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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9일 오전 05:36

solpee 2013. 3. 19. 05:37

오늘은 癸巳年(桓紀9210,神紀5910,檀紀4346) 陰 乙卯(2) 初八(여드레)日 火曜日 甲申 驚蟄(19:15)節 末候 鷹化爲鳩(응화위구:매가 비둘기로 변하다)候 끝날입니다. 小寒에서 穀雨까지 부는 妬花風(투화풍;꽃샘바람) 중에서 薔薇風(장미풍;장미꽃 바람)이 부는 候이기도 합니다.

 

☞. 志在高山 心如大海

뜻은 높은 산과 같이 크게 가지고, 마음은 큰 바다와 같이 넓게 가져라.

 

☞.志鐵心鏡(지철심경)

의지는 쇠와 같이 마음은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게 "무릇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자기의 뜻을 펴나가기를 의지 굳게 다지며 한점 부끄럼 없는 삶으로 자신의 삶을 거울에 비쳐 보고 마음을 다스려 밝게 그리고 행동은 부드럽게, 유연하게 라는 뜻입니다."

 

有志竟成(유지경성)

 

뜻이 있어 마침내 이루어내다. '뜻이 있어 마침내 이루다'라는 뜻으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 

 

 

중국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와 수하 장수 경엄(耿弇)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지자사경성(成有志者)이라고도 한다.

 경엄은 원래 선비였는데, 무관들이 말을 타고 칼을 쓰며 무용을 자랑하는 광경을 뒤로 자신도 장차 대장군되어 공을 세우고자 마음먹었다.

나중에 劉秀(유수:훗날의 광무제)가 병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그의 수하가 된 뒤로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경엄이 유수의 명을 받고 장보(張步)의 군대를 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장보의 군대는 전력이 상당히 두터워 공략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장보는 요처에 병사들을 배치하고 경엄을 맞아 싸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세에 몰렸다.

이에 장보가 직접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공격하였다.

어지럽게 싸우는 가운데 경엄은 적군의 화살을 다리에 맞아 피가 철철 흐르고 통증도 심하였다. 그러자 경엄의 부하가 잠시 퇴각한 뒤에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공격하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경엄은 "승리하여 술과 안주를 갖추어 주상을 영접하여야 마땅하거늘,
어찌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주상께 골칫거리를 남겨 드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장보를 공격하였다. 장보는 마침내 패하여 도망쳤다.

유수는 경엄이 부상을 당하고서도 분전하여 적을 물리친 것을 알고 매우 기뻐하였다.
유수는 경엄을 칭찬하여 "장군이 전에 남양에서 천하를 얻을 큰 계책을 건의할 때는 아득하여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뜻이 있는 자는 마침내 성공하는구려

(將軍前在南陽, 健此大策, 常以爲落落難合, 有志者事竟成也)"라고 말하였다.

이 고사는 《후한서(後漢書)》의 〈경엄전〉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유지경성[有志竟成]은 뜻을 올바르게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성취할 수 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cn

☞.cnf☞.东汉时,耿龠是汉光武帝刘秀手下的一员名将。有一回,刘秀派他去攻打地方豪强张步,战斗非常激烈。后来,耿龠的大腿被一支飞箭射中,他抽出佩剑把箭砍断,又继续战斗,

终于把敌人打得大败。汉光武帝表扬了耿龠。并且感慨地对他说:“将军以前在南阳时提出攻打张步、平定山东一带,
当初还觉得计划太大,担心难于实现。现在我才知道,有志气的人,事情终归是能成功的。”
汉光武帝讲的“有志者事竟成”一句,后来常被人们引用,成了成语。
志者事竟成也。——《后汉书·耿传》

 

 

적습양덕(積習養德)

                                                  황종택 녹명문화연구소장


진한 우정을 나타내는 이야기는 참으로 많다. 단단하기가 황금 같고 아름답기가 난초 향기 짙은 사귐이라는 뜻의 ‘금란지교(金蘭之交)’, 간과 쓸개를 서로에게 내보일 정도로 친근하다는 ‘간담상조(肝膽相照)’, 거스르지 않는 친구를 뜻하는 ‘막역지우(莫逆之友)’, 물과 물고기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귐이라는 ‘수어지교(水魚之交)’, 관중과 포숙처럼 깊이 배려하고 도움을 주는 ‘관포지교(管鮑之交)’, 자신의 목을 베어 줄 수 있을 만큼 소중한 벗이라는 ‘문경지교(刎頸之交)’, 자기를 알아주는 절친한 벗의 죽음을 슬퍼하는 ‘백아절현(伯牙絶絃)’까지 셀 수 없을 정도다.

모두 애틋하고 깊은 유래가 있다. 예컨대 ‘사기 관안열전(史記 管晏列傳)’에 따르면 중국 제(齊)나라에서 포숙은 자본을 대고 관중은 경영을 담당해 동업했으나 관중이 이익금을 독차지했다. 그런데도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가난한 탓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했다. 함께 전쟁에 나아가서는 관중이 세 번이나 도망쳤는데도 포숙은 그를 비겁자라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변명해 주었다. 훗날 ‘관자(管子)’로 불릴 만큼 훌륭한 재상이 된 관중은 “나를 낳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아는 이는 오직 포숙뿐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며 공을 포숙에게 돌렸다. 역사가들은 친구를 위해 한없는 우정을 보인 포숙의 덕망을 높이 칭송하고 있다.

한데 친구 간 안타까운 일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 고등학생이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또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이다. 동급생들에 의한 왕따와 폭력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초중고교를 가리지 않고 벌어진 지 오래다. 학교와 당국, 사회, 가정이 힘을 합해 사전방지에 나설 때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심성을 곱게 하는 교육에 힘써야겠다. 순자는 ‘학습을 통해 주변을 배려하는 덕을 쌓게 해야 한다(積習養德)’며 “배우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를 알지 못한다(人生不學不知道)”고 역설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