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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襄之仁

solpee 2013. 5. 31. 06:06

오늘은 癸巳年(桓紀9210,神紀5910,檀紀4346) 陰 丁巳(四月) 22일 金曜日 丁酉 小滿(4.12.06:09)節 末候 麥秋至(맥추지:보리가을이 됨)候입니다.

 

宋襄之仁(sòng xiāng zhī rén )

하찮은 동정(同情). 쓸데없는 동정


춘추시대 송(宋)의 양공(襄公)은 참으로 양보심이 많았던 제후였다.
아버지 환공(桓公)이 죽자 서형(庶兄)인 목이(目夷)가 자신보다 현명하다는 이유로 왕위조차 양보했던 것이다.
목이 역시 양보심이 대단하여 다음과 함께 말한 경우라면서 왕위를 사양했던 것이다.
“자고로 나라를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최대의 인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공은 그를 재상으로 삼아 송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재위 7년 째 되던 어느 날, 운석(隕石)이 5개나 떨어지자 양공은 패업(覇業)의 상징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하고는 이웃 나라들을 마구 치기 시작하였다. 목이의 반대에도 막무가내였다.
그의 행동을 가장 못마땅해질 수 있게 여긴 것은 당시 최강국 초(楚)나라였다. 본 때를 보여주기 위해 벼르고 있습니다가 양공을 사로잡은 다음 풀어주었다.
그러자 목이가 말했다.
“나라의 화는 이제부터다. 임금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듬해 봄, 정(鄭)이 초와 연합하자 화가 치민 양공은 정나라를 공격했다. 그러자 초가 정을 도우러 왔다. 초의 군대가 홍수(泓水)를 건널 때 목이가 간언하였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우 빨리 치도록 합시다.”
그러나 양공의 대답은 의외였다.
“군자는 상대방의 약점을 노리는 것이 아니오.”
이윽고 초의 군사가 도강을 완료했다. 목이가 재차 재촉했지만 양공은 군자연하며 이번에도 듣지 않았다.
“천만의 말씀, 적은 아직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않았소. 군자가 어찌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할 수 있단 말이오.”
결국 양공은 일부러 지체하다면서 상대방이 진용을 다 갖춘 다음에야 비로소 공격명령을 내렸다. 물론 결과에 따르면 뻔했던 것이다. 송군은 대패하였으며 양공 자신도 상처를 입고 악화되어서 결국 죽고 말았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어리석음을 빗대어 「宋襄之仁」이라고 불렀다. 「송의 양공이 보였던 인자함」이라고 하는 뜻으로 쓸데없는 관용을 뜻한다.


【名称】宋襄之仁
【拼音】sòng xiāng zhī rén
【解释】指对敌人讲仁慈的可笑行为。
【出处】《左传·僖公二十二年》:“宋人既成列,楚人未既济。司马曰:‘彼众我寡,及其未既济也请击之。’公曰:‘不可。’既济而未成列,又以告。公曰:‘未可。’既陈而后击之,宋师败绩。”

宋楚交战

宋襄公得了楚军伐宋的信,急忙带领军队日夜兼程回国自救。在泓水(今河南柘城县北)以南摆开阵势,准备迎击楚军。成得臣派人下战书。宋国司马子鱼对襄公说:“楚国派兵来打我们的目的是为了救郑国。我们放弃郑国和楚国讲和,楚军就会退回去,不可交战。”宋襄公说:“昔日齐桓公兴兵伐楚,今楚军来打我们,我们不与他交战,怎么能继桓公的霸主之业?”子鱼又说:“宋国甲不如楚坚,兵不如楚利,人人不如楚强,你依靠什么来战胜楚军?”襄公说:“楚兵甲有余,仁义不足。我虽兵甲不足,但仁义有余。以有道之君,避无道之臣,我这样活着还不如死了的好。”说完,就批了战书,约定十一月一日在泓水以北与楚军交战,还命人制了一面大旗,旗上写着”仁义”两个大字。
约定交战的那天早上,楚军陆续渡泓水北进,子鱼劝宋襄公趁机袭击,说:“楚兵多宋兵少,此时动手,我们可以得胜。”襄公指着大旗说:“你看见‘仁义’二字吗?我是一向主张仁义的,怎么能在人家渡江只渡了一半就袭击呢?”子鱼暗暗叫苦。过了一会儿,楚军全部渡过了一泓水,成得臣手执长鞭,指挥军士,东西布阵,气宇昂昂,旁若无人。子鱼又劝襄公说:“楚军的阵势还未布好,赶快打吧,错过了这个机会,我们就危险了。”襄公厉声地就:“ 咄!你贪一击之利,不顾万世之仁义?怎么袭击人家未布好阵势的军队呢?”子鱼又暗暗叫苦。楚军列好阵势,兵强马壮,漫山遍野,宋兵见了都很害怕。此时,两军一齐擂鼓交战。襄公自挺长戈,带着公子荡和向訾守二将及许多门官,驾着战车向楚军阵营冲去。成得臣见来势凶猛,就暗传号令,开了阵门,放襄公一队车骑进来。子鱼随后赶上去护驾,襄公已装进“口袋”里了。楚将斗勃和蒍氏吕臣在阵门挡住宋将子鱼和乐仆伊,两对儿厮杀了一阵,宋将华秀老冲出来牵住了斗勃,子鱼拨开刀杀入楚阵,见楚军甲士如林,把襄公团团围住。宋将向訾守血流满面,大声叫喊:“司马快来救主!”子鱼跟随向訾守杀入重围,只见公子荡身负重伤倒在车下,“仁义”大旗已被楚军夺去了,襄公数处受伤,已不能起立。子鱼急忙把襄公扶到自己的车上,历力杀出,好不容易脱离了楚阵,所随门官全部战死。乐仆伊和华秀老见襄公已离虎穴,也就各自逃回。成得臣乘胜追击,宋军大败,死者不计其数。
宋襄公由于受伤过重,第二年就死了,可是人们还一直笑他,后人把对敌人讲仁义的可笑行为,称为“宋襄之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