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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復(复)秀才所居雙(双)檜(桧)

solpee 2013. 6. 2. 12:19

오늘은 癸巳年(桓紀9210,神紀5910,檀紀4346) 陰 丁巳(四月) 24일 日曜日 己亥 小滿(4.12.06:09)節 末候 麥秋至(맥추지:보리가을이 됨)候입니다.


書因鳥迹方成篆/서인조적방성전/鳥迹體에서 篆體가 나오고

文是龍心不待雕/문시용심불대조/文은 용심에 비롯되었으나 새기기 어려워?

 

王復(复)秀才所居雙(双)檜(桧)

 

                                                    蘇(苏)軾(轼)

 

凛然相對(对)敢相欺

直干凌云未要奇

根到九泉無(无)曲處(处)

世間(间)惟有蟄(蛰)龍(龙)知

 

宋·苏轼《王复秀才所居双桧二首》
相对:两棵桧树相对。敢:不敢。未要奇:不标新立异。九泉: 指地下。蛰龙:潜伏着的龙。
这首诗是写给钱塘秀才王复的,其时王复在乡间行医,悬壶济世,口碑甚好。王复在候潮门外的家,
庭院中有两棵高大的百年古桧。诗的意思是说,两棵桧树相对挺立,表现出一种不可侵犯的气势,
令人敬畏。它们不仅树干笔直地耸入云天,更为奇特的是,它们的根也直伸伸地扎入地下,
在九泉之处也毫无弯曲。当然,只有潜伏地下的蛰龙才能了解,双桧的根也是如此之直。
诗中以桧喻人,赞美威武不屈、刚正不阿的优良品德,颂扬表里如一、光明磊落的高风亮节。

[창룡문]과지초당(瓜地草堂)

과지초당(瓜地草堂), 추사(秋史)의 생부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이 한성판윤을 지내던 1824년 과천에 마련한 별서(別墅)다. 10여 년간 제주와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김정희(金正喜)는 1852년 8월 이곳에 내려와 1856년 10월 10일 서거하기까지 4년을 머물렀다. 그리고 대가(大家)의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다. 국보 세한도(歲寒圖)와 쌍벽을 이루는 추사 그림의 백미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도 이 시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봉은사(奉恩寺) 판전에 걸려 있는 현판 글씨 ‘판전(版殿)’ 또한 이때 쓴 걸작이다. 추사도 자신이 쓴 편액 중에 스스로 잘 썼다고 했을 정도다. 이 걸작은 서거 3일 전에 쓴 것으로 전해진다. 이밖에도 과지초당에서 수많은 시문과 글씨를 남겼다. 모두가 원숙한 달관의 경지에 이른 것들로 평가받고 있다.

추사가 말년을 보낸 과천에 그를 기념하는 <추사박물관>이 오늘(3일) 문을 연다. 그리고 박물관에는 추사 서신 3종 23통을 비롯해 추사의 금석문 연구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 여조인영서(與趙寅永書), 송자하입연시(送紫霞入燕詩), 추사 옹방강 필담서(秋史 翁方綱 筆談書), 경설합벽(經說合璧), 연경실집( 經室集) 등 1만5천여점의 찬란한 진품 유물이 전시된다.

박물관이 우리 곁에 있게 된 것은 일본인 학자 후지츠카 츠카시(藤塚隣)와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 부자의 공이 가장 크다. 평생 추사연구에 매진 해온 후지츠카 츠카시씨와 아버지가 수집한 1만4천500여점의 소장품을 기증한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씨가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할 일이었기에 그렇다.

과천시는 2006년 이들로부터 소장품을 기증받았다. 일본인이며 작고했지만 아직도 추사연구의 1인자로 꼽히는 후지츠카 츠카시씨는 일본 패망 직전 자신을 찾아와 설득한 추사 연구가 손재형 선생에게 소장하고 있던 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를 넘긴 이로도 유명하다. 때문에 박물관에는 추사작품 상설전시실과 함께 후지츠카 가문의 소장품 등을 전시하는 전시실도 따로 만들었다.

후세로서 창피(猖披)를 느끼며, 또 한편으론 당대 최고의 문인학자며 추사체를 창출한 서예 거장(巨匠)의 모든 것을 항상 볼 수 있게 돼 행복과 설렘이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