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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有伯樂然後有千里馬

solpee 2012. 9. 19. 06:35

世有伯樂然後有千里馬 (세유백락연후유천리마)
세상에 백락이 있은 연후에 천리마가 있다

아무리 재능이 있는 사람도 그 진가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으면 재능은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썩어버린다. 즉, 천리마(재능)는 항상 있지만 백락(알아보는 사람)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千里馬常有 而伯樂不常有).

백락(伯樂)은 중국 진나라 때 사람으로 말을 다루는 일을 관장했는데, 말을 잘 알아보는 사람의 대명사로 쓰일 만큼 유명하며 우리의 고전사(古典史)에서도 무수히 등장하고 있다. 당나라 때 학자 한유는 말을 인재에 비유해 이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군주를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세상에 비록 名馬(천리마)가 있다 하더라도 노예처럼 다루는 손에 모욕을 당하다가 마구간에서 보통 말과 함께 나란히 죽어가 명마라는 평판을 듣지 못하게 된다.천리를 달리는 말은 한번 먹이를 먹일 때 한 섬의 곡식을 먹여야 한다. 그런데 말을 먹이는 사람이 그 말이 천리를 달릴 수 있음을 알지 못하고 먹인다. 따라서 이 말은 천리를 달리는 능력이 있어도 배불리 먹지 못해 힘이 달리고 재주를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채찍질하되 천리마를 다루는 방법대로 하지 않고 먹이되 그 재주를 다 발휘할 수 있게 하지 못하니, 주인을 향해 울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은 채찍만을 들고 말 앞에서 천하에 좋은 말은 없다고 한다. 슬프다. 정말 좋은 말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좋은 말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가.

/근당 梁澤東(한국서예박물관장)

 

未兆易謀(미조이모)

실패할 조짐이 없으면 도모하기 쉽다.

미세한 조짐도 지나치지 말라는 말로 어떤 일이든 실패의 조짐이 보이면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로 방미두점(防微杜漸)과 같은 의미다. “국면이 안정되면 유지하기 쉽고, 그 조짐이 없으면 도모하기가 쉽다. 물건이 무르면 부서지기 쉽고, 그것이 미미하면 흩어지기 쉽다.(其安易持也, 其未兆易謀也. 其脆易判, 其微易散 한비자 ‘유로’)

길이가 천 길에 이르는 제방도 조그만 개미구멍으로 인해 무너지는 것이며, 높이 백 척의 큰 집도 굴뚝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불티로 재가 된다. 그래서 전국시대 초기 위(魏)나라 재상 백규(白圭)는 제방을 순시할 때 작은 구멍을 발견하자 곧 막았으며, 노인이 불조심을 할 때는 반드시 틈바구니를 흙으로 바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백규가 조사하면 수해가 없었고, 노인이 일을 하면 화재가 없었다. 제궤의공(堤潰蟻孔) 또는 제궤의혈(堤潰蟻穴)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한비는 이런 예를 들었다.

“예전에 진(晉)나라 공자 중이(重耳)가 나라를 떠나 망명할 때 정(鄭)나라를 지나게 됐다. 이때 정나라 왕은 중이에게 예의를 갖추어 대접하지 않았다. 숙첨(叔瞻)이 군주에게 간언했다. ‘중이는 현명한 공자입니다. 왕께서는 그를 후하게 예우해 덕을 쌓아둘 만합니다.’ 정나라 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숙첨이 또 간언했다. ‘중이를 후하게 예우하지 않으시려거든 죽여서 후환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왕은 이 또한 듣지 않았다. 결국 중이는 진나라로 돌아가게 됐고, 이후에 병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격파해 여덟 성을 차지했다.(한비자 ‘유로’)”

 

藏之名山

 

제대로 된 평가를 위해 깊이 감춰두고서 기다린다는 의미다. 사마천이 ‘사기’ 130편을 완성하고 나서 그것이 몰고 올 파장에 대한 깊은 두려움으로 말한 것이다. “그것(책)을 명산에 감춰두고 부본(副本)은 수도에 두어 후세의 성인·군자들이 열람하길 기다린다(藏之名山, 副在京師, 俟後世聖人君子).” 사기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방대한 분량의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은 인간과 권력을 다룬 이 책의 예사롭지 않은 운명을 예감했다. 그의 말처럼 사기는 오랫동안 왕실과 역사가들에게 외면 받으며 몇 세기를 보내야 했다. 그런 비판의 이면에는 사기가 90년 늦게 나온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달리 도가와 병가, 잡가 등 제자백가를 두루 다뤄 한 대의 국가 이념인 유학에 배치된다는 인식이 있다.

사마천은 자객과 점쟁이, 유세가, 의사 등 당시 세상의 비주류들을 과감히 역사의 주류로 등장시켰다. 예를 들어 형가(荊軻)가 연나라에서 거문고와 비슷한 악기인 축(筑)의 명수 고점리(高漸離)와 비파를 타면서 술 마시고 노래하는 호방함, 그가 태자 단의 눈에 들어 진시황 암살계획을 도모하는 이야기들은 사마천이 아니면 쓰기 힘든 소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기가 소외의 시간만 보낸 것은 아니었다. 당(唐)나라의 문장가 유종원(柳宗元)은 사기를 ‘웅심아건(雄深雅健)’이라고 평가하면서 문장 학습의 기본 틀로 삼았고, 구양수(歐陽脩)는 애호가로서 글을 지을 때 이용하기도 했다. 사기의 위상은 청대(淸代)에 기윤(紀윤)과 조익(趙翼), 장병린(章炳麟) 등에 의해 더욱 확고해졌으며 근대 중국의 루쉰(魯迅) 역시 ‘천고(千古)의 절창(絶唱)’이라고 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