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趣在法外

solpee 2013. 1. 2. 07:46

趣在法外

붓을 대기 전에 미리 정해야 한다.(意在筆先) 아무 생각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 그러나 막상 일에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겠다’고 마음속에 미리 정한 것도 장애가 된다. 이 순간에는 결국 이것마저도 버려야 한다.

버린다는 것이 곧 비우는 것, 내려놓는 것, 내면에 맡기고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 비로소 어떤 것이 나오는 결정적 순간이다. 그것은 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법 너머의 것(趣在法外)이며, 자연의 것이며, 禪의 세계이며(不二禪), 自得의 경지이며, 추사가 말한 9,999분 다음에 얻은 1(其餘一分)이다.

청나라 때 서화가인 ‘정판교’(鄭燮, 호: 板橋)는 이를 趣(취)라고 한다. 그림뿐만 아니라 세상사가 다 그렇다 한다. 묵죽에 쓴 그의 유명한 화제로, 趣를 논한 글이다.


강가의 객사 맑은 가을날 새벽에 일어나 대나무를 바라보니
안개 젖은 빛과 햇살하며, 이슬 머금은 기운들...
모두가 성근가지 조밀한 댓닢 사이에 서려있었다.
胸中에 뭔가 그리고 싶은 畵意가 생겼는데, 사실 胸中에 일어나 그리고 싶은

대나무는 결코 눈앞에 보이던 그 대나무가 아니었다.
하여 먹을 갈아 종이를 펼쳐 붓을 대니 모습들이 또 변하여
종이에 나타난 대나무(手中之竹)는 또한 조금 전에 그리고 싶던 그 胸中의 竹이 아니었다.

요컨대 意在筆先(쓰기 전에 미리 생각해야 한다)이라하는 것도 일종의 法일 뿐, 法 너머에 있는 것을 趣라 하니 (趣在法外) 이것이 바로 化의 기틀이 된다. 어찌 그림만 그렇다고 하겠는가? 鄭燮 「鄭板橋全集」 <竹>


江館淸秋 晨起看竹 煙光日影露氣
皆浮動于 疎枝密葉之間
胸中勃勃 遂有畵意
其實 胸中有竹 幷不是 眼中之竹也
因而磨墨展紙 落筆倏作變相

手中之竹 又 不是胸中之竹
總之 意在筆先者 定則也 趣在法外者 化機也
獨畵云乎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