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看脚下

solpee 2013. 12. 14. 05:57

 

오늘은 癸巳年(桓紀9210,神紀5910,檀紀4346) 陰 甲子月(十一月小) 12일 甲寅日 土曜日 大雪(11.05.08:08)節 仲候 鵲始巢(작시소: 까치가 둥지를 짓기 시작한다)候입니다. 日出은 07:39, 日入은 17:14, 月出은 15:10, 月入은 04:27 입니다. 또 눈이 내렸네요.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몸 건강하십시요. 

 

看脚下

 

간(看)이란 ‘보라’는 뜻이고, 각하(脚下)란 ‘다리아래’란 뜻이다.

따라서 ‘간각하’란 ‘발밑을 보라’는 뜻이다.

그리고 조고(照顧)란 ‘주의한다’ 또는 ‘살펴본다’는 뜻이므로,

‘조고각하’란 ‘발밑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조고각하’란 선어(禪語)는 현실 생활에 응용되어,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으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조고각하(照顧脚下)란 말을 처음 말씀한 분은

벽암록(碧巖錄)을 저술한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년)선사이다.

임제종의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년)선사는 원오극근(圜悟克勤),

태평혜근(太平慧勤), 용문청원(龍門靑遠)이란 세 명의 뛰어난 제자를 두었다.

 

저마다 선기와 법력이 뛰어났다고 하여 불과(佛果, 부처의 경지)와

불감(佛鑑, 부처의 거울)과 불안(佛眼, 부처의 눈)이란 호(號)로 불리었으며,

세 분을 삼불(三佛)이라고도 하였다.

 

어느 날 밤, 법연선사가 세 제자와 함께 원행을 하고 돌아오는 중에

바람이 세차게 불어 손에 들고 있던 등불이 꺼졌다.

그러자 법연선사가 “자, 한마디씩 일러라”고 했다.

 

태평혜근은 “채색바람이 붉게 물든 노을에 춤춘다(彩風舞丹霄)”고 했고,

용문청원은 “쇠 뱀이 옛길을 건너가네(鐵蛇橫古路)”라 했으며,

원오극근은 “발아래를 보라(照顧脚下)”고 했다.

이 선화(禪話)을 ‘삼불야화(三佛夜話)’라고 한다.

 

선(禪)의 본질은 소박한 일상생활 속의 구체적인 사물과

현상을 제시하여 피부에 와 닿아야 하는데,

당시의 선(禪)은 혜근선사나 청원선사의 말처럼

추상적이면서 관념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지나친 은유와 언어유희로 인해 대중들에게 외면당할 당시,

스승인 법연선사와 제자인 극근선사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간각하(看脚下)'나 '조고각하(照顧脚下)'는 자기반성을 의미한다.

즉 수행자는 밖을 향해 구하지 말고 내적인 자기 본성을 살펴보라는 뜻으로서 밖을 향해 찾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수좌(首座, 선승을 가리킴)들은 행각(行脚, 수행을 위해 도보로 여행하는 것)할 때, 대나무로 만든 삿갓을 쓰곤 했다. 이는 밖의 대상에 이끌리지 않고,

항상 자기를 살펴 발밑을 조심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자기 발밑을 보는 사람은 적고, 그저 남의 발밑

즉 남의 잘못을 비난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남을 향한 눈을 자기에게 돌려 항상 발밑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기를 소홀히 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현실생활의 모든 재난을 예방하는 것이다.

자기라는 존재를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자기를 응시하고,

반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덕목인 것이다.

 

비가 몹시 오던 날, 한 수행자가 서둘러 신발을 벗어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방안에 있던 노승이 물었다.

“우산을 신발 왼쪽에 두었나요, 오른쪽에 두었나요.”

 

젊은 수행자는 그만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는데,

깨달음을 인가 받으러 간 자리였기 때문이다.

우산을 어디에 둔 것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깨어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百度: 法演禅师和三位弟子在凉亭中聊天,回禅房休息的时候,灯笼已经灭了。法演禅师问弟子:“在这个时候,你们的感受是怎样的?”其中两位弟子的回答,云中雾里摸不着边。另一个弟子圆悟克勤禅师说:“看脚下!”法演禅师听了,大为赞赏:“今后,能够大大振兴我的门风的,就是你了!”(《宗门武库》卷一)
灯笼熄灭的时候,漆黑一片,后面的来路,和前面的去路,都看不清楚,我们要做的是什么?当然是:“看脚下,看现在!”
许多人都迷信来生与前世。我们对今生的不幸,用前世做借口,说那是前世欠下的;我们对今生的不满,用来生做期盼,说美好的愿望可以等到了来生去实现。问题是,当我们梦想着前世与来生的时候,就会错失当下的风景。所以要牢牢记住禅的要义:看脚下! 在人的一生中,经常会有这样的感受:
当我上班时,就想着下班后要做什么事;到了下班后,又想着上班的事。
起初,我想着进大学;随后,我巴不得赶快毕业好工作;接着,我想着结婚、想有小孩;再后来,我又巴不得小孩快点长大,好让我重新上班;之后,我每天想退休想得要死;现在,我真的快死了。忽然间,我明白了,我一直忘了真正去生活!
之所以会这样,是因为我们总是看着远方的星光,却遗忘了眼前的灯火;总是憧憬着未来的美好,却忽略了当下的享受。用禅语来说,就是“贪看天边月,失却掌中珠”!(《碧岩录》卷三)所以,我们要用禅的精神,活在当下。
其实,生活的很多乐趣就存在于过程中。用禅的眼光来看,旅途上的每一段经历,都是目的地本身,这就叫“在途中不离家舍”。 (《古尊宿语录》卷四)“途中”是为了实现某一个目标而做的工作;“家舍”就是我们的目的地。我们习惯于相对的认识方法,我们所做的一切行为,都是为了一个遥远的目标,工作只是手段,只是过程,于是,我们就忙忙碌碌地度过了一生,却不能醒悟到这样一个道理:如果你不把工作当成目的的本身,工作就会索然寡味。相反,如果把工作的本身看作是目的,把“途中”看做是“家舍”,就可以消除外在的目的性,就能充分体验到工作本身的乐趣。“途中”即是“家舍”,就好似蜗牛背着它的壳(家舍)走路一样,在途中的每一步都不离开家舍。这就是活在当下。


 

[근당의 고전] 徙家(宅)忘妻( xǐ zhái wàng qī )

집을 이사하면서 자기 부인을 깜박 잊어버리다

 

공자(孔子)와 애공(哀公)의 대화 내용이다. 애공이 공자에게 ‘이사 갈 때 자기 부인을 잊고 갔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때 공자는 정말로 심한 사람은 자기의 몸을 잊어버리는 경우입니다. 즉 망처(忘妻)보다 더한 것은 망신(忘身)이라는 것이지요. 그러자 애공은 정말 그 내용을 듣고자 했노라 했다 하였다.

공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기의 본분인 할 일을 잊어버리고 탐욕에 빠져있는 폭군들의 예를 들면서 지도자의 직무유기와 같은 나태함이 나라를 망하게 하고, 백성들을 어려움에 빠져들게 한다는 경고와 같은 비유였다.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서 곁에 있는 가족도 잊고, 눈앞의 물질에 눈멀어 인간의 도리를 잊어버리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사람도 있다. 같이 살아온 부인도 잊고 이사 갈 정도라는 말을 깊이 새기면서 내가 지금 잊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뒤돌아보면서 인생 망신의 길에 서있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기를 기원해 본다.

【解释】 徙:迁移;宅:住所。搬家忘记携带妻子。比喻粗心健忘。
【出处】 《孔子家语·贤君》:“寡人闻忘之甚者,徙宅而忘其妻。”
【用法】 连动式;作谓语;含贬义;指粗心。
【示例】 西汉·刘向说苑·敬慎》:“予闻忘之甚者,徙而忘其妻,有诸。”

成语故事有一次,唐太宗时的谏议大夫魏征(邯郸馆陶县人),与唐太宗议论前朝兴衰时,也曾说:“昔鲁哀公谓孔子曰:‘人有好忘者,徙宅而忘其妻。’孔子曰:‘又有甚者,桀、纣乃忘其身’。” 唐太宗听后颇有感触地说:“是啊,我和诸位应当合力互助,别忘了国家和自身,免得也被人讥笑啊!”这个故事翻译过来的意思是说:鲁国君鲁衰公不相信世界上真有这么糊涂的人。有一次他问孔子:“徙宅忘妻,您说真有这样的人吗?” 孔子说:“怎么没有,不算稀奇,还有连自身都遗忘的人呢!” 鲁哀公更加惊奇了,怎么会有这种事儿呢?孔子说:“这种事儿也不算稀奇。譬如夏梁、商纣等暴君,荒淫无度,穷奢极欲,不理国事,不顾民生。结果,国家亡了,暴君们的命也完了。他们不但忘记了国家,遗忘了人民,连自身都完全忘记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