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癸巳年(桓紀9210,神紀5910,檀紀4346) 陰 庚申月(七月小) 13일 丁巳 月曜日 立秋(7.01.17:20)節 末候 寒蟬(hánchán)鳴(한선명: 쓰르라미 운다)候입니다. 日出은 05:51, 日入은 19:20, 月出은 17:44, 月入은 03:29 입니다. 낮의 길이 13시간 28분 45초. 즐거운 하루 되십시요.
王鐸
王鐸(1592-1652)은 河南 孟津 사람으로 字는 覺斯와 覺之를 사용하였고 石樵, 嵩樵, 痴樵, 十樵, 雪山, 五岳道人, 雪山道人, 東皐長 張芝山房, 靈芝軒, 聽雪齋, 琅華館 등 수많은 雅號와 堂號를 사용하였다. 詩文과 山水畵에도 뛰어났으나 서예의 명성이 높아 나머지는 그 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는 明나라 萬曆 20년(1592)에 태어나 淸나라 順治 9년(1652)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생의 대부분을 明나라에서 살았으나 淸나라가 건국한 이후에도 계속하여 禮部尙書의 관직을 받는 등 淸나라를 섬겼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서학자에 따라서 그를 明나라 시대의 서예가로 분류하기도 하고 淸나라 시대의 서예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王鐸은 明末淸初의 서예가이지만 필자는 그가 61세의 한 평생 가운데 55년을 南明을 포함한 明나라에서 생활하였고 또 그의 독창적 書風도 明나라 시대에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부득이 明나라 시대의 서예가로 분류하였다.
王鐸은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書塾에 다니면서 학문과 서예를 연마하였다. 20대 초반에 東林黨의 핵심 인물이며 후에 刑部尙書에까지 오른 喬允升이 요양하기 위하여 고향인 孟津에 내려와 있을 때 그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東林黨과의 깊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天啓 원년(1621) 鄕試를 거쳐서 天啓 2년 31세의 나이로 進士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나갔다. 당시 서예로 명성을 얻고 있던 黃道周와 倪元璐도 함께 進士에 급제하여 이들 세 사람은 사람들에게 ‘三珠樹’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 후 翰林院에 들어가 庶吉士, 編修, 經筵講官 등을 거치며 빠르게 승진하였다. 崇禎 17년(1644)에 이르러서는 禮部尙書에 봉하여 졌으나 淸나라 군대의 침입에 의해 都城이 함락되는 까닭에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崇禎帝가 자살한 후 福王, 魯王, 唐王, 桂王이 金陵(지금의 南京)에서 南明을 세우고 즉위하자 王鐸은 福王을 따라 東閣大學士에 올랐으며 淸나라 군대에 대항하며 復明을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順治 2년(1645) 錢謙益과 함께 百官을 이끌고 성문을 나와 淸나라에 투항하였다. 順治 3년 淸나라에서 弘文院學士를 除授 받았으며 禮部左侍郞과 太子少保를 거쳐 禮部尙書에 봉해졌으나 臥病 중이라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順治 9년 세상을 떠난 후에 太子太保에 除授 되었고 文安의 諡號가 내려졌다.
王羲之 서예의 정수를 체득한 王鐸은 역대 유명한 서예가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또 臨書하여 새로운 서예 세계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급제한 후 翰林院에 들어간 王鐸은 [淳化閣帖]을 비롯하여 內府에 수장되어 있는 唐宋과 元明의 뛰어난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많았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수많은 書畵 명품의 題跋로 그가 명가의 작품을 많이 감상하였고 또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吳門, 華亭, 金陵 등 문화와 예술의 전통이 깊은 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을 여행하며 안목을 넓혀 나갔다. 그는 《跋五弦少司空褚臨蘭亭墨跡》에서 “觀書猶觀山升嶽, 嫌衆山之峛崺也.”(서예를 감상하는 것은 五嶽에 올라 산을 보면 자잘한 산들을 싫어하는 것과 같다.)라 하였고 또 《書峨眉山紀覽詩跋》에서는 “登五嶽然後知山, 浮海澳然後知海.”(五嶽에 오른 다음에 산을 알고 깊은 바다에 나가 본 다음에 바다를 알 수 있다.)라 하여 서예의 학습에 있어서 뛰어난 명가의 작품을 많이 섭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擬山園集》에서 “予跡江南北, 幾遍天下.”(나는 강남과 강북의 천하를 두루 遍踏하였다.)라 하여 스스로 전국 각지를 유람하며 안목을 넓혔음을 자부하였다. 崇禎 10년(1637) 46세에 [淳化閣帖]에 실려 있는 30여 명의 작품을 臨書한 [瓊蕊廬帖]을 근거로 할 때 王鐸은 王羲之 이외에도 魏晋시대 여러 서예가의 서예를 매우 깊이 있게 연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전하는 작품을 근거로 할 때 45세 이전의 작품은 晋唐의 서예를 臨書한 것이 많고 그 밖의 작품도 王羲之와 米芾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이 대부분이다. 崇禎 11년(1638) 47세부터 明나라가 멸망하는 崇禎 17년(1644) 53세까지 관직을 떠나 고향에서 서예의 창작에 매달려 있을 때 王鐸의 서예는 行書와 草書를 중심으로 하여 완전하게 독자적 書風을 형성하게 되었다. 王鐸과 함께 科擧 시험에 급제하여 한림원에서 서예와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晩明四大家의 한사람으로 불리는 黃道周는 《黃漳浦集․書品論》에서 “行草近推王覺斯. 覺斯方盛年, 看其五十自化.”(行草로는 근래에 王鐸이 뛰어나다. 王鐸은 바야흐로 한창 무르익어 50세에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라 하여 王鐸은 50세에 이르러 자신의 서예 세계를 확립하였다고 평가하였다. 王鐸 스스로도 《再跋自書瓊蕊廬帖》에서 “此予四十六歲筆. 五十以後, 更加淬礪, 仍安於斯乎?”(이 작품은 내가 46세에 쓴 것이다. 50세 이후 더욱 노력하였는데 여전히 이 같은 수준에 안주하겠는가?)라 하여 50세에 이르러 몇 년 전에 쓴 작품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50세를 전후하여 王鐸은 자신의 완전한 서예 세계를 개척하여 자신만의 書風으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爲心翁書詩軸], [憶過中條語帖], [北京玄眞廟詩軸], [爲仲玉書詩軸], [萬騎爭歌詩軸], [靑圃通隣詩軸], [洛州香山詩軸], [吾聞朱君文語軸], [香山寺詩軸], [琅華館帖], [贈子房公草書軸], [奉景翁詩軸], [望白雁潭作詩軸], [飛人詩軸], [爲嗇道兄書詩軸], [贈湯若望詩冊], [爲谷水老詞宗書詩軸], [贈張抱一行書詩卷] 등 여러 작품이 전하고 있으며 거의 대부분이 行書와 草書로 이루어져 있다. 55세 이후 淸나라 시대에도 많은 작품을 창작하였으나 書風의 새로운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이전의 형태와 심미적 범주를 계승하고 있을 뿐이었다.
王鐸 行草의 필획은 강건하면서도 변화가 다양하며 위태롭고 험준할 뿐 아니라 불규칙한 結字와 結構 가운데서도 전체적 조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편방의 좌우 結字에서는 높고 낮음은 물론 크기의 구속을 받지 않았고 필요에 따라 위치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다양한 변화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한자 본래의 結構法에서 벗어나지 않아 기이한 형태 속에서도 전체적 조화가 탁월하다. 특히 布置와 章法에서 기운이 생동하는 운동성과 곡조를 타는 듯한 음률과 박자의 흐름을 매우 잘 표현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王鐸의 行草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좋은 평가를 받아 ‘五百年來無此君’(오 백년 이래로 王鐸 만한 사람이 없다.)이라 하여 北宋 이후 가장 뛰어난 서예가로 칭송되었다. 吳昌碩이 《缶廬集․孟津王文安草書卷》에서 “有明書法推第一.”(明나라 서예의 제일이다.)이라 한 것처럼 碑學이 성행한 이후 그 명성은 더욱 높아졌으며 20세기 중기 이후부터는 中國은 물론 일본에서 王鐸 붐이 일어나 많은 서예가들이 숭배하고 있다.
朱熹〈武夷精舍雜詠〉12首
정사(精舍) 12-1
琴書四十年 거문고와 책을 벗 한지 40년
幾作山中客 몇 번이나 산중의 객이 되었던가
一日茅棟成 어느 날 띠 집 하나를 완성하니
居然我泉石 확실히 나의 샘과 산이 되었네
인지당(仁智堂) 12-2
我慙仁知心 나는 인과 지의 마음에 부끄러운데
偶自愛山水 우연히 스스로 산수를 사랑하도다
蒼崖無古今 푸른 산악은 예나 지금이나 같고
碧澗日千里 푸른 시내는 날마다 천리에 있네
은구실(隱求室) 12-3
晨窓林影開 새벽 창에 숲 그림자 열리고
夜枕石泉響 밤중 베갯머리엔 샘물 소리 울리네.
隱居復何求 은거함에 다시 무엇을 구하며
無言道心長 말없는 가운데 도의 마음은 자라네
지숙료(止宿寮) 12-4
故人肯相尋 친구가 서로 찾는 것을 즐겨하여
共寄一茅宇 함께 띠 풀 집에 머물렀네.
山水爲留行 산수에 머물렀다 가니
無勞具鷄黍 힘쓰지 않아도 닭 모이를 갖추어주네.
석문오(石門塢) 12-5
朝開雲氣擁 아침이 열리면 구름 기운에 안기고
暮掩薜蘿深 해 질 녘이면 담쟁이 넝쿨 무성 하네
自笑晨門者 새벽 문에 기대어 홀로 웃는 이
那知孔氏心 어찌 공자님의 마음을 알까?
관선재(觀善齋) 12-6
負笈何方來 스승 찾아 어디에서 오셨는가?
今朝此同席 오늘 아침 자리를 함께 했네
日用無餘功 날마다 하는 공부로 다른 일 없이
相看俱努力 서로 격려하며 같이 노력할 뿐
한서관(寒棲館) 12-7
竹間彼何人 저 대숲에 서있는 이 게 누구인가
抱甕靡遺力 옹기를 안고 힘쓰기를 버리지 않네
遙夜更不眠 긴긴 밤 다시 잠 못 이루어
焚香坐看壁 향 피우고 앉아 벽만 처다 보네
만대정(晩對亭) 12-8
倚笻南山巓 지팡이에 의지해 남산 정상에 오르니
卻立有晩對 도리어 만대봉(晩對峰)이 서 있네
蒼峭矗寒空 푸르고 높게 차가운 하늘과 가지런한데
落日明影翠 저녁놀은 푸른 절벽을 선명하게 비추네
철적정(鐵笛亭) 12-9
何人轟鐵笛 어떤 사람이 철적을 요란하게
噴薄兩崖開 뿜어내어 양쪽 언덕을 열었네
千載留餘響 천년의 남은 소리 남아 있으니
猶疑笙鶴來 오히려 생황 부는 학이 오는 듯하네
조기(釣磯) 12-10
削成蒼石稜 깎아 세운 푸른 모서리
倒影寒潭碧 찬 못에 비쳐 푸르도다
永日靜垂竿 종일 조용히 낚시를 드리우니
兹心竟誰識 이 마음을 끝내 누가 알리
다조(茶竈) 12-11
仙翁遺石竈 선옹이 돌 아궁이 남겨 놓았으니
宛在水中央 완연히 물의 한 중앙에 있도다
飲罷方舟去 차를 다 마시고 배로 나아가려고 하니
茶烟裊細香 차 연기는 향기를 내며 하늘거리네
어정(漁艇) 12-12
出載長烟重 나갈 때는 무거운 안개를 오래 싣고
歸裝片月輕 돌아올 때는 가벼운 조각달을 싣고 오네
千巖猿鶴友 많은 바위는 원숭이와 학의 친구이고
愁絶棹歌聲 뱃노래 소리에 근심이 사라지네
☞. 子路(자로)宿於石門(숙어석문)이러니,
晨門曰(신문왈)奚自(해자)오?
子路曰(자로왈)自孔氏(자공씨)로라.
曰(왈)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시지기불가이위지자여).
자로가 성문 앞에서 자고 있으니
문지기가 와서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자로가 공씨 문중에서 왔다고 하니
문지기가 하는 말이...
오라~! 그 안 되는 것을 알면서 해 대는 분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