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蘭亭修稧圖

solpee 2014. 3. 1. 18:41

朝鮮의 蘭亭修稧圖

 

蘭亭集序
                                                             王羲之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會于會稽山陰之蘭亭, 修禊事也. 群賢畢至,少長咸集. 此地有崇山峻嶺,茂林修竹,又有淸流激湍,映帶左右,引以爲流觴曲水,列坐其次。雖無絲竹管絃之盛,一觴一詠,亦足以暢敘幽情。

 영화 9년 계축 3월 초 회계군 산음현의 난정에 모여 수계를 열었다.

많은 선비와 늙은이 젊은이가 모두 모였다.
 이곳은 높은 산과 험한 고개와 무성한 숲과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이 좌우로 띠를 이루었다.

 차례대로 자리에 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 띄우니, 비록 관현악 같은 성대함은 없으나,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그윽한 정을 펴기에는 충분하였다.

 是日也,天朗氣淸,惠風和暢,仰觀宇宙之大,俯察品類之盛,所以游目騁懷,足以極視聽之娛,信可樂也。

날은 맑고 따뜻한 바람 불어와, 머리 들어 세상의 넓음을 우러르고 고개 숙여 사물의 흥성함을 살피니, 경치를 둘러보며 정회를 펼침 족하고, 보고 듣는 즐거움 다할 수 있기에 참으로 기쁘기 한이 없었다.

  夫人之相與,俯仰一世,或取諸懷抱,悟言一室之內,或因寄所託,放浪形骸之外。

무릇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서 한 평생을 살아가되, 어떤 사람은 벗과 서로 회포를 나누고, 어떤 사람은 정회를 대자연에 맡기어 유람을 한다.

 雖趣舍萬殊,靜躁不同,當其欣於所遇,暫得於己,快然自足,不知老之將至。

비록 나아감과 머물음이 서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도 같지 않건만, 자신의 처지를 만족하며 잠시나마 得意하면 기쁘고 흡족하여 장차 늙어 죽으리라는 것도 모르는 법이다.

 及其所之旣倦,情隨事遷,感慨係之矣。向之所欣,俛仰之間,已爲陳跡,猶不能不以之興懷。

 그러나, 흥에 겨우면 다시 권태롭듯, 감정이란 세상사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감흥 또한 단지 그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예전의 기쁨도 잠깐사이에 곧 시들해지니 더더욱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況修短隨化,終期於盡。古人云:「死生亦大矣。」豈不痛哉!

하물며 사람 목숨의 길고 짧음이 비록 하늘에 달려있다 해도 결국에는 죽어야 할 뿐이랴? 옛사람이 이르기를 “삶과 죽음은 역시 중대한 일이다" 라고 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은가?”  

 每覽昔人興感之由,若合一契,未嘗不臨文嗟悼,不能喩之於懷。

매번 옛사람들이 감흥을 일으켰던 까닭을 살펴보면 마치 계약문서가 들어맞듯이 일치하여, 그들의 문장을 보면 탄식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가슴에 와 닿지 않음이 없었다.

 固知一死生爲虛誕,齊彭殤爲妄作,後之視今,亦猶今之視昔,

그런즉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말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장수와 요절이 똑같다는 말이 거짓임을 알겠다. 후세 사람들이 오늘의 우리를 보는 것 또한 오늘의 우리가 옛사람을 보는 듯하리라.

悲夫!故列敘時人,錄其所述,雖世殊事異,所以興懷,其致一也。後之覽者,亦將有感於斯文。

슬프도다! 오늘 모임을 가졌던 사람들이 모두 그 술회를 시로 적었으니 비록 후세에는 세상이 달라져도 정회가 일어나는 까닭은 한가지인즉 후인들이 이 글을 보면 또한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修xiū :祓禊(불계xì):를 베품.

☞.祓禊:삼월 삼일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서 묵은 때를 씻어 마음과 몸을 정결히 하던 일종의 종교적 의식. 

☞. “禊”为古代春秋两季在水边举行的清除不祥的祭祀,修稧就是举办这样的祭祀活动.

▲ 유숙 ‘수계도권’ 1853년, 종이에 연한 색, 30×800㎝, 개인 소장

 

문징명 <난정수계도>

 

문징명 <난정수계도>,  24.2cm×60.1cm

 

 명대(明 1368~1644)는 근 백년간의 몽고족 통치에서 벗서나 재차 한족에 의

해 정권을 수립하게 되면서 중화문화에 대한 복구적인 경향으로 회화에서는 송, 원대에 완숙된 문인화에 대한 전승과 발전을 강조하는 복고풍이 성행하게 된다. 심지어 “옛사람들의 장점을 습득하지 못하는 것은 하수에 속한다. 不取古人之長爲下.” 고 할 정도로 전통회화의 정수-장법章法과 필법筆法에 몰입

하기에 이른다. 한편 공, 상업을 발전시켜 초기 자본주의 맹아가 태동하는 시

로서 도시의 번성과 시민의 수요에 의해 통속문학이 신속히 발전 보급되었다. 이는 향후 상업도시를 중심으로 문인화가 대중성을 가미한 그림형식으로 자

리 잡는 직업화가군을 형성하는 새로운 계기가 된다.
 명대 초기의 문인화는 크게 두 개의 유파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송원 문인화

전통을 답습하는 복고파와 다른 하나는 남송의 마, 하원체산수馬夏院體山水

를 계승발전 시킨 “오문파吳門派”가 있다.  오문파에서 명 4대가로 불리는

심주(沈周), 문징명(文征明), 당인(唐寅), 추영(仇英)등은 시, 서, 화 모두에 뛰

어난 문인 명사로서 벼슬에 여념하지 않고 산수에서 노닐고 서화를 즐기면서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이들은 의취를 숭상하고 필묵에 능할뿐더러 원대

의 사인풍을 계승 발전시켜 자신의 품격과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왕희지의 이 글은 시(詩)가 아니라 시를 엮은 ‘난정집(蘭亭集)’의 서문 일부다. ‘난정집’은 중국 동진(東晋·265~316)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307~365)가 353년 3월 3일 난정에 문인 42명을 초대하여 수계(修稧)를 열면서 지은 시를 엮은 문집이다. ‘수계’는 음력 삼월 삼짇날에 맑은 계곡물에서 몸을 씻어냄으로써 겨우내 쌓인 묵은 때와 부정한 기운을 떨쳐버리는 세시풍속이다. 왕희지는 이런 의미 있는 날에 풍광이 빼어난 멋진 장소에서 시회(詩會)를 열어 후대의 많은 문인들이 그리워할 역사를 만들었다. 최초의 문인 시회였다. ‘난정집’에는 수계에 참석한 문인 21명이 쓴 37편의 시가 담겨 있는데, 본문에 있는 시보다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의 서문이 더 인기가 많아 후대 사람들은 이 사건을 화제(畵題)로 삼아 ‘난정수계도(蘭亭修稧圖)’를 그려 그날을 기념하였다.
   
   
   42명의 선비가 난정에 모인 뜻은
   
   왕희지의 글은 계속된다. 그의 글 속에는 자연 속에서 인생을 관조하며 영원한 것을 그리워하는 고아(高雅)한 문사(文士)의 간절함이 담겨 있다. 길지만 워낙 문장이 유명하니 나머지 글도 살펴보기로 하자.
   
   “이날 하늘은 깨끗하고 공기는 맑으며, 봄바람은 더없이 따스하고 부드럽다. 머리를 들어 우주의 넓음을 우러르고 고개를 숙여 만물의 흥성함을 보며, 경치를 둘러보며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하니, 보고 듣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기에 충분하여 참으로 기쁘기 한이 없다. 무릇 사람이 서로 어울려서 한평생을 살아가되, 어떤 이는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벗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어떤 이는 자신에게 맡겨진 바를 대자연에 맡기어 노닐기도 한다. 비록 나아감과 물러남이 서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도 같지 않으나, 자신의 처지를 만족하며 잠시나마 득의(得意)하면 기쁘고 흡족하여 장차 늙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모르는 법이다.
   
   급기야 그 즐거움도 권태롭고, 감정이란 일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감회란 단지 그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예전의 기쁨도 짧은 순간에 시들해지니 더더욱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사람의 수명이 짧든 길든 자연의 조화에 따라 결국에는 죽음에 이름에서야! 옛사람이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중대한 일이로다’라고 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으랴? 옛사람이 감흥을 일으켰던 이유를 살펴보면 마치 부절을 하나로 맞춘 듯 일치하여, 옛 문장을 보면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음을 달랠 수 없도다. 죽고 사는 것이 같다는 말이 참으로 허황되고, 장수와 요절이 같다는 말도 망령된 것이라 하겠다. 후세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보는 것도 지금 우리가 옛사람을 보는 것과 같으리니, 슬프다! 그래서 여기 사람들을 순서대로 열거하여 그들이 지은 바를 적는다. 비록 세상이 달라지고 세태가 변해도 정회가 일어나는 까닭은 하나이니, 후인들이 이 글을 보면 또한 감회가 있으리라.” 
   
    왕희지, 조선에 오다
   
   중국 난정에서 수계가 있은 지 1500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문인들의 뇌리에는, 구불구불하게 굽이치는 물길 위로 연잎에 술잔을 얹어 띄우는 ‘유상곡수(流觴曲水)’와 물길을 따라 사람들이 주욱 앉아 있는 ‘열좌(列坐)’의 장면이 생생하게 각인되었다. 후인들은 왕희지가 기획하고 진행한 품격 높은 난정에서의 이벤트에 열광했다. 흠모의 시가 줄을 이었고, 풍류가 넘치는 아회(雅會)를 기념하는 그림이 수북이 쌓였다. ‘왕희지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왕사모’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결성되었다.
   
   왕희지에 대한 열광은 단지 그를 추억하고 기념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급기야는 ‘왕희지 따라잡기’로 발전했다. 조선시대의 화가 혜산(蕙山) 유숙(劉淑·1827~1873)이 그린 ‘수계도권’은 30명의 중인(中人)들이 1853년 3월 3일 서울 남산 기슭에서 ‘왕희지가 놀았던 놀이를 좇아서’ 계를 닦고 시 한 수씩을 지은 장면을 증명한 인증샷이다. 장소와 등장 인물은 다르지만 모임의 취지와 뜻을 고스란히 계승한 난정수계의 조선 버전이다. 그 버전은 형식만 빌려온 것이 아니라 주인공과 장소가 조선이라는 실정에 맞게 갓 쓰고 한복 입은 조선 사람으로 완벽하게 거듭났다. 왕희지가 중국 산음의 난정에서 출발하여 1500년의 시간 동안 걷고 걸어 조선의 남산에 도착해보니 소당(小棠) 김석준(金奭準·1831~1915)이 자신의 역할을 맡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참석자의 연령층도 다양했다. 모임을 주도한 김석준은 23세였고 그림을 그린 유숙은 27세였다. 최연소자인 안재흥(安在興)은 20세였고 최고령자인 변종운(卞鍾運)은 63세였다. 마치 우리 시대의 동호회 모임 같다.
   
   그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시회 장소로 들어가는 사람과, 중앙 탁자를 중심으로 앉아 있는 사람, 그리고 왼쪽 끝에서 곡수(曲水)를 바라보며 시상(詩想)에 잠긴 사람이다. 특히 중앙에는 총 참석자 30명 중 22명의 인물을 배치하여 시선을 집중시켰다.
   
   유숙은 초상화를 잘 그린 화가답게 세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각 인물의 특징이 최대한 잘 드러날 수 있게 정교하게 그렸다. 담청(淡靑)과 담홍(淡紅)이 두드러지는 그림 속 인물들은 담박하고 아취 있는 문인의 모습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신분상으로는 사대부가 아닌 중인이지만 그들이 누리는 문화만큼은 사대부에 뒤지고 싶지 않은 여항(閭巷) 문사들의 지향성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길이가 8m에 이르는 ‘수계도권’은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사건을 관념적으로 구성하여 그린 데서 벗어나 화가가 직접 참여한 실제 장면을 그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사대부라는 특권층의 전유물로 여기던 시회를 중인 계층이 적극 즐기고 향유할 만큼 위상이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신의 삶의 모델을 부러워하는 차원을 넘어 직접 현실 속에서 실현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의 모임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