 지백(智伯)은 한(韓), 조(趙), 위(魏) 등을 이끌고 진나라 경대부 중행씨(中行氏)를 제거한 후, 한, 조 ,위의 세 나라는 영토를 차지하였다. 한나라와 위나라는 지백을 두려워하였으므로, 모두 그에게 영토를 주었으나, 조나라 양자(襄子)는 주려하지 않았다. 이에, 지백은 한나라와 위나라의 군대를 모아 조나라를 공격하였다.

조나라 양자는 대부 장맹담(張孟談)의 계책을 채용하고, 암암리에 한나라와 위나라에 연락하여 조나라가 없어지면 그들에게도 불리할 것이라 말했다. 결국, 한, 위, 조나라의 군대는 비밀리에 연합하여, 지백의 군대를 기습하고 지백을 사로잡았다.

이 전투에서 장맹담은 큰 공을 세웠으나, 조나라 양자에게 사직의 뜻을 밝히고, 그를 위해 일을 하지 않았다. 양자는 이를 이상하다 생각하고 장맹담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장맹담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옛날 어떤 이가 말하길, 춘추 오패(五覇)가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군주(君主)들이 신하를 잘 부렸기 때문이지, 군주가 신하에게 잘 부려졌기 때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신하된 자로서, 명성과 지위가 높으며 권력이 막강하여 따르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 공명(功名)과 권세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조나라 양자는 불쾌하게 말했다.

"내가 듣기에, 국군(국군(國君))을 보좌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명성이 높아지며,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야 고귀하게 되며, 나라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어야 중임(重任)을 맡을 수 있으며, 스스로 충성하여만 사람들이 승복한다고 하였소. 성현(聖賢)들이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하였기 때문이오. 그런데 그대가 관직을 떠나려 하는 까닭은 무엇이오?"

장맹담이 말했다.

"왕께서 말씀하신 것은 성공에 필요한 것들이고,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국가의 정권을 공고히 하는 도리(道理)입니다. 제가 듣기에, 과거 군신(君臣)들이 함께 천하를 쳐서 성공을 쟁취하였던 것은 흔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공을 이룬 후, 군신들의 권력이 평등하여 신하들의 종말이 좋았던 일은 없었습니다. 과거의 일을 잊지 않는다면, 이후의 일도 잘 이루어질 것입니다(事前不忘, 事後之師). 왕께서 저의 사직에 동의하시지 않는다 하셔도, 저에게는 이미 왕의 대업을 도와드릴 능력이 없습니다."

조나라 양자는 그의 말을 듣고 더 이상 그를 붙잡을 없다 생각하고, 그의 사직을 동의하였다.


戰國策18趙傳

張孟談旣固趙宗, 廣封疆, 發五百, 乃稱簡之塗, 以告襄子, 曰: “昔者前國地君之御有之曰: ‘五百之所以致天下者, 約兩:主勢能制臣, 無令臣能制主。 故貴爲列侯者, 不令在相位; 自將軍以上, 不爲近大夫。’ 今臣之名顯而身尊, 權重而衆服, 臣願捐功名, 去權勢以離衆。” 
襄子恨然曰: “何哉? 吾聞輔主者名顯, 功大者身尊, 任國者權重, 信忠在己而衆服焉。 此先聖之所以集國家、安社稷乎! 子何爲然?” 張孟談對曰: “君之所言, 成功之美也; 臣之所謂, 持國之道也。 臣觀成事, 聞往古, 天下之美同, 臣、主之權均, 之能美, 未之有也。 前事之不忘, 後事之師。 君若弗圖, 則臣力不足。” 愴然有決色。

 

前事不忘后事之师qián shì bù wàng,hòu shì zhī shī。

前事不忘后事之师,牢记以前的经验教训,作为今后行事的借鉴。师:借鉴。

 

出处

出自《战国策·赵策一》
战国策·赵策一》:“前事之不忘,后事之师。”

 

 【典故】

据《战国策·赵策一》记载,春秋末年,晋国的大权落到智、赵、魏、韩四卿手中,晋出公实际上成了傀儡(kuǐ lěi)。公元前458年(已进战国时期),晋出公派使者去请求齐、鲁两国出兵讨伐四卿。四卿得到消息后,联合出兵攻打晋出公。出公无力抵抗,只好被迫出逃,结果病死在路上。
出公死后,宗室姬骄被立为国君,史称晋哀公。智卿智伯独揽了朝政大权,成为晋国最大的卿。其他三卿赵襄子、魏桓子和韩康子都不敢和他抗衡。智伯分别向魏桓子和韩康子要了土地。当他要求赵襄子割地时,遭到了严厉拒绝。智伯非常恼怒,立即派人传令给魏桓子和韩康子,要他们出兵和自己一起去攻打赵襄子。
赵襄子估计智伯会攻打他,忙找谋臣张孟谈商量。张孟谈建议到晋阳(今山西太原西南)去抵抗。到了晋阳,赵襄子发现能够打仗的武器很少。张孟谈劝道:“这里的围墙是用一丈多高的楛(hù)木做的,殿柱是用铜铸的,这些都是制造武器的好材料。”智伯率魏、韩两家攻打晋阳,由于魏、韩不愿为智伯卖命,智伯无法取胜。
晋阳被智伯水淹,围困了整整三年,由于地面积水,老百姓都在树上搭起棚子来居住,城里粮食也快要吃完,很多人冻饿成病,但人们誓死不投降。一天,张孟谈面见赵襄子,说:“魏、韩两家是被迫的,我准备去向他们说明利害,动员他们反戈联赵,共同消灭智伯。”赵襄子听了非常高兴,连连拱手表示感谢。
当天夜晚,张孟谈潜入魏、韩营中,说服了魏桓子和韩康子,决定三家联合起来消灭智伯,事成之后平分智氏之领地。到了约定的那一天,赵、魏、韩三家联合进攻,杀得智军四散逃窜,智伯被擒。从此,晋国成了赵、魏、韩三家鼎立的局面。
一天,张孟谈向赵襄子告别。赵襄子急忙挽留。张孟谈说:“你想的是报答我的功劳,我想的是治国的道理,正因为我的功劳大,名声甚至还会超过你,所以才决心离开。在历史上从来没有君臣权势相同而永远和好相处的。前事不忘,后事之师。请你让我走吧。”赵襄子只好惋惜地答应了。张孟谈辞去官职,退还封地,隐居到负亲丘去,在那里平安地度过了自己的晚年。
后人将“前事之不忘,后事之师”改为“前事不忘,后事之师”作成语,提醒人们记住过去的教训,以作后来的借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