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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일 오전 05:39

solpee 2013. 3. 1. 05:39

오늘은 癸巳年(桓紀9210,神紀5910,檀紀4346) 陰 甲寅月(1) 20日 金曜日 丙寅 三一節이자 雨水(21:01)節 末候 草木萌動(초목맹동:초목이 싹트기 시작한다)候입니다. 小寒에서 穀雨까지 부는 妬花風(투화풍;꽃샘바람) 중에서 李花風(이화풍;자두〈오얏〉나무꽃 바람)이 부는 候이기도 합니다.

간송사군자전'11

 이번 2011 봄 전시회 주제는 사군자(四君子).

 

사군자(四君子)를 치는 것은 공부하는 선비의 여기(餘技)같이 여겨 왔고,

전문적 기술보다는 문기(文氣)와 서권기(書卷氣)를 중요시 한다.

그래서인지 이번 전시회 작가리스트는 마치 조선 후기 명사록(名士錄) 같다.

 

이덕형, 허목, 김조순, 김정희, 대원군, 민영익 등 사대부에

화원으로 어몽룡, 김홍도, 심사정, 이인상, 허유(소치), 안중식, 김규진 등등

 

사대부들 면면을 보니 남인(南人)은 별로 없고, 전부 노론(老論)계통이다.

 

왜 그럴까 생각하니, 서화 골동에 취미를 가지려면

아무래도 먹고 사는 게 넉넉해야 하는데

찬밥 먹던 남인보다야 정권 잡은 노론이 여유가 있었을 것이고,

또 문화란 중앙과 지방의 차이가 나게 마련인데,

영남이 중심인 남인보다야 서울 살던 노론들 안목이 높았을 것이다.

 

아 전시회 작품 중 남인 미수 허목(眉壽 許穆) 그림이 있지만

그는 영남이 아니라 기호남인(畿湖南人)이었다.

 

평일 오전 한가한 시간을 골라 갔음에도 미술관은 꽤 붐볐다.

먼저 이층으로 올라가니 가장 눈에 뜨인 것이 심사정의 월매도 였다.

 

 

매화와 달이 뜰에 가득하다(梅月滿庭)

 

 

 

심사정(沈師正 1707-1769), 매월만정(梅月滿庭)

지본수묵(紙本水墨), 47.1x27.5cm

 

이 그림이 왜 좋았는지는 묻지 말기를.

설명할 실력 없으니까.

다만 구도, 분위기와 부드러우면서도 힘을 느꼈다.

 

이번 전시회에서 보니, 사군자는 사대부들도 즐겨 했지만

뛰어난 작품은 역시 전문 화원(畵員) 쪽이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분명히 있는 것이다.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은 스스로 문인(文人)을 자처했지만,

화원(畵員)쪽으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2층을 대강 보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간송은 2층보다 1층에 좋은 작품이 대부분 있다.

 

그러다 보니 2층은 비교적 한가(?)한데, 1층은 가득 찼다.

감상하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데,

작품 넣은 유리창 앞에 머리 대고 다닥다닥 붙어 있다.

 

또 수첩 꺼내 놓고 뭘 자꾸 적는 사람에,

핸폰 꺼내서 힐끔힐끔 눈치 봐가며 한 컷씩 찍는 사람도 있다.

 

그거 다 도록(圖錄)에 나오는 데.

전시회 제대로 보자면 도록 사야 한다.

기껏 거기까지 가서 그 돈 아낄 일이 아니다.

 

 

어몽룡의 묵매(墨梅)

 

 

어몽룡(魚夢龍: 1566-?) 묵매(墨梅)

견본수묵(絹本水墨), 13.5x20.3cm

 

왼쪽에 적힌 글씨 해석은 다음과 같다.

 

종일심춘불견춘 (終日尋春不見春)

종일 봄을 찾았으나 봄은 보지 못하고

 

망혜답파영두운 (芒鞋踏破嶺頭雲)

짚신 신고 고갯마루 구름만 밟았네

 

귀래소연매화후 (歸來撚梅花嗅)

돌아오다 우스개로 매화냄새 비벼보니

 

춘재지두이십분 (春在枝頭已十分)

봄은 가지 끝에 이미 가득 와 있네

 

 

어몽룡은 조선 중기 최고의 묵매화가로 꼽힌다.

그러나 용산 국박에 있는 월매(月梅)는 뛰어나지만,

간송에 있는 그림만 가지고는, 현재 심사정에 비하여 못하다는 느낌이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어몽룡의 월매(月梅)

견본수묵(絹本水墨), 119.2x53cm, 조선 묵매 중 최고라고 꼽힌다.

 

 

 

조속(趙涑)의 묵매(墨梅)

 

 

조속(趙涑), 묵매(墨梅)

지본수묵(紙本水墨), 20.21x25.4cm

 

그림보다, 조속(趙涑: 1595-1668)-그 인간에 흥미가 간다.

 

창강 조속(滄江 趙涑)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였다.

인조 반정이 잘한 짓이냐, 못한 짓이냐를 떠나서

쿠데타가 성공했으니 당연히 한 자리 노릴 만 한데,

다 집어 치우고 학문과 그림에 정진(精進)하였다.

 

한국 현대정치사 보아 온 사람들은

이러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정권 잡은 그날부터 서로 밥그릇 차지하겠다고,

어제의 동지들끼리 대가리 쌈 나지 않나?

 

 

 

과연 추사(秋史)!

 

 

전시회를 보아 나가다가 아 이건 정말! 하고

감탄이 절로 나는 것은 추사(秋史)의 작품이었다.

 

다른 작품들을 다 보고 난 뒤 추사 앞에 오니,

이것이 바로 최고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김정희(金正喜), 산상난화(山上蘭花)

지본수묵(紙本水墨), 27.0x22.8cm

 

 

앞서 말한 문기(文氣), 서권기(書卷氣)니는 추사가 무지 강조하던 사항이다.

위 추사의 난에서 뭘 느낀다면 그게 바로 문기(文氣), 서권기(書卷氣) 아닐까?

 

 

김정희(金正喜), 염화취실(斂華就實: 꽃을 거두고 열매를 맺다)

지본수묵(紙本水墨), 27.0x22.8cm

 

군더더기 하나 없이 오직 골기(骨氣)만 남은 것이

추사의 다른 작품 세한도(歲寒圖)에서 받은 느낌 그대로다.

 

 

  

김정희(金正喜), 증청람란(贈晴嵐蘭: 청람에게 드리는 란)

지본수묵(紙本水墨), 47.5x18cm

 

()이나 서예(書藝)나 기술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

추사가 이런 훌륭한 작품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민영익(閔泳翊)의 란()

 

 

내 보기에 전시회에서 추사 다음으로 훌륭한 것은 민영익의 란()이었다.

 

 

민영익(閔泳翊 : 1860-1914), 묵란(墨蘭)

지본수묵(紙本水墨), 58.0x31.0cm

 

 

민영익의 난()이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나 민비(閔妃)네 친정 인물들을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아,

뭐 그리 대단할라구 여겼는데, 실물을 보니 아주 훌륭하다.

 

 

민영익은 양자(養子)지만, 민비(閔妃)의 친정 조카다.

그러니까 민태호가 민비의 양오빠(민비 아버지의 양자),

민영익은 다시 그 민태호의 양자로 들어갔다.

 

양자의 또 양자라면 요즘 관념으로는 별거 아니다 할지 몰라도,

조선 시대는 배분(輩分)이 정해지면 혈손, 양손 구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디엔에이 흐름 따위보다는 사회적으로 정한 명분 우선이었다.

 

민영익은 민비의 친정조카로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곧 민씨 세도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조선 말기 역사를 읽다 보면 민비(閔妃)와 그 친정 행태에 짜증이 난다.

뭐 그렇지만 조선이 오로지 민씨네 때문에 망한 것은 아니고,

또 민씨 중에도 충정공 민영환(忠正公 閔泳煥) 같은 인물도 있다.

그리고 영익은 민씨 중에서 그렇게 저질은 아니었다.

 

민영익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당(開化黨)에게 한칼 맞고 간신히

살아나기도 하다가, 을사보호 조약 때 망명하여 조선에 돌아오지 않다가,

1914년 상해에서 죽는다.

 

 

민영익(閔泳翊), 묵란(墨蘭)

지본수묵(紙本水墨), 58.0x31.0cm

 

 

 

 

석파란(石坡蘭)

 

석파(石坡)는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의 호다.

대원군은 추사에게서 배웠는데 그 난-석파란은 유명하다.

그러나 이번에 실물을 보니, 추사나 민영익에 비교한다면

아무래도 한 수 아래인 느낌이다.

 

 

 

이하응(李昰應: 1820-1898), 묵란(墨蘭)

지본수묵(紙本水墨), 37.8x27.3cm

 

 

왼쪽 글씨 동심지언 기취여란(同心之言 其臭如蘭)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의 말은 그 향기가 난과 같네

라는 뜻으로 주역 계사전(周易 繫辭傳)에 나온다고 한다.

 

 

 

허소치(許小癡)의 묵매(墨梅)

 

 

허유(許維) 묵매(墨梅)

지본수묵(紙本水墨), 30.5x24.7cm

 

소치 허유(小癡 許維: 1809-1892)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는 이런 사람이 없다 라는 극찬을 들은 바 있다.

 

위 매화는 매우 화려한 것이 소치의 다른 그림과 상통한다.

그러나 추사가 그렇게 강조했던 문기(文氣), 서권기(書卷氣)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물론 내 느낌이 그렇다는 것으로 아님 말고다.

 

 

 

허목(許穆)의 월야삼청(月夜三淸)

 

 

허목(許穆), 월야삼청(月夜三淸)

지본수묵(紙本水墨), 42.2x32.5cm

 

삼청(三淸)하니까 삼청교육대 떠 올리는 사람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삼청이란 달밤의 세 가지 맑음(), 곧 송(), (), ()이다.

 

화원(畵員)말고 문인(文人)의 그림으로는 (추사야 워낙 특이하니 빼고)

이 미수 허목(眉壽 許穆: 1595-1682)의 작품이 가장 훌륭한 듯 하다.

 

 

 

김조순(金祖淳)의 묵죽(墨竹)

 

 

 

김조순(金祖淳) 묵죽(墨竹)

지본수묵(紙本水墨), 47.0x36.8cm

 

안동 김씨는 원래 삼한갑족(三韓甲族)이다.

그 유명한 척화대신 선원 김상용, 청음 상헌 형제 이후 노론의 중심,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정조(正祖)의 사돈,

곧 순조(純祖)의 장인이 되니, 이후 60년 세도를 누린다.

따라서 김조순은 그 안동 김씨 세도의 핵심 중 핵심이다.

안동 김씨 중 이 일파는 서울 장동(壯洞)에 살아 장동 김씨라고도 불린다.

 

옛날 권력자들은 당대 제일의 교양인(敎養人)이었다.

따라서 김조순의 위 그림도 범상하지는 않을 텐데

워낙 뛰어난 사람들 작품 옆에 있으니 아마추어 티가 난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의 그림도 있으나

역시 대가들에 비교하니 기량차이가 완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