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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山 詩

solpee 2012. 9. 17. 09:10

 

태산(泰山)

 

목 록

唐 杜甫, <望嶽(태산을 바라보며)>

淸 姚鼐, <登泰山記(등태산기)>

 

1. 唐 杜甫, <望嶽(태산을 바라보며)>


岱宗夫如何 태산(泰山)이 어떻게 생겼냐 하면

齊魯靑未了 제 땅에서 노 땅까지 푸르름이 끝 없는데

造化鍾神秀 조화옹이 솜씨를 있는 대로 다 부려

陰陽割昏曉 한 쪽이 저녁이면 한쪽은 새벽이라네.

蕩胸生層雲 가슴이 싹 씻기도록 층계 구름 일어나고

決眦入歸鳥 눈이 번쩍 뜨이도록 새가 날아든다네.

會當凌絶頂 꼭대기에 꼭 올라가

一覽衆山小 나지막한 뭇산을 한번 보리라.


[작품 설명]

두보(杜甫)가 산동성 태안(泰安)에 있는 태산을 오르면서 그것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거시적으로 묘사하고 아울러 태산이 얼마나 높고 오르기 힘든지를 암시적으로 넌지시 내비쳤다. “태산에 올라보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라고 한 공자(孔子)의 말을 연상시키는 시이다.


2. 淸 姚鼐, <登泰山記(등태산기)>


泰山之陽, 汶水西流, 其陰, 濟水東流. 陽谷皆入汶, 陰谷皆入濟, 當其南北分者, 古長城也. 最高日觀峯, 在長城南十五里.

余以乾隆三十九年十二月, 自京師乘風雪, 歷齊河長淸, 穿泰山西北谷, 越長城之限, 至於泰安.

是月丁未, 與知府朱孝純子穎, 由南麓登. 四十五里, 道皆砌石爲磴, 其級七千有餘. 泰山正南面有三谷, 中谷繞泰安城下, 道元所謂環水也. 余始循以入, 道少半, 越中嶺, 復循西谷, 遂至其顚. 古時登山, 循東谷入, 道有天門. 東谷者, 古謂之天門谿水, 余所不至也. 今所經中嶺及山顚, 崖限當道者, 世皆謂之天門云. 道中迷霧, 冰滑, 磴幾不可登. 及旣上, 蒼山負雪, 明燭天南. 望晩日照城郭 汶水徂徠如畵, 而半山居霧若帶然.

戊申晦五鼓, 與子穎坐日觀亭, 待日出. 大風揚積雪擊面. 亭東自足下皆雲漫, 稍見雲中白若樗?數十立者, 山也. 極天雲一線異色, 須臾成五采, 日上, 正赤如丹, 下有紅光動搖承之, 或曰, “此東海也. ” 回視日觀以西峯, 或得日, 或否, 絳皜駁色, 而皆若僂.

亭西有岱祠, 又有碧霞元君祠. 皇帝行宮在碧霞元君祠東. 是日, 觀道中石刻, 自唐顯慶以來, 其遠古刻盡漫失, 僻不當道者, 皆不及往.

山多石少土. 石蒼黑色, 多平方, 少圜. 少雜樹, 多松, 生石罅, 皆平頂. 氷雪, 無瀑水, 無鳥獸音迹. 至日觀數里內無樹, 而雪與人膝齊. 桐城姚俯記.

 

태산(泰山)의 남쪽에는 문수(汶水)가 서쪽으로 흐르고 그 북쪽에는 제수(濟水)가 동쪽으로 흐른다. 산 남쪽의 계곡들은 모두 문수로 흘러들고 산 북쪽의 계곡들은 모두 제수로 흘러드는데 그 남쪽과 북쪽의 물이 나뉘는 곳에 있는 것이 옛날의 제(齊)나라 장성(長城)이다. 가장 높은 일관봉(日觀峯)은 장성에서 남쪽으로 15리 되는 곳에 있다.

나는 건륭 39년(1774) 12월 경사를 떠나 눈보라를 무릅쓰고 제하현(齊河縣)과 장청현(長淸縣)을 지나 태산의 서북쪽 계곡을 뚫고 장성을 넘어 태안(泰安)에 이르렀고 이달 정미일(丁未日, 음력 12월 28일)에 지부(知府) 자영(子穎) 주효순(朱孝純)과 함께 남쪽 기슭으로부터 산에 올랐다. 45리를 가자 길이 온통 돌을 쌓아서 계단을 만든 것이었는데 계단이 모두 7천 개도 넘었다. 태산의 정남쪽에 계곡이 세 개 있는데 이 가운데 중곡은 태안성 밑을 감돌아 흐르니 이것이 바로 역도원(?道元)이 말한 이른바 환수(環水)이다. 나는 처음에 이 중곡을 따라 들어가 길의 절반 좀 못 미친 곳에서 중령(中嶺)을 넘고 다시 서곡을 따라가서 마침내 꼭대기에 도달했다. 옛날에는 태산에 오를 때 동곡을 따라 들어갔는바 가는 길에 천문(天門)이 있다. 동곡은 옛날에 천문(天門) 계곡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내가 가지 않은 곳이었다. 지금 내가 지나온 중령과 꼭대기는 벼랑의 끝이 길에 임해 있는 것으로 세상에서 다들 천문이라고 부른다. 길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고 얼음이 얼어 미끄럽기 때문에 돌계단을 거의 오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위에 오르자 푸른 산이 눈에 덮여 하늘의 남쪽을 훤하게 비추었다. 저녁해가 성곽과 문수와 조래산(?徠山)을 비추어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산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것처럼 깔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신일(음력 12월 29일)인 그믐날 오경에 자영 주효순과 함께 일관정에 앉아 해가 뜨기를 기다리노라니 세찬 바람이 일어나 쌓인 눈이 얼굴을 때렸다. 정자의 동쪽에는 다리 아래서부터 온통 구름이 자욱하게 끼었는데 구름 속에 저포(樗?)처럼 하얀 물체가 수십 개 서 있는 것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바로 안개에 덮인 산이었다. 하늘 끝에 가느다란 구름 한 가닥이 색깔이 변하더니 잠깐 사이에 오색을 이루더니 해가 떠오르자 마치 단사(丹砂)처럼 붉어지는데 그 아래에 빨간 빛이 흔들거리며 그것을 받쳐주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이 동해다”라고 했다. 몸을 돌려 일관봉 서쪽에 있는 봉우리를 보니 어떤 봉우리는 햇살을 받고 어떤 봉우리는 햇살을 안 받아 붉은색과 흰색이 얼룩얼룩하게 섞였는데 모두가 허리를 굽혀 국궁(鞠躬)하는 것 같았다.

 

정자의 서쪽에 동악대제(東岳大帝)를 모시는 사당인 대사(垈祠)가 있고 또 동악대제의 딸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모시는 사당인 벽하원군사가 있었으며, 황제의 행궁은 벽하원군사 동쪽에 있었다. 이날 길에 있는 석각을 보았는데 당나라 현경(656-660) 연간 이래의 것으로 오래된 옛날 석각이라 모두 글자를 알아볼 수 없도록 뭉개지고 망가졌으며 길가에 있지 않고 구석진 곳에 있는 것은 모두 가볼 수가 없었다.

 

산에는 돌이 많고 흙이 적은데 돌은 거무튀튀한 색깔이었으며 그 모양은 평평하고 네모난 것이 많고 둥근 것이 적었다. 수목은 잡목이 적고 소나무가 많은데 바위 틈에 나서 모두 꼭대기가 평평했다. 또 도처에 빙설이 늘려 있고 폭포가 없으며 새와 짐승의 소리나 발자국이 없었다. 일관봉까지 몇 리 안에는 나무가 없고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동성 사람 요내(姚?) 씀.


[작품 해제]

청나라 때 동성파(桐城派)의 고문 대가 요내(姚鼐)가 태산(泰山)에 오르면서 보고 느낀 감회를 서술한 글이다. 몇 자 안 되는 짤막한 글 속에 눈에 덮인 태산의 장려한 경관을 사진을 찍듯 핍진하게 잘 묘사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