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物必先腐以後蟲生

solpee 2012. 11. 20. 20:12

物必先腐以後蟲生(物腐蟲生)

 

중국에서 부정부패가 계속된다면 공산당은 사회동요에 직면하고 권력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고 시진핑(習近平) 신임 공산당 총서기가 17일(현지시간) 취임 후 처음 가진 정치국 집단학습회에서 말했다고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19일 보도했다. 

소동파 소식(蘇軾)은 "범증론(范增論)"이라는 글에서 범증이 항우의 곁을 떠난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며,
"물건이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야 벌레가 거기에 생기게 되는 것이고[物必先腐夜,而後蟲生也(물필선부야,이후충생야)], 사람이란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야 모함이 먹혀 들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人必先疑也, 而後讒入之인필선의야, 이후참입지)."라고 기록하였다.


汉用陈平计,间楚君臣,项羽疑范增与汉有私,稍夺其权。增大怒曰:“天下事大定矣,君王自为之,愿赐骸骨,归卒伍。”未至彭城,疽发背死。
苏子曰:“增之去,善矣。不去,羽必杀增。独恨其不早尔。”然则当以何事去?增劝羽杀沛公,羽不听,终以此失天下,当以是去耶?曰:“否。增之欲杀沛公,人臣之分也;羽之不杀,犹有君人之度也。增曷为以此去哉?《易》曰:‘知几其神乎!’《诗》曰:‘如彼雨雪,先集为霰。’增之去,当于羽杀卿子冠军时也。”
陈涉之得民也,以项燕。项氏之兴也,以立楚怀王孙心;而诸侯之叛之也,以弑义帝。且义帝之立,增为谋主矣。义帝之存亡,岂独为楚之盛衰,亦增之所与同祸福也;未有义帝亡而增独能久存者也。羽之杀卿子冠军也,是弑义帝之兆也。其弑义帝,则疑增之本也,岂必待陈平哉?物必先腐也,而后虫生之;人必先疑也,而后谗入之。陈平虽智,安能闲无疑之主哉?
吾尝论义帝,天下之贤主也。独遣沛公入关,而不遣项羽;识卿子冠军于稠人之中,而擢为上将,不贤而能如是乎?羽既矫杀卿子冠军,义帝必不能堪,非羽弑帝,则帝杀羽,不待智者而后知也。增始劝项梁立义帝,诸侯以此服从。中道而弑之,非增之意也。夫岂独非其意,将必力争而不听也。不用其言,而杀其所立,羽之疑增必自此始矣。  
方羽杀卿子冠军,增与羽比肩而事义帝,君臣之分未定也。为增计者,力能诛羽则诛之,不能则去之,岂不毅然大丈夫也哉?增年七十,合则留,不合即去,不以此明去就之分,而欲依羽以成功,陋矣!虽然,增,高帝之所畏也;增不去,项羽不亡。亦人杰也哉!————
《范增论》苏轼

 

范增論(범증론)

                                                                  소식(蘇軾)

漢用陳平計(한용진평계)하여 間疏楚君臣(간소초군신)하니 項羽疑范增與漢有私(항우의범증여한유사)하여 銷奪其權(소탈기권)이라. 增大怒曰(증대로왈) ; 天下事大定矣(천하사대정의)라.

君王自爲之(군왕자위지)하라. 願賜骸骨歸卒伍(원사해골귀졸오)하노라.

未至彭城(미지팽성)하여 疽發背死(저발배사)하니라.

한나라에서 진평의 계책을 써서 초나라 임금과 신하 사이를 벌어지게 하니,

항우는 범증이 한나라와 개인적으로 통하고 있다고 의심하고는 그의 권리를 조금씩 뺐었다. 범증은 크게 노하여,

“천하의 일은 대체로 결정되었다. 임금께서 자기 멋대로 해 보시라지. 나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물러나 졸개의 신분으로 돌아가고 싶소!” 하고 말하였다.그리하여 돌아가는 길에 팽성(彭城)도 채 못가서 등창이 나서 죽어버렸다.

蘇子曰(소자왈) ; 增之去善矣(증지거선의)라. 不去羽必殺增(불거우필살증)이리라. 獨恨其不蚤耳(독한기불조이)로다. 然則當以何事去(연즉당이하사거)오?

  增勸羽殺沛公(증권우살패공)하되 羽不聽(우불청)하여 終以此失天下(종이차실천하)하니 當於是去邪(당어시거사)아? 曰(왈) ; 否(부)라. 增之欲殺沛公(증지욕살패공)은 人臣之分也(인신지분야)요 羽之不殺(우지불살)은 猶有君人之度也(유유군인지도야)라. 增曷爲以此去哉(증갈위이차거재)리로?

  易曰(역왈) ; 知幾其神乎(지기기신호)인저. 詩曰(시왈) ; 相彼雨雪(상피우설)한대 先集維霰(선집유산)이라. 增之去(증지거)는 當於羽殺卿子冠軍時也(당어우살경자관군시야)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범증이 항우로부터 떠나갔던 일은 잘한 것이다.

  따라가지 않았다면 항우는 반드시 범증을 죽였을 것이다.

  오직 떠나기를 빨리하지 않은 것이 한이 될 따름이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 때 범증은 떠나야만 했었을까?

  범증이 항우에게 유방을 죽이라고 권했을 적에 항우가 말을 듣지 않아 끝내는

  이 때문에 천하를 잃게 되었으니, 마땅히 그 때 떠났어야만 했었을까?

  아니다! 범증이 유방을 죽이고자 했던 것은 신하된 사람으로서의 본분이었고,

  항우가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임금으로서의 도량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범증이 어찌 이 때문에 떠나야만 했겠는가?

<역경>에 이르기를

  “빌미를 안다는 것은 신(神)의 작용이다.” 하였고

  <시경>에 이르기를 “저 눈이 내리는 걸 보라 먼저 습기가 모여 싸락눈으로 내린다.” 하였다. 범증이 떠날 시기는 항우가 의제(義帝)의 장군 송의(宋義)를 죽였을 적이었다.

 

陳涉之得民也(진섭지득민야)는 以項燕扶蘇(이항연부소)라.

  項氏之興也(항씨지흥야)는 立楚懷王孫心(이립초회왕손심)이라.

  而諸侯叛之也(이제후반지야)는 以弑義帝(이시의제)라.

  且義帝之立(차의제지립)에 增爲謀主矣(증위모주의)라.

  義帝之存亡(의제지존망)이 豈獨爲楚之盛衰(기독위초지성쇠)리오?

  亦增之所與同禍福也(역증지소여동화복야)라.

  未有義帝亡而增獨能久存者也(미유의제망이증독능구존자야)라.

  羽之殺卿子冠軍也(우지살경자관군야)는 是弑義帝之兆也(시시의제지조야)라.

  其弑義帝(기시의제)는 則疑增之本也(칙의증지본야)라. 豈必待陳平哉(기필대진평재)리오? 物必先腐也而後(물필선부야이후) 蟲生之(충생지) 人必先疑也而後(인필선의야이후) 讒入之(참입지) 陳平雖智(진평수지) 安能間無疑之主哉(안능간무의지주재)

  진섭이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은 항연과 부소의 덕분이었다.

  항(項)씨가 흥기(興起)한 것은 초(楚) 회왕(懷王)의 손자 심을 옹립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제후들이 항우를 배반한 것은 의제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의제가 왕위에 오른 것은 범증이 주모자였다.

  의제가 살고 죽는 것이 어찌 초나라의 성쇠만을 뜻하겠는가?

 

  또한 범증도 그와 더불어 화복(禍福)을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제가 죽었는데도 범증 만이 오래 잘 살 수는 없는 처지였다.

  항우가 의제의 장군 송의를 죽인다는 것은 바로 의제를 죽이려는 전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의제를 죽인다는 것은 범증을 의심하는 뿌리였던 것이다.

  어찌 반드시 진평의 계책을 기다려야 하겠는가?

 

  물건이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야 벌레가 거기에 생기게 되는 것이고,

  사람이란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야 모함이 먹혀들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진평이 비록 지혜가 많다 하더라도 어찌 의심도 없는 임금을 이간질 할 수가 있었겠는가?

  吾嘗論義帝(오상논의제)는 天下之賢主也(천하지현주야)라.

  獨遣沛公入關而不遣項羽(독견패공입관이불견항우)하고 識卿子冠軍於稠人之中(식경자관군어조인지중)하여 而擢以爲上將(이탁이위상장)이라. 不賢而能如是乎(불현이능여시호)아?

  羽旣矯殺卿子冠軍(우기교살경자관군)이면 義帝必不能堪(의제필불능감)이니 非羽弑帝(비우시제)면 則帝殺羽(칙제살우)는 不待智者而後知也(부대지자이후지야)라. 增始勸項梁立義帝(증시권항양립의제)하니 諸侯以此服從(제후이차복종)이라.

  中道而弑之(중도이시지)는 非增之意也(비증지의야)라. 夫豈獨非其意(부기독비기의)리오? 將必力爭而不聽也(장필역쟁이불청야)리라. 不用其言而殺其所立(불용기언이살기소립)하니 羽之疑增(우지의증)이 必自此始矣(필자차시의)라.

  나는 언젠가 의제는 천하의 현명한 임금이었음을 논하였다.

  그는 오직 유방만을 보내어 함곡관(函谷關)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항우는 들여보내지 않았었으며, 경자관군 송의를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알아보고 그를 상장(上將)으로 발탁했던 사람이다.

  현명하지 않다면 그렇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항우가 송의를 속여서 죽여 버리고 난 뒤에는 의제로서는 반드시 참고만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니, 항우가 의제를 죽이지 않았다면 의제가 항우를 죽였을 것임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범증이 처음에 항양에게 권하여 의제를 임금 자리에 앉히자 제후들은 그 때문에 복종케 되었던 것이다.

  중도에 의제를 죽여 버린 것은 범증의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 그의 뜻이 아닌 것일 따름이겠는가?

반드시 힘써 다투며 막았는데도 말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말은 듣지 않고 그가 옹립하였던 임금을 죽였으니

  항우의 범증에 대한 의심은 반드시 이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方羽殺卿子冠軍(방우살경자관군)에 增與羽比肩而事義帝(증여우비견이사의제)하여 君臣之分(군신지분)이 未定也(미정야)라. 爲增計者(위증계자)는 力能誅羽則誅之(역능주우칙주지)요

  不能則去之(불능칙거지)라. 豈不毅然大丈夫也哉(기불의연대장부야재)리오?

  增年已七十(증년이칠십)이라. 合則留(합칙유)요 不合則去(불합칙거)라.

  不以此時明去就之分(불이차시명거취지분)하고 而欲依羽以成功名(이욕의우이성공명)하니 陋矣(루의)로다.

  雖然(수연)이나 增高帝之所畏也(증고제지소외야)라. 增不去(증불거)면 項羽不亡(항우불망)이라.  嗚呼(오호)라! 增亦人傑也哉(증역인걸야재)인저!

   항우가 송의를 죽였을 적에는 범증은 항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의제를 섬기어, 항우와 범증 사이의 임금과 신하의 구분이 확정되지 않았었다.

  범증을 위한 계책으로는, 항우를 죽일 능력이 있다면 곧 항우를 죽이고, 죽일 능력이 없다면 곧 그로부터 떠나가는 것이라 하겠다. 어찌 그것이 꿋꿋한 대장부가 아니었겠는가?

범증은 그 때 나이 이미 칠십이었다. 뜻이 맞으면 남아있고, 맞지 않는다면 떠나야만 했다.

  그 때에 거취(去就)의 한계를 분명히 하지 않고 항우에 의지하여 공명을 이룩하려하였으니, 비루한 일이었다. 비록 그러하나 범증은 고조(高祖) 유방이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범증이 떠나지 않았다면 항우는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아! 범증도 역시 인걸(人傑)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