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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花時節과 濯足詩

solpee 2012. 8. 7. 05:44

落花時節

 

시성 두보의 많지 않은 절구 가운데 감정의 함축이 깊은 시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江南逢李龜年)’이란 작품에 나오는 말이다. “기왕(岐王)의 집에서 항상 그대를 보았었네/최구(崔九)의 정원에서 노랫소리 몇 번이나 들었던가/지금 이 강남의 한창 좋은 풍경인데/꽃 떨어지는 시절에 다시 그대를 만났구려(岐王宅裏尋常見, 崔九堂前幾度聞. 正是江南好風景, 落花時節又逢君).”

두보가 현종의 총애를 받던 명가수 이구년을 자주 본 것은 둘 다 젊은 시절이었다. 두보 역시 당시 왕족에게 시재(詩才)를 인정받아 권세가의 집을 드나들면서 바로 그 좋은 시절에 이구년의 노래를 감상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두 사람이 시간이 한참 지나 강남에서 우연히 상봉하게 되었다. ‘낙화시절’은 옛날에 대한 추억과 현재 자신의 암담한 처지가 대비되는 시어로, 유명했던 노가수와 노시인이 시대와 사회를 등지고 강남에서 다시 만난 비참한 현실을 각인시킨다. 3구의 ‘정시(正是)’와 4구의 ‘우(又)’라는 두 단어는 이 시 전체에 무한한 감개를 깃들게 만든다.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둘 다 떠돌이의 처지에서 만나 느끼는 바로 그 감정 말이다. 두 사람의 화려했던 과거의 모습이 전반 두 구라면 두 사람이 처한 쇠락의 징표는 바로 후반 두 구절이다. 떠도는 나그네의 모습이 ‘낙화시절’인데, ‘호풍경(好風景)’이란 표현과 대비된다.

우리가 눈여겨볼 점은 ‘낙화시절’이 기본적으로는 이구년과 상봉한 때이지만 이구년과 시인 자신의 모습, 현 시점의 당 제국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우봉(又逢)’이란 말로 미래에 대한 희망도 어느 정도 표현하고 있기는 하다.


이구년이 그러하듯 잘나가는 시절에 ‘낙화시절’이란 단어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지만,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지 않은가.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題江石/강돌


                                              홍유손(洪裕孫)


 濯足淸江臥白沙(탁족청강와백사) 맑은 강에 발 담그고 흰 모래에 누우니

 心神潛寂入無何(심신잠적입무하) 심신은 고요히 잠겨들어 무아지경일세

 天敎風浪長喧耳(천교풍랑장훤이) 귓가에는 오직 바람소리 물결소리 

 不聞人間萬事多(불문인간만사다) 번잡한 인간속세의 일은 들리지 않는다네


 

                               

                                                    이경윤의 <탁족도>

 

 

 

조선 시대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유월조(六月條)에,

“삼청동 남북 계곡에서 발 씻기 놀이를 한다.” 

(三淸洞……. 南北溪澗 爲濯足之遊)는 기록이 있다.

《동국세시기》가 당시의 풍속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아 탁족놀이가 일부 특수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유행했던 여름 풍속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이 탁족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중국 고전인 《초사 楚辭》의 내용과 관련이 깊다. 《초사》 어부편(漁父篇)을 보면 어부와 굴원(屈原) 사이의 문답을 서술한 마지막 부분에,


 “어린아이가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

라는 구절이 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부분을 특별히 〈어부가 漁父歌〉,

또는 〈창랑가 滄浪歌〉라 이름 지어 불렀는데, 이 노래에 나오는 ‘탁족’과 ‘탁영’이라는 말을 특별한 의미로 새겼다. 즉 세상의 부귀영화에 얽매임이 없이 자연에 순응하면서 순진무구한 아이들처럼 맑고 초연하게 살아감을 비유한 것이다.

창랑의 물이 본래대로 맑을 때에는 사람들이 갓끈을 담가 씻고,

더러워지면 또 더러워진 대로 발을 담가 씻으니, 물이 맑거나 흐리거나

다 씻을 것이 있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그런가하면, 오늘날 권영희 시인은 <탁족濯足>이란 시에서 탁족광경을 그림처럼 묘사해낸다.


풀꽃들 옹기종기 하얀 햇살 꺾어 들고

징검돌 치맛단 올리며 물빛 퉁기는 냇가

혼자 큰

탁한 마음이

시린 발을 담근다.

 

 또한 황동규시인의 ‘탁족’이란 시에서는 현대인의 정감에 한걸음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적적한 곳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입을 때

흔들어도 안터지는 휴대폰

주머니에 쑤셔 넣고 걷다 보면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 휴대폰

그리고 잊어버린 교통범칙금 고지서까지

지겹게 지니고 다닌다는 생각!


시냇가에 앚아 구두와 양말 벗고 바지를 걷는다

팔과 종아리에 이틀내 모기들이 수놓은

생물과 생물이 느닷없이 만나 새긴

화끈한 문신들!

인간의 손을 쳐서

채 완성 못 본 문신도

그대로 새겨 있다

요만한 자국도 없이

인간이 제풀로 맺고 푼 것이 어디 있는가?


황동규 시인의 이 시를 읽다보면 탁족하는 행위에 대한 진한 느낌이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오늘 하루라도 잠시 휴대폰을 끄고, 양말도 벗어던지고,

남을 의식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오늘의 신선이 되는 방법이 아닐까......


여름!

무더위!

주변에서 들려오는 온갖 세속적인 소리!

현세에 몸담고 살다보면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고

억지로 들어줘야하는 소리도 있을터...


잠시 그 버거운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말복인 오늘은 홍유손의 이 시와 이경윤의 탁족도 그림을 벗삼으면서

우리네 조상님들이 했던 방식대로 탁족을 해 보는 것도 피서의 한 방법일 것이다.


 

  홍유손(洪裕孫) 1431(세종13)~1529(중종24)


조선 초기 문인. 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叢)·광진자(狂眞子). 본관은 남양(南陽).

문장에 능하여 부역을 면제받고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지냈다.

세조(世祖)의 왕위찬탈 이후 세속적 영화를 버리고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냈다.

1482년(성종 13)부터는 남효온(南孝溫)·이총(李摠) 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을자처하고 노장(老莊)의 학문을 논하여 청담파(淸談派)로 불렸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노예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