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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6일 오전 10:38

solpee 2013. 12. 16. 10:39

風動幡動

非風非幡

   

 
六祖, 因風 颺(날릴 양)刹幡, 有二僧對論. 一云, 幡動. 一云, 風動.
往復曾未契理. 祖云, 不是風動, 不是幡動, 仁者心動. 二僧悚然.


육조(중국선종의 6祖라 불리는 혜능을 말함; '유조'라고도 함)때의 일이다.

바람이 절의 깃발을 펄럭이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두 중이 토론을 벌였다. 한 사람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하였다.

 둘이 서로 다투며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에 육조가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펄럭이는 것도 아니고, 다만 너희들의 마음이 움직인다.”

이 말을 듣고 두 중은 깜짝 놀랐다. 
 
無門曰, 不是風動, 不是幡動, 不是心動, 甚處見祖師.
若向者裏, 見得親切, 方知二僧買鐵得金, 祖師忍俊不禁, 一場漏逗.

無門이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펄럭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어디에서 육조의 뜻을 볼 것인가.

만약 이에 대하여 깊이 깨달았다면 알게 되었을 것이다, 두 중이 철을 샀는데 알고 보니 금이었고, 육조는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임을. 결국 한 바탕 헛소동이었도다. 
 
乃墨癡大笑曰, 是風動, 是幡動, 是心動, 是風動. 豈不風動幡動心動.

이에 묵치가 크게 웃고 말한다. 바람이 일면 깃발이 펄럭이고, 깃발이 펄럭이면 마음이 움직인다.

또한 마음이 움직이니 바람이 인다. 어찌 바람도 깃발도 마음도 움직임이 아니랴. 
 
한문 세 문단 중 앞 두 문단은 "無門關"에서 나왔다.

 

☞. 风动·幡动

 

慧能得了弘忍衣钵,隐居在广东曹溪,待缘而化。十余年后他来到广州法性寺,正值印宗法师讲《涅盘经》。当时有风吹幡动,两个僧人便争论起来,一个说是幡在动,一个说是风在动。
慧能听了,说:“不是风动,也不是幡动,而是仁者的心在动!”
二僧大惊,禀报了印宗法师。印宗一听,知道来者并非凡人,就请他登上法坐说法。慧能登座说法,一座大惊。
这天晚上,印宗把慧能请到自己的房间里,说:“我听说弘忍大师的禅法南传了,莫非你就是他的传人?”慧能说:“正是。”于是取出袈裟,金光灿烂。印宗拜倒在地,当即为慧能削发,拜慧能为师。第二天亲自搀扶着慧能登上法座,宣布这一特大喜讯。
从这以后,慧能在曹溪大倡顿悟法门,主张不立文字,教外别传,直指人心,见性成佛。他用通俗简易的修持方法,取代繁琐的义学,形成了影响久远的南宗禅,成为中国禅宗的主流。
风动幡动的故事,最早见成书略早于敦煌本《坛经》的《历代法宝记》。二僧争论风动还是幡动,注意的只是施者与受者的关系,是毫无意义的肤浅之争。慧能的人心自动之说,则纯属禅门本色。慧能在否定了风动、幡动等观点后,明确提出了“心动”之说,这就把全部问题归结于“自心”。
慧能说过:“一切万法,不离自性”(《坛经·行由品》),“心生种种法生,心灭种种法灭”(《坛经·付嘱品》),世间一切万有,尽由自心变幻而生。佛家常说:“三界唯心,万法唯识”,意思是一切物质现象都是“心”的变现和展开。所以慧能说不是风动,不是幡动,而是“心”在动。
在慧能看来,凡所有相,皆属虚妄。因为诸相都是心念妄起执著的产物。慧能在否定了风动、幡动等观点后,直接指明风幡之动,根源于一念妄心。正是这一念妄心,决定了眼识追逐风动幡动的色尘,不能解脱。
这则公案,由于意义重大,宋代以后,已成为文人、禅客的熟典,引发了无数禅僧、诗客的吟咏。

 
 
[근당의고전] 可以言而不言者其罪大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죄는 그 죄가 더욱 크다

 

세상을 살면서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침묵할 때 입을 닫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정작 말해야 할 때는 침묵하고 침묵해야 할 때는 말하는 경우가 있다. 맹자(孟子)는 말해서는 안 될 때 말하는 것은 말을 함으로써 무엇인가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未可以言而言 是以言餂之也), 반대로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것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어떠한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可以言而不言 是而不言餂之也)라 했다.

정조(正祖)도 말하지 않아야 할 때 말하는 죄보다 말해야할 때 침묵하는 죄가 더욱 크다고 강조한 것은 위정자(爲政者)들이 지기의 이익 때문에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세태를 지적하고 통탄해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공자(孔子)도 함께 말할 만한데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은데 말하면 말을 잃는다(可與言而不與之言 不可與言而與之言)고 했다. 그러니 할 말은 꼭하고 공연한 말은 말라는 것이다.

상촌(象村) 선생도 마땅히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잘못이다. 반드시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해야 군자라 했다. 그리고 말해야 할 자리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로 있다가 나와서는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으면 소인이라는 것이다. 백사(白沙)도 말해야 할 때 말하는 자는 참으로 굳센 자만이 가능하다 하였다.


☞.
正祖의 鄒書春記
弘齋全書 중에서

至味無味-정민의 世說新語에서

 

유명한 냉면집을 안내하겠다 해서 갔더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맛을 보곤 실망했다. 좋게 말해 담백하고 그저 말해 밍밍했다. 네 맛도 내 맛도 없었다.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꼽는다는 냉면집 맛이 학교 앞 분식집만도 못했다. 나처럼 실망한 사람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집 벽에 순수한 재료로만 육수를 내서 처음 맛보면 이상해도 이것이 냉면 육수의 참맛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여러 해 전 일인데도 가끔 생각난다. 감미료로 맛을 낸 육수 국물에 길들여진 입맛들이 얼마나 투덜댔으면 주인이 그런 글을 써 붙일 생각을 했을까? 그래도 사람들이 여전히 줄을 서서 찾는 걸 보면, 맛을 아는 사람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세상 사는 맛은 진한 술과 식초 같지만, 지극한 맛은 맛이 없다. 맛없는 것을 음미하는 사람이 능히 일체의 맛에서 담백해질 수 있다. 담백해야 덕을 기르고, 담백해야 몸을 기른다. 담백해야 벗을 기르고, 담백해야 백성을 기른다(世味醲嚴, 至味無味. 味無味者, 能淡一切味. 淡足養德, 淡足養身, 淡足養交, 淡足養民)." '축자소언(祝子小言)'에 나온다.

자극적인 맛에 한번 길들면 덤덤한 맛은 맛 같지도 않다. 고대의 제사 때 올리는 고깃국인 대갱(大羹)은 조미하지 않았다. 현주(玄酒)는 술이 아니라 맹물의 다른 이름이다. 아무것도 조미하지 않았지만 모든 맛이 그 안에 다 들어있다. 당장에 달콤한 맛은 결국은 몸을 해치는 독이 된다.

"진한 술, 살진 고기, 맵고 단 것은 참맛이 아니다. 참맛은 단지 담백할 뿐이다. 신통하고 기특하며 탁월하고 기이한 것은 지극한 사람이 아니다. 지극한 사람은 다만 평범할 따름이다(醲肥辛甘非眞味, 眞味只是淡. 神奇卓異非至人, 至人只是常)." '채근담'의 한 구절이다. 참맛은 절대 자극적이지 않다.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태를 내지 않는다.

사람들은 신기한 것만 대단한 줄 알고, 자극적인 맛만 맛있다고 한다. 담백은 맛없다고 외면하고, 평범은 한목에 무능으로 몰아 무시한다. 공자께서 탄식하셨다. "먹고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건만, 능히 맛을 아는 자는 드물다(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선거철마다 각종 공약이 난무하고 장밋빛 청사진이 황홀하다. 그럴듯해 보이는 것일수록 가짜다. 달콤함에 현혹되면 안 된다. 평범과 담백의 안목이 필요하다.

 

☞. 중용(中庸)》4장 <지미장(至味章>에 「子曰 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공자왈 도가 행하여지지 않고 있는 것을 알겠다./ 안다는 사람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사람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요./ 도가 밝지를 못하는 것을 알겠다./ 현명하다는 사람은 지나치고 불초한 사람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맛을 아는 자는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