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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子 중에서

solpee 2012. 7. 1. 06:45

堯임금은 五帝의 한 사람인 帝곡(제곡)의 손자로 태어났다. 하지만 舜임금은 歷山(역산)에서 밭을 갈고 河濱(하빈)에서 질그릇 굽고 雷澤(뇌택)에서 고기잡이하다가, 요임금의 禪讓(선양·임금 자리를 물려줌)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역산은 지금의 山東省(산동성·산둥 성) 滿南市(만남시) 교외에 있는 舜耕山(순경산)을 가리킨다고 한다. 하빈은 황하의 한 구역을 말하고 뇌택은 산동성 복縣(복현) 동남쪽에 있는 연못이라고 한다. 전설상으로 보면 순임금은 농사를 지었을 뿐 아니라 다른 노동에도 종사했다. 그런데 맹자는 순임금이 즉위한 이후로는 勞心者로서 자기 본분을 다했다고 보았다. 즉, 맹자가 말한 勞心者와 勞力者의 구분은 직분에 따른 구별이지, 노동을 천시하는 차별이 아니다

此言은 何謂也오 之則以爲愛無差等이오 施由親始라 하노라

豈無所用其心哉는 ‘어찌 그 마음을 쓰신 바가 없겠는가’라고 반문하여, 모든 것에 마음을 쓰셨음을 강조한 것이다. 亦不用於耕耳는 ‘역시 밭 가는 일 자체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않았을 따름이다’라는 뜻이다. 用의 다음에 心이 생략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인재를 구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전념했으므로 직접 노동을 하여 밭을 갈지는 않았을 따름이라는 말이다.

앞서 맹자는 勞心者(노심자)와 勞力者(노력자)를 구분하여, 勞心者는 남을 다스리고 勞力者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다고 했다. 또한 禹(우)가 治水를 할 때 8년이나 바깥에 있으면서 세 번이나 자기 집 앞을 지나가면서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럴 때 禹가 비록 밭을 갈려고 하여도 그럴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큰 공적을 남겼지만 직접 밭을 갈 수는 없었다는 것이 맹자의 생각이다.



倍子之師而學之하니 亦異於曾子矣로다

맹자는 陳相(진상)이 스승 陳良(진량)을 배반한 것을 두고, 증자가 공자의 도덕을 숭상한 것과 다르다고 비판하였다. 공자가 별세하자 제자들은 삼 년의 喪期(상기)를 마친 후 돌아가고 子貢(자공)은 다시 돌아와 묘 마당에 집을 짓고 삼 년을 더 지낸 뒤 돌아갔다. 그 후 여러 제자는 有若(유약)이 성인(공자)과 유사하다 하여 공자를 섬기던 예로 그를 섬기고자 해서 曾子(증자)에게 강요하자, 증자는 안 된다고 했다.

南蠻鴃舌之人은 남쪽 이민족의 왜가리 소리 내는 사람이란 뜻이다. 여기서는 農家者類(농가자류)의 사상가 許行(허행)을 가리킨다. 鴃舌은 博勞(박로)라고도 한다. 남쪽 이민족의 소리가 왜가리 소리같이 시끄럽기만 하고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하여 鳥音(조음)에 빗댄 것이다. 非先王之道는 선왕 때부터 전해 내려온 仁義(인의)의 도가 아니란 말이다. 혹은 先王之道를 비난한다고 풀이해도 좋다. 子는 陳相을 가리킨다. 倍는 ‘배반할’ 背(배)와 같다. 子之師는 陳良을 말한다. 學之의 之는 南蠻鴃舌之人인 許行을 가리킨다. 異於曾子는 진상이 스승을 섬기는 태도가 증자가 공자를 섬기는 태도와 다르다는 말이다.

맹자가 陳相(진상)의 背師(배사·스승을 배반함)를 꾸짖고 中華(중화)의 도를 버리고 夷狄(이적)의 도로 나아간 것을 비판하자, 진상은 許行(허행)의 도를 따를 경우의 이점을 변론하였다. 위의 부분은 진상의 말을 옮긴 것이다.

주나라 때의 자와 이후의 자는 길이가 달랐다. 주나라 때의 一尺이 실제로 몇 cm였는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대개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木尺인 營造尺(영조척)보다는 길이가 짧았다고 보면 된다. 適市는 ‘시장에 간다’로, 適의 본의가 ‘가다’인 것을 사용한 표현이다. 莫之或欺는 ‘혹시라도 그를 속이는 자가 없다’는 뜻이다.



허행과 진상이 말하듯이 상인이 아동에게도 가격을 속이지 않을 정도로 시장의 물품 가격이 표준화되어 있다면 정말로 이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시장의 물품은 품질이 완전히 같을 수 없다. 그 차이를 반영하지 않고 시장의 물품을 강제로 동일하게 규정한다면 그것은 시장의 흐름을 방해하게 될 것이다. 맹자는 이 점에서 허행이나 진상과 견해를 달리했다.


五穀多寡同이면 則賈相若하며 구大小同이면 則賈相若이니라

陳相(진상)이 許行(허행)의 도를 따를 경우의 이점을 변론하는 부분이 지난 호에 이어서 계속된다. 진상은 許子之道를 따르면 시장 안의 물품 값이 동일해져서 오척의 동자(곧 삼척동자)가 시장에 가더라도 속이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시장 안의 물품 값이 동일하게 된 상황을 부연하여 말하였다. 진상의 말 가운데 이 부분은 4개의 유사한 구문을 중첩하는 방식이다. 곧, ‘물건+단위+同, 則賈相若’의 형태로 이루어진 4개의 구문을 사용해서, ‘어떤 물건이 단위가 같다면, 값이 서로 같다’는 말을 연달아 예시했다. 賈는 지난 호에 보았듯이 價(가)의 古字이다. 相若은 ‘서로 같다’는 뜻이다.
陳相이 따라 배운 許行의 農家者類(농가자류) 설은 시장의 가격을 통제하는 정책에 가깝다. 물품들은 그 종류에 따라 長短, 輕重, 多寡, 大小의 단위가 같으면 가격도 일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물품의 均質性(균질성)을 보장할 수 있으면 이 주장은 매우 이상적이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品質(품질)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或相千萬이어늘 子比而同之하니 是는 亂天下也로다

陳相(진상)은 許行의 道를 따르면 시장 안의 물품 값이 동일해져서 오척의 동자(곧 삼척동자)가 시장에 가더라도 속이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시장 안의 물품은 단위상 서로 같다면 값도 서로 같아야 한다고 부연했다. 이에 대해 맹자는 허행과 진상의 주장은 품질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아 오히려 시장의 흐름을 교란시킬 것이라고 반박했다.

오늘날의 시장경제를 보면 물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품질만이 아니다. 유통 구조도 크게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유통 방식이 다른 판매처는 각기 다른 가격을 제시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최근 유명 브랜드의 점퍼 회사는 백화점이든 직영점이든 대리점이든 일반 등산용품점이든 무조건 똑같은 가격으로 팔도록 뒤에서 조장했다고 하여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당했다. 허행이나 진상이 상품의 가격을 동일하게 하려고 한 것은 당시 자행되던 불공정한 거래를 막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당시로서도 이미 비현실적이었다. 당시에도 이미 상품의 가격을 책정할 때는 품질의 차이를 고려하여야 했으므로, 맹자는 허행과 진상의 상품가격론을 부정한 것이다.

‘등文公(등문공)·상’ 제4장의 마지막이다. 巨구와 小구는 큰 신발과 작은 신발이다. 그런데 ‘巨구小구同賈’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이미 陳相은 물품의 단위상의 차이는 인정하고 있거늘 맹자의 말은 마치 진상이 그 차이조차 인정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주자(주희)는 이 구절이 가설(가정)의 문장임에 유의하였다. 곧, ‘만일 큰 신발이든 작은 신발이든 가격을 같게 한다면 누가 큰 신발을 만들겠는가, 마찬가지로 품질이 좋은 물건이든 나쁜 물건이든 가격을 같게 한다면 누가 품질이 좋은 것을 만들겠는가?’라는 뜻으로 보았다. 여기서도 그 설을 따랐다. 惡能治國家는 ‘어찌 능히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는 뜻의 反語(반어)이다.

허행과 진상은 정치하는 사람이 농사 등의 직접 노동을 하면서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시장의 물품은 단위당 가격을 균일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첫 번째 주장에 대해 맹자는, 옛날의 정치는 군주를 輔佐(보좌)하는 인물이 관료기구를 장악해서 백성들을 다스렸으므로, 군주는 농사지을 겨를이 없었고 오로지 정치를 실행할 인재를 구하려고 근심했다고 반박했다.



허행과 진상의 두 번째 주장에 대해 맹자는, 상품의 가격을 정할 때는 품질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허행의 조잡한 평등주의는 결국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게 만들 것이라고 비난했다.


 

맹자는 묵자의 무리가 薄葬(박장)을 주장하는 게 잘못임을 논파하고자, 묵자의 사상을 따르는 夷之(이지)가 도리어 부모를 厚葬(후장)한 사실을 들어, 그의 주장과 실천이 모순됨을 문제 삼았다. 그래서 夷之가 다시 찾아오자, 그 문제를 제자 徐僻(서벽)을 통해 전하게 했다. 徐子, 즉 서벽이 맹자의 말을 전하자 夷之는 유학의 말을 인용해 묵자의 사상을 옹호함으로써 맹자의 비판에 응대했다.

夷子는 자신이 兼愛(겸애) 사상을 주장하면서도 부모의 상을 후하게 치른 것을 변명하여, ‘사랑에는 차등이 없되, 베풂은 어버이로부터 시작한다’라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사랑에는 차등이 없다’는 논리를 강화하기 위해 유학자의 경전인 ‘서경’의 글을 인용했다. 이러한 논리 구사는 맹자가 말한 遁辭(둔사·도피하는 말)에 해당한다. 맹자는 浩然之氣章(호연지기장)에서 詖辭(피사·편벽된 말), 淫辭(음사·방탕한 말), 邪辭(사사·간사한 말), 遁辭 등 담론상의 네 가지 병통을 열거한 바 있다.

맹자는 夷之(이지)가 찾아오자 제자 徐僻(서벽)을 통해, 묵자의 사상을 따르는 夷之가 부모를 厚葬(후장)한 사실을 문제 삼았다. 서벽이 맹자의 말을 전하자 夷之는 유학의 말을 인용해서 묵자의 사상을 옹호함으로써 맹자의 비판에 응대했다. 서벽은 이지의 말을 맹자에게 전했는데 맹자는 이지가 유학의 親疎(친소)와 仁愛(인애)의 관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夷子는 兼愛(겸애)를 주장하면서도 부모의 상을 후하게 치렀다. 맹자가 그 이론과 실천의 괴리를 문제 삼자 이자는 ‘사랑에는 차등이 없되, 베풂은 어버이로부터 시작한다’라는 논리를 폈으며 ‘사랑에는 차등이 없다’는 논리를 강화하려고 ‘서경’ ‘康誥(강고)’편에 나오는 ‘古之人若保赤子(고지인약보적자)’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맹자의 관점에서 보면 夷子는 親疎와 仁愛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유학의 사상에 따르면 가족과 내외 종족의 사이에도 단락이 있고, 가족과 이웃의 사이에도 단락이 있다. 유학에 따르면 사람은 내외의 종족이 화목하게 되도록 깊이 관심을 쏟으면서도 親疏에 따라 각각 分誼(분의)에 맞도록 조처를 하여야 한다. 또한 仁愛의 실천에서도 나의 가족을 친히 여기는 것은 이웃 사람을 친히 여기는 것과 같을 수가 없다. 주자가 강조했듯이 유학의 사상은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기는 親親을 가장 중심에 두고, 거기서 백성을 어질게 대하는 仁民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동물을 사랑하는 愛物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且天之生物也가 使之一本이어늘 而夷子는 二本故也로다

묵자의 무리인 夷之(이지)가 부모를 厚葬(후장)하고는 유학의 말을 인용해서 변론하자, 맹자는 이지가 사랑에 本末厚薄(본말후박)의 차이가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이 자기 형의 아들과 이웃집의 아들을 사랑함은 본래 차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반드시 부모에 근본을 두며 그 근본은 둘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로, 마치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과 같다. 이에 사람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을 기반으로 그 사랑을 남에게 推及(추급)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本末厚薄의 차이가 있게 된다. 그런데 이지는 그 부모 보기를 길거리의 남을 보듯이 하고는 사랑을 베푸는 순서에서만 부모에게서부터 시작한다고 했으므로 논리상 모순이다.



‘사랑에는 차등이 없다’는 兼愛(겸애)의 설은 만민평등주의의 매력적인 이념이기는 하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모를 통해 출생하고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기에 부모를 우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물학적 조건을 소홀히 여긴 면이 있다.

맹자는 묵자의 무리인 夷之(이지)가 인간의 사랑에 本末厚薄(본말후박)의 차이가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제자 徐(벽,피)(서벽)을 통해 喪葬禮(상장례)의 기원과 인간의 본능에 대해 환기시켰다.

미안하고 부끄러워하는 생각이 안색에 드러나지 않는 사람을 鐵面皮(철면피)라고 한다. 인간이라면 다른 사람의 불행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는 마음인 不忍之心(불인지심)을 지니고 있다. 이 不忍之心이 안색에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는 철면피요, 그런 마음이 아예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부모는 至親(지친·지극히 가까운 분)이기 때문에 喪葬의 예를 잘 갖추어 보내드리지 않으면 사람은 더욱 심한 애통함과 절박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을 보면 인간이 자신의 근본을 먼저 존중하는 것은 일종의 본능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맹자의 주장이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