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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齋의 書論

solpee 2012. 9. 27. 06:40

裂古破今=坏古破今=探古破今=乘古破今: 古今을 超越함.

 

“군자가 부유하면 덕을 실천하기를 즐겨하고, 소인이 부유하면 자신의 능력에 닿는 일을 한다. 못은 깊어야 고기가 살고, 산은 깊어야 짐승이 오가며, 사람은 부유해야만 인의가 따른다. 부유한 사람이 세력을 얻게 되면 세상에 더욱 드러나게 되고, 세력을 잃으면 빈객들이 갈 곳이 없어져 즐겁게 하지 않는다(君子富, 好行其德, 小人富, 以適其力. 淵深而魚生之, 山深而獸往之, 人富而仁義附焉. 富者得예益彰, 失예則客無所之, 以而不樂·사기 ‘화식열전’).”

石齋의 畵論


‘화초를 그리는 의향이 역시 미술과는 다르다. 그 귀함은 신운(神韻)에 있는 것이요, 모양새를 닮은 데 있지 않다(寫意花卉 亦與美術不同 貴在神韻 不在形似).’

‘난초와 대나무를 그리는 것은 미술을 그리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대개 난초와 대나무는 그 귀함이 문기(文氣)에 있고 형사에 있지 않다. 바로 이는 난죽을 그릴 줄 아는 자와 말할 수 있다(寫蘭竹與寫美術 大有不同處 盖蘭竹 貴在文氣 不在形似 此可與知者道耳).’

‘난초를 그리는 데 법이 있으니 반드시 신기가 있어야 한다(寫蘭多法 須要神氣有餘).’

‘난초를 그리는 것은 비록 조그마한 재주요 하찮은 기예이나 성령을 기를 수 있다(寫蘭雖小技曲藝 可以怡養性靈).’

‘풍죽은 붓을 놀림에 있어 느슨하게 해서는 안된다. 고요히 들으면 마치 소리가 있는 듯해야 비로소 법칙에 부합된다(風竹用筆 尤不可緩 靜廳如有聲 方是合則).’

‘완당노인이 말하기를 시서화는 인품에 따라 높낮이가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참으로 맞는 이야기다. 내 옛 친구 석강은 원래 성품이 호방하고 얽매이지 않는데, 필법도 또한 그렇다. 이는 썩은 나무에 조각한 것이 아니니 가히 비슷하다 하겠다(阮堂老人云 詩書畵以人品有高下焉 至哉斯言 余故友石岡 素賦豪放不羈 筆法亦如之 此非雕蟲篆刻 可以彷彿).’

 

학문적 수양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고결한 품격을 이르는 문자향·서권기는 북송대의 황정견(黃庭堅·1045~1105)과 명대의 동기창(董其昌·1555~1636)의 글에서 유래한다. 황정견은 화가 조영양의 그림에 ‘가슴속에 수백 권의 책이 있게 한다면 마땅히 문여가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다(使胸中有數百卷書 便當不愧文輿可矣)’라는 화제를 남겼다. 문여가(文輿可·1018~1079, 여가는 자이고 이름은 ‘동(同)’)는 북송의 문인이자 서화가로 시문과 글씨, 그림에 뛰어났다.

그리고 동기창은 저서 ‘화안(畵眼)’에서 조영양을 예로 들어 ‘마음속에 만 권의 책을 얻었다면 더욱 기묘했을 것이다(胸中着萬卷書更奇)’라고 했다.

추사는 이 문자향·서권기를 가장 중요시했다.

추사는 아들에게 보낸 글을 통해 ‘예서법은 가슴속에 청고(淸高)하고 고아(古雅)한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손을 통해 나올 수 없고, 가슴속의 청고하고 고아한 뜻은 또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가 들어 있지 않으면 능히 팔 아래 손끝으로 발현시킬 수 없다. 또한 이것은 흔히 보는 해서(楷書)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하여 모름지기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고 나서야 예서법의 근본이 되며 예서 쓰는 신통한 비결이 된다(隸法 非有胸中淸高古雅之意 無以出手 胸中淸高古雅之意 又非有胸中文字香書卷氣 不能現發於腕下指頭 又非如尋常楷書比也 須於胸中 先具文字香書卷氣 爲隸法張本 爲寫隸神訣)’고 강조했다.

그리고 ‘난(蘭) 치는 법은 예서와 가장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춘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 또한 난 치는 법은 화법(畵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으로 한다면 한 번의 붓질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조희룡 등의 무리가 내 난초를 배웠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 가지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그들 가슴속에 문자기가 없었기 때문이다(蘭法亦與隸近 必有文字香書卷氣然後可得 且蘭法最忌畵法 若有畵法 一筆不作可也 如趙熙龍輩學作吾 蘭而終末畵法一路 此其胸中無文字氣故也)’라고 했다.

석재 역시 작품 곳곳에서 이를 강조했다.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가 없으면 끝내 속사(俗師)와 마계를 벗어날 수 없다(胸中無文字香書卷氣 則終未免俗師魔界).’

‘난초를 그리는 데는 신운(神韻)과 생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배우는 자는 먼저 가슴속에 오천 권의 책을 쌓고, 팔에 금강 같은 힘을 기른 뒤라야 비로소 더불어 난초를 말할 수 있다(寫蘭有神來氣來處 學此者 先有胸中五千卷 腕下金剛然後 始可與語蘭).’

‘동파(東坡) 노인은 일찌기 문여가와 더불어 대나무 그리는 법을 논하기를, 그대는 기이하기가 춘추좌전 같고 나는 유심(幽深)하기가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와 같다 했으니, 이 뜻을 모르는 자와는 함께 말할 수 없다고 하겠다(坡翁嘗與文與可論畵竹, 君奇似左典 僕幽似離騷, 此意不可與不知者道耳).’

‘다 쓰고 버린 붓이 산처럼 쌓여도 보배롭다 여길 수 없으니, 1만권 책을 읽어야 비로소 신령과 통한다. 그대 집 스스로 원화(元和·당나라 유공권)의 서체가 있으니 가계(家鷄)에 싫증내 남에게 묻지 마라(退筆如山不足珍 讀書萬卷始通神 君家自有元和脚 莫厭家鷄更問人).’

 

석재는 그림 그리는 법의 근원을 서법에 두었다. 문인화가 추구하는 가치 중 하나인 이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은 그림과 서예글씨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의미다. 그의 작품 화제에도 잘 나타나 있다.

‘판교 정섭은 대나무를 그리는 데 마치 글씨 쓰는 것과 같아 필력이 웅건하다. 본디 글씨에 능하지 않으면 비슷하게도 할 수 없다(板橋鄭燮 寫竹如寫書 筆勢雄健 非素能於書者不可彷彿).’

‘대나무는 서법에서 왔으니 대나무를 배우면 바로 글씨를 알 수 있다. 이 말에는 깊이 서화를 터득한 의미가 있다(竹自書法中來 學竹便解書 此語深得書畵意思).’

‘판교의 난초와 대나무는 모두 서법에서 온 것이다. 미술을 배우지는 않았으나 배워서 얻을 만하다고 하겠다(板橋蘭竹 皆從書法中來 非專學美術 可以學得).’

‘대나무 그리는 법은 주로 서법에서 왔으니 대나무 그리는 법을 배우면 바로 글씨를 알 수 있다(寫竹多從書法中來 學竹便解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