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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solpee 2012. 7. 7. 12:04

은나라 도자기 한국에있다…중국들썩
    기사등록 일시 [2012-07-07 07:02:00]
【서울=뉴시스】이예슬 기자 = 대만 신생보(新生報)가 은나라 마지막 황제 제신(帝辛)이 '목야(牧野)의 전쟁' 직전 별점을 치고, 그 점괘를 새겨 남긴 홍도관을 전면 특집으로 보도했다.

제목(殷商古物現身韓國 占星紅陶罐出土) 아래 7개 서브타이틀(前言, 輾轉經手 不知是寶物, 陶罐甲骨文 暗藏天機, 熱釋光檢測 真偽解惑, 殷古物 總算驗明正身, 歷史價值 金錢難衡量, 專訪甲骨文專家 朴大鍾: 紅陶罐 來歷不凡)로 대서특필했다.

◇은나라 유물 한국에 현신(現身), 별점이 기록된 홍도관 출토

원래는 단지 어깨부위에 꽃무늬가 있는 일개 화병으로만 여겨졌던 향토적 홍도관이었다. 처음엔 그 둘레에 원형으로 새겨진 불규칙적 꽃무늬가 곧 갑골문임은 명확히 인지되지 않았다. 고증을 거치면서 이 일단의 갑골문은 역사적 '목야(牧野)의 전쟁' 사실과 관련이 있고 이 물건은 중국역사의 은상 유물인 것으로 능히 검증돼 현재 한국에 현신(現身)했다.

1899년 중국대륙 은허 유적지에서 발견된 갑골문 이후 지금까지 약 15만 편의 갑골이 출토돼 세상에 전해 내려왔다. 그런데 그 중 대부분은 귀갑수골 위에 새겨진 것이고 또한 대부분은 모두 파손된 불완전한 것들이며, 도기상에 새겨진 갑골문은 드물 뿐만 아니라 물건이 거의 완정에 가까운 것은 더욱 보기 어렵다. 그리고 출토된 물건 위에 새겨진 갑골문 내용을 연구해보면 점복으로써 길흉을 묻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아직까지 별점 사실(史實)을 기술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 관계로 은(殷) 주왕(紂王) 홍도관의 출토는 별도로 상조문화의 신영역에 대한 일개 연구를 개창하는 것이 된다.

특히 홍도관 상에 새겨진 갑골문은 상나라 주왕이 별자리 모양을 관찰하고 주나라 무왕을 토벌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어, 이 홍도관이 상나라 주왕의 왕실유물일 수 있음을 증명, 가히 일건의 세계급 문화유산이자 세상에 보기 드문 진귀한 물건이라 할 수 있어, 그 중요성 및 역사 형성에 대한 충격은 모두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과소평가할 수 없게 만든다.

◇여러 손으로 옮겨가는 동안 보물인 줄 몰랐다

한국인 골동품 수집가인 안 선생은 중국대륙을 자주 다닌 사람으로, 1992년 또는 1993년 요녕성 부신(阜新)시 외곽지역에서 현지 골동상으로부터 1차로 물건들을 구입했는데 그 중에 이 홍도관이 포함돼 있었다. 그 후 안 선생은 이 물건을 요녕성 심양시 만융촌 내 거주지에 보관해두었다. 2005년 7월20일 전후로 안 선생은 이 홍도관을 또다른 한국인 골동품 수장가인 석 선생에게 팔았고, 석 선생은 8월18일 홍도관을 여행용 가방에 넣어 중국 북경공항에서 X레이 검색을 받은 뒤 북방항공편을 이용해 한국 인천공항으로 들여왔다. 홍도관이 한국에 도착한 이후 석 선생은 또 8월 말에 또다른 김 선생에게 팔았고, 접수자인 김 선생 또한 현재 소장자인 조 선생에게 소유권을 양도했다.

이러한 일련의 이동 과정 중에서 소유인 모두는 홍도관 상에 새겨진 것을 단지 꽃무늬가 수려하고 독특하다라고만 생각했지, 그 특별한 의의와 가치는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현재 소장자인 조 선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 선생은 홍도관을 획득한 후에도 특별히 중시하지 않고 단지 일반가정에 진열해놓았다. 텔레비전 받침대 위에 놔둬 평시에는 그것을 수장함(收藏盒)이 되게 하고 손길가는대로 일부 잡동사니와 어린 아들의 장난감들을 담아놓았다. 2005년 12월24일 저녁시간, 조 선생은 TV를 보는 도중, 동시에 시선이 이 홍도관에 이르렀는데, 곧 그것을 손으로 붙잡고 자세히 한 번 감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그는 문득 이 독특한 꽃무늬가 중국 고문자와 닮았고, 만일 그렇다면 이 홍도관은 진정한 골동품일 수 있음을 경각(驚覺)했다. 또한 이 고문자에 대해 도대체 무슨 뜻인지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이에 이튿날 그는 즉시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을 찾았고 그때부터 홍도관이 갖는 진정한 신분의 역정(歷程)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천기가 암장된 제신홍도관(帝辛紅陶罐) 갑골문

갑골문은 일종의 매우 중요한 고한자(古漢字) 자료이다. 절대 부분은 은허에서 발견됐는데 기본적으로는 모두 은상왕조 통치자의 점복기록이다. 은허는 저명한 은상시대 유적지로 그 범위는 하남성 안양시 서북 소둔촌, 화원장, 후가장 등지를 포괄한다. 이곳은 일찍이 은상 후기 왕조들의 도성 소재지인 까닭에 은허라 불리운다.

홍도관에는 모두 61개의 갑골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占(그 외부에는 囗이 있음)’자 하나는 바닥부위에 있고, 나머지 60개 글자는 도관 견부에 있는데, 중복된 부분을 제외하면 총 49자이다. 도관 견부의 60개 글자들은 각자 모두 하나의 완전한 원을 형성하고 있는데 결코 조금의 간격도 없이 단원횡행(單圓橫行) 방식으로, 우측에서 좌측 방향으로 서사돼 있다. 그 주요사항은 성상(星象)을 관찰하고 전쟁결과를 추구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연구에 따르면 '주왕(紂王)'이라고도 하는 은상 최후의 황제 '제신(帝辛)'의 재위 만기 시에 '태백경천'이라고 하는 금성의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반란 및 국가기강을 파괴하는 대흉조였으니 은상으로서는 왕조 존망이 걸린 절박한 지경에 직면하게 됐다. 당시는 때마침 주나라 무왕이 기병해 주(紂) 왕을 치려는 시기여서, 주왕은 화근을 소멸시키기로 결정하고 이에 출병 전에 제사의 예를 거행하고 성상을 관찰, 그 결과를 구해 물었다. 주왕이 평상시처럼 그 결과를 수골(獸骨) 위에 새기지 않은 까닭을 규명해보면, 그 주된 원인은 중국전통의 천간과 지지는 60으로써 한 사이클을 이룬다는 사고방식이 있는데 주왕은 응당 천자의 군대가 작전 중에 전체 과정을 끝까지 가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둥근 원에 꽉 차게 표시를 한 것은 승리를 획득해 상왕조의 사직을 지키는 의의가 있다. 이에 주왕은 특수한 정황에 직면한 상태에서 특수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장차 결과는 60개의 글자들을 둥근 도관 위에 새겨 구웠으니 이것이 곧 현재의 이 홍도관이다.

60개의 갑골문자는 각 30자씩 2조로 나뉘어져 있다. 제1조 복사는 '금(金)'에서 '후(侯)'까지로, 추구해 묻는 사항을 설명하고 있다.

"불길하게도 대낮에 금성이 나타났습니다. 신(辛)의 군대를 출병시킬까요? 주후서백(周侯西伯)의 군대와 그의 우군들이 주(州) 서읍으로부터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 없을까요? 조왕 문정과 부왕 제을께서 돕고 지켜주실까요? 엄정한 기강이 무너지고 방임되는 일이 있을까요? 과연 서백후(西伯侯)로부터 그러한 일이 있었다."

제2조복사는 '조(祖)'에서 '어(御)'까지로 계속해서 질문을 구함과 아울러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조왕 문정과 부왕 제을이시여! 문(文)을 치기 위해 저녁에 제를 올리면, 우리 군대가 승리를 획득할 수 있을까요? 정수(井宿)에 제를 올리면 짐이 재앙을 막을 수 있을까요? 왕이 성조를 살펴 길흉판단을 해 가로되, '각성(角星)이 밝게 빛나니, 나는 문(文)의 세력을 정벌해 배(나라)를 평안하고 고요하게 이끌 것이고, 승리를 획득한 후에는 서읍을 분봉할 것이며, 재앙은 능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해석 박대종)

이 60개의 글자들은 3000여년 전 주왕과 주후서백간의 전쟁을 앞둔 장면을 생동감 있고 완전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왕은 금성이 대낮에 출현한 사실을 흉조로 여기고, 국가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이성제성(以星制星)'의 전략적 사고 하에 각성(角星) 별점을 진행해, 금성으로부터 야기된 불안을 저지해낼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데 그것이 갖고 있는 역사적 가치와 의의는 확실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