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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5일 오전 08:40

solpee 2012. 9. 25. 08:41

"난 아홉살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고,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하였고 목숨을 건 전쟁이 직업이었으며,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었고 나라 인구라곤 어린아이, 노인 전부 합쳐 200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않았으며,
너무 막막하여 삶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치도 못했다.

난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고,
목에 칼을 달고도 탈출에 성공하였고,
뺨에 활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나의 가장 큰 적은 몇 십, 몇 백만 대군의 적군이 아니었고,
나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도 아닌 내 안에 있었다.

그 거추장스런 모든 것을 깡그리 쓸어버리고
나를 극복하던 그 순간 나는 징기즈칸이 되었다. "

                                                    -어디에선가에서-

 

防民之口甚于防川(방민지구심우방천)

깊은 강물은 막을 수 있어도 백성들의 입은 막기 어렵다

 

정치를 비난하는 백성들의 입을 막기란 강물을 막는 것보다 더 어렵고, 민원이 쌓이다 보면 두려워할 만한 결과가 반드시 온다는 말이다.
사기에 중국 주나라 여왕 때 폭정으로 백성의 원성이 대단했는데, 백성들이 그의 포악성에 눌려서 쥐죽은 듯 했다. 여왕은 이를 잘 다스려진 태평성대라 믿고 있었고 이를 본 그의 신하 목공은 몇차례 폭정을 그만 두도록 간언했으나 듣지 않자, “그들의 입을 막고 태평성대 운운하는 것은 안 됩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냇물을 막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막혔던 둑이 터지면 많은 피해가 생기는 것처럼 사람들의 불만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라고 했다.
왕은 이를 따르지 않고 공포의 정치를 계속하다가 백성들의 원성이 강물처럼 모여 반란으로 이어져 결국 쫓겨나 외국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됐다. 오늘날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든 흔히 일어나는 일이며 메스컴에서 사진으로 흔히 보는 일이다.
치수를 잘하는 사람은 물이 잘 흐르도록 물길을 터주는 것이고(爲川者決之使導), 정치를 잘하는 사람은 백성들이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고 말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爲民者宣之使言).

고대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권좌에서 무너져간 이들의 면면을 보면 절대적인 원인이 언로를 막는 일이였다. 사람들을 길에서 마주칠 때 입을 열지 않고 눈짓으로만 불만을 주고 받는(道路以目) 정치 탄압은 이제 북한을 끝으로 사라져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도 포악한 부모를 둔 아이들은 입을 열지 않고 눈알을 굴리며 괴로움을 전달하고 있다.
                                           /근당 梁澤東(한국서예박물관장)

 

食無求飽(식무구포)

군자는 배부름을 추구하지 않는다.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추구하지 않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으며, 일을 처리하는 데 신속하고 말하는 데는 신중하며, 도가 있는 곳에 나아가 스스로를 바로잡는다. (그렇다면)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논어 학이(學而)
군자는 도덕과 학식을 두루 갖춘 존재다. 이 문장의 의미는 정신적인 데에 힘을 써야 하고 물질적인 것을 도외시하라는 말이다. 공자가 이렇게 말한 것은 배부름을 추구하는 것은 소인의 행태이기에 말이다. 그런 공자이기에 일상에서도 ‘포(飽)’의 의미를 평가절하했으니, “배부르게 먹는 것을 온종일 하고 마음 쓰는 데가 아무것도 없다면 곤란하구나. 육박(장기의 일종)과 바둑이라도 있지 않은가. 그런 것이라도 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 猶賢乎已)”고 했다.

‘빈이락(貧而樂)’ 즉, 가난하면서도 즐거움으로 삼는 것은 공자가 추구한 삶의 지향이었고 평생 동안 일관했던 삶의 자세였다. 그가 때로는 집편지사(執鞭之士·채찍을 들고 길을 트는 자)가 되어 부(富)를 구할 수도 있다고 푸념하기도 했으나,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소신 있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