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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生也有涯而知也無涯

solpee 2012. 10. 22. 05:32


吾生也有涯而知也無涯(오생야유애이지야무애)
우리의 삶은 언제나 종말이 있으나 지식은 끝이 없다


각자에게 부여된 유한한 삶의 시간동안 끝이 없는 지식을 추구하다 보면 정말 위태롭다 할 것이다. 아니 이미 위태로운데도 스스로 안다고 자처하니 더욱 위험할 수밖에(已而爲知者 殆而已矣).

인간의 생명에는 한계가 있지만 구하려고 하는 지식욕망에는 한계가 없다. 그 무한한 지식욕에 사로잡히면 한정된 생명은 지치고 늘어져 참된 삶을 누릴 수 있는 양생의 방법마저 날리고 만다. 끝이 있음으로써 끝이 없음을 좇으면 위태로울 뿐이다(以有涯隨無涯死).

옛말에 큰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늘 한가롭고 너그럽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성인이나 위인들의 행적이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이웃에서도 지식과 삶을 실천을 통해 여유로움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작은 지혜를 가진 사람은 무슨 일이든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따져드는 차이를 느낄 수가 있다. 자기의 입장을 떠나 올바른 기준을 갖고 남과의 의견을 나눠야 한다. 지식이란 눈으로 옳고 그름만을 따지고 든다면 자연의도는 허물어지고 마는 것이며 성인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의 얕은 재주나 능력을 뽐내는 것을 천박하게 여긴다.

내면의덕이 갖춰져 있는 사람은 겉모습은 잊어버리게 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아름다움이다. 마음이 알찬 사람이 겉치레에 이끌리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리고 삶과 죽음에 애민하지 않고 자연의 순리를 따져 묻지 않는다. 내 삶에 집착을 버리면 죽음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근당 梁澤東(한국서예박물관장)

몽이양정(蒙以養正)
교육으로써 바르게 함

‘예기’는 “배운 연후에 부족함을 알고, 가르쳐 본 후에야 막힘을 알게 된다(學然後知不足 敎然後知困). 막히고 부족함을 알고 나서야 스스로 깨치려 노력하게 되니, 가르치고 배움은 서로 성장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知不足然後 能自反也 故曰 敎學相長也)”라고 경책하고 있다.

물론 교육은 미래세대를 책임지기에 스승이 먼저 올곧아야 한다. 사도(師道)다. ‘주역’에 이르길 “교육으로써 바르게 양성함은 성인의 공덕(蒙以養正 聖功也)”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육이란 자신의 덕을 닦고 그것을 세상에 널리 펴는 성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가치는 이토록 지고지순한 철학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고 하고(天命之謂性), 성에 따름을 도라 하며(率性之謂道),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修道之謂敎)”는 중용의 ‘진리’와 궤를 같이한다.

물론 교육에도 때가 있다. 어릴 시절부터 제대로 시켜야 효과가 있게 마련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선비의 작은 예절이란 뜻의 저서 ‘사소절(士小節)’에서 어린 시절 교육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망아지는 길들이지 않으면 좋은 말이 될 수 없고, 어린 솔은 북돋워 주지 않으면 훌륭한 재목이 되지 못한다. 자식을 두고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내다버림과 같다(生馬之駒 不能調習 不可以爲良驥 穉松之苗 不能培壅 不可以成美材 故有子而不能敎 猶棄之也).”


不求甚解

정독하지 않고 走車看山식 독서-대의만 읽는다

 

‘귀거래사(歸去來辭)’란 시를 보면 농사일을 하는 틈틈이 술에 취해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가 물끄러미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는 식의 풍류를 즐겼다.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이라는 산문은 전기 형식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표현하였는데 해학적인 문투가 일품이다. 물론 선생(先生)은 도연명 자신이다.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선생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그 성과 자도 자세하지 않다./집 주위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 있어/그 호로 삼았다./한가롭고 고요하며 말이 적고/명예와 실리를 도모하지 않았다./독서를 좋아하지만/깊은 해석을 구하지는 않고/뜻 맞는 곳이 있기만 하면/기꺼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다.(先生不知何許人, 亦不詳其姓字. 宅邊有五柳樹, 因以爲號焉. 閑靖少言, 不慕榮利, 好讀書, 不求甚解. 每有意會, 便欣然忘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