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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後送傘(우후송산)

solpee 2013. 5. 1. 05:48

오늘은 癸巳年(桓紀9210,神紀5910,檀紀4346) 陰 丙辰(三月) 22일 水曜日 丁卯 穀雨(4.20.07:03)節 末候 戴勝降於桑(대승강어상:뻐꾸기가 뽕나무에 앉는다)候입니다. 小寒에서 穀雨까지 부는 妬花風(투화풍;꽃샘바람) 중에서 마지막 바람인 棟花風(동화풍;나리꽃)이 부는 候이기도 합니다.

 

雨後送傘(우후송산)yǔ hòu sòng sǎn

비 그친 뒤 우산 보내기

 

                                                             근당의고전

 

비가 오고 난 뒤에 우산을 보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괜히 안 해도 될 일을 해서 정력과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주의 섞인 말이다.

사향노루가 배꼽(향주머니) 때문에 사냥꾼에게 잡힌 줄 알고 배꼽을 물어뜯으려 해도 이미 때가 늦었다는 말로, 숨은 뜻이 있어도 일을 그르친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즉, 사향노루는 배꼽에 향주머니가 있는데 죽기 전에 반드시 배꼽을 뜯어먹어 버린다. 그래서 사향의 값이 그토록 비싼 것이다.

몇십년 전만해도 유명필방에 들르면 사향(麝香)먹의 향기가 진동을 했는데 지금은 인조사향을 쓴다하니 사향노루의 향을 맡을 수가 없다.

고급 먹을 만드는 일본에서는 진짜 사향을 넣어 만드는데, 그 값이 우리 먹값의 10배에 이른다.

망아지 잃고 외양간 고쳐서는(失馬治廐) 안 되며, 목이 바짝 마른 다음에 우물을 파려는 우를 범하며 사는 그런 인생이 있다면 삶은 참으로 피곤하고 괴로울 것이다.

 

【典故】: 比喻事后献殷勤。也比喻帮助不及时。

【出处】:二月河《康熙大帝》第四卷五十三:“不见不见,前些日子朕要死不活的时候,别的阿哥都在这儿侍候,偏偏他[八阿哥]和朕一块病了,如今朕刚回过神儿来,他也好了。雨后送伞,献的哪门子假殷勤呢?”

 

☞.失馬治廐

 

[出典] 순오지(旬五志)

[解義] 순오지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神祀後鳴岳 言後於事 失馬治廐 言 亡羊補圈之類(신사후명악 언후어사 실마치구 언 망양보권지류)."
"굿 뒷날 장구 친다는 말은 일이 다 끝난 뒤에 슬데없는 짓을 하는 것을 일컬음이요, 말[馬]을 잃고 마굿간 고친다는 말은 양(羊)을 잃어버린 뒤, 우리를 손질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외에도 어떤일이 다 끝난 뒤, 곧 적당한 때를 잃고 어떤 사고를 당한 후에야 허둥허둥 뒤늦게 행동할 때 쓰는 속언들이 많다.

"늦은 밥 먹고 파장(罷場)간다."
"열흘날 잔치에 열하룻날 병풍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失牛治廐)."
"사후 청심환(死後 淸心丸)."
"사후 약방문(死後 藥方文)."
"망자계치(亡子計齒〈齡〉)."

"성복(成服) 뒤에 약방문."이라는 말들이 바로 그러하다.

" 하루 물림이 열흘 간다." 는 속언은 한번 어떤 일을 연기하기 시작하면 오래 끌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또 "섣달이 둘이라도 시원치 않다." 는 말처럼 아무리 일을 미루고 미루어도 지금 처리하는 것보다 일이 더 잘될 가능성은 거의 보이지 않는 법이다.

"단 솥에 물 붓는 격"으로 모든 일이라는 것이 형편이 이미 기울어져 버리면 어떻게 도울 수도, 수습할 수도 없음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일이 발생하기 이전에 이에 근본적으로 대처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이 그만큼 중요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불학지인(不學之人)

                                                          정민의 세설신어

 

한 대기업 임원의 비행기 난동으로 시끄러웠다. 눈에 뵈는 것 없이 멋대로 행동한 안하무인의 얘기를 듣다 보니 그런 상사에게 날마다 시달렸을 그의 부하 직원들이나 하도급업체 사람들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성대중(成大中)은 귀해졌다고 교만을 떨고, 힘 좋다고 제멋대로 구는 것은 다 못 배운 사람(不學之人)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제 힘만 믿고 교만 떨며 함부로 굴다가 급전직하 나락으로 떨어진 뒤에는 후회해도 때가 늦다.

1606년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사신을 보내 통신(通信)의 화호(和好)를 요청하면서 임진왜란은 자기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조선 정부는 첨지(僉知) 전계신(全繼信)에게 답서를 쓰게 해 일본이 선왕의 이릉(二陵)을 파헤친 만행을 따졌다. 이에야스는 범인이라며 왜인 둘을 잡아 사신과 함께 보냈다. 임금은 즉각 둘의 목을 베어 저자에 매달았다. 하지만 그들은 고작 스무 살 남짓의 젊은 자로, 임진년 당시 너무 어려 결코 범인일 수가 없었다. 시늉이나 하겠다는 수작이었다. 이정구(李廷龜)는 왜인들의 거짓 범인 인계를 믿을 수 없으니 이 일로 종묘에 고해 하례할 수 없다고 따졌다.

이듬해 봄 조선은 여우길(呂祐吉) 등을 통신사로 보냈다. 이덕형(李德馨)이 전별 시에서 읊었다. '신하 되어 능침(陵寢) 치욕 여태 씻지 못했는데, 편지가 제 먼저 오랑캐 땅 들어가네(臣子未湔陵寢辱 看書先入犬羊天).' 윤안성(尹安性)도 시를 썼다. '회답사란 이름 달고 어딜 향해 가는가. 오늘 와서 교린이라 나는 알지 못하겠네. 한강의 강가에서 시험 삼아 바라보라. 이릉의 송백에는 여태 가지 안 난다네(使名回答向何之 今日交隣我未知 試到漢江江上望 二陵松栢不生枝).' 치욕이 여태 생생한데, 교린이 무엇이고 회답이 웬 말이냐는 것이었다. '송천필담(松泉筆談)'에 나온다.

안 되겠다 싶으면 납작 엎드렸다가, 틈만 나면 궤변으로 도발하는 것은 일본인의 못된 버릇이다. 침략이란 개념은 해석하기 나름이니 미안하지만 예전 총리가 미안하다고 했던 말을 거두겠다고 한다. 전범이 아니라 순국선열을 참배하는 것인데 상관 말라고 한다. 어쩔 건데 하며 해볼 테면 해보잔다. 비행기에서 난동 부린 임원이나 망언을 일삼는 일본 총리나 다 못 배운 탓이다. 가르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