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唯才是用[유재시용].

solpee 2013. 1. 23. 06:16

오늘은 壬辰年(단기4346) 癸丑月(12) 十二日 水曜日 己丑 大寒節(06:52) 初候 鷄始乳(닭이 알을 품기 시작하는 시기) 네째날이다.

 

唯才是用[유재시용].



“才”는 “人才”이고 “擧”는 “薦擧(천거)”의 意味로 “唯才是擧(유재시거)”와 同義語다. 能力이 빼어난 사람만을 優待한다는 曹操의 人才經營原則이다. 그의 麾下(휘하)에서 90여 명의 蓋世之才(개세지재)가 活動할 수 있었던 것도 다음과 같은 原則 때문이었다.

“만일 반드시 淸廉한 선비가 있어야만 起用할 수 있다면, 齊나라 桓公(환공)은 어떻게 天下를 制覇(제패)할 수 있었는가! 지금 天下에 襤褸(남루)한 옷을 걸치고 眞情한 學識이 있는데도 呂尙(여상:강태공)처럼 渭水의 물가에서 낚시질이나 일삼는 자가 어찌 없겠는가? 또 兄嫂(형수)와 私通하고 賂物을 받았다는 陋名(누명)을 쓰는 바람에 魏無知(위무지)의 推薦을 받지 못한 陳平(진평)과 같은 자가 어찌 없겠는가? 여러분은 나를 도와 낮은 地位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 推薦하라. 오직 才能만이 推薦의 基準이다. 나는 才能 있는 사람을 起用할 것이다.”

“三國志” 武帝紀에 引用된 求賢令

여기서 擧論된 桓公이나 陳平은 빼어난 能力 때문에 重用돼 能力을 充分히 發揮할 수 있었고 主君을 도와 큰일을 이뤘다. 曹操가 내세운 原則은 周圍의 評判이나 道德性보다는 才能이 重要하다는 것이다.

 

이는 勝者와 敗者, 아니 國家의 存亡이 左右되는 當時 時代的 常況에서는 어쩔 수 없는 選擇인지도 모른다. 冷酷(냉혹)한 勝負士로서 죽기 직전까지 戰場을 누볐던 曹操. 그가 宦官(환관: 원래 河厚氏[하후씨]인 아버지가 환관인 曹氏의 養子로 入養 되었음) 出身의 非主流로서 北方의 權門勢族 袁紹(원소)를 이겨 自身의 時代를 열었고, 아들 曹丕(조비)에 의해 魏나라 創業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能力과 效率 中心의 人才觀을 堅持(견지)했기에 可能했다.

 

물론 問題도 있었다. 自身의 權威에 挑戰하는 反對派들을 無理하게 除去하거나 엄뚱한 罪目으로 處罰하였으며(代表的 境遇가 우리가 잘알고 있는 故事成語 “鷄肋(계륵: 나에게 별소용이 없어나 버리기는 아까움)”의 主人 公인 梁修(양수)처럼 軍糧米를 橫領했다는 얼토당토 않는 罪로 斬刑을 했음) 後繼者 問題로 對立角을 세운 天下의 謀士 荀彧(순욱)을 除去한 것 등 그의 人才觀에서 玉의 티도 볼 수 있어 亦是 그도 偉大한 聖人이 아니며 亂世의 奸雄임에 틀림이 없다.


自古受命及中兴之君,曷尝不得贤人君子与之共治天下者乎?及其得贤也,曾不出闾巷,岂幸相遇哉?上之人求取之耳。今天下尚未定,此特求贤之急时也。“孟公绰为赵、魏老则优,不可以为滕、薛大夫。”若必廉士而后可用,则齐桓其何以霸世!今天下得无有被褐怀玉而钓于渭滨者乎?又得无有盗嫂受金而未遇无知者乎?二三子其佐我明扬仄陋,唯才是举,吾得而用之。

正 曹操为建霸业,定天下,早就认定要有一批能文能武、英勇善战的文臣武将,这样才能站住脚跟,保住地盘。他用人采取的是唯才是举的方针,这是他在建安十五年(公元210年)春发布《求贤令》第一次提出的。

 

他说:"若必廉士而后可用,则齐桓其何以霸世?今天下得无有被褐环而钓于渭滨者乎?又得无盗嫂受金而未遇无知者乎?二三子其佐我明扬仄陋,唯才是举,吾得而用之。

 

"建安十九年和二十二年又先后发表《取士无废短令》、《举贤勿拘品行令》、进一步指出:"夫有行之士,未必能进取,进取之士,未必能有行也。"对有缺点的人主张不能废弃不用,不管是卑贱的,甚至是"不仁不孝"的人,只要有"治国用兵之术"都要推荐。

 

《三国演义》中,通过对曹操用人事迹的描写,把曹操"唯才是举"的用人特点反映的很具体。陈琳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