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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聲天意

solpee 2012. 6. 24. 16:13

선생은 청렴결백한 정치인의 표상으로 가난한 선비로 영원히 우리 곁에 계실 것이다

海公 申翼熙 先生 政治哲學
萬衆一心
國際協助
一心同德
集思廣益
合心同德
民聲天意


萬衆一心(後漢書 朱儁傳)

후한 때 朱儁會稽 사람으로 어려서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가 견직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효심이 지극했고 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여 널리 알려졌으며 현의 門下書佐가 되었다. 의를 좋아하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모두가 그를 존경하였다.

그 때 같은 군에 周規가 三公府에 가게 되어 군의 금고에서 백만 전을 빌렸다. 그러나 주규는 가난하여 갚을 수가 없었다. 이에 주준은 어머니 몰래 옷감을 팔아 대신 갚아 주었다. 어머니가 알고 이를 꾸짖자 주준이 말했다. "작게 손해를 보면 당연히 큰 이익이 될 것이고 처음에는 가난하여도 나중에는 부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小損當大益,初貧後富,必然理也)

交趾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주준은 交州刺史가 되었다. 주준은 회계군을 근거로 하여 5000명을 이끌고 남하한 뒤 한 달도 못 되어 평정했다. 나중에 교주는 주준의 아들로 생각되는 朱符가 다스렸다.

황건적이 일어나자 公卿 여럿이서 재주가 뛰어나고 전략이 있다며 주준을 추천하여 우중랑장이 되었다. 황건적 토벌을 하고 보니 영천에서는 좌중랑장 皇甫嵩이 제일이고 南陽에서는 주준이 제일이라 했다.

주준이 다시 황건적과 싸우게 되었는데 포위만 하고 지켜보게 되었다. 서둘러 공격을 해 보기도 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주준이 土山에 올라 바라보며 張超에게 말하였다. "적이 지금 포위가 되어 안에서는 크게 시달리고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소. 하지만 항복을 애걸해도 받아주지 않으면 나가려고 해도 나갈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려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한마음이 되면 감당할 수 없는데 하물며 10만 명이나 한마음으로 나오면 피해가 막심할 것입니다.(吾知之矣. 賊今週邊周固,內營逼急,乞降不受,欲出不得,所以死戰也. 萬人一心,猶不可當,況十萬乎!其害甚矣) 주준이 이같이 말한 뒤 곧 포위를 풀자 과연 황건적이 성문을 열고 나와 싸움을 걸었다. 주준은 이를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集思廣益

 

'생각을 모아 이익을 더한다'라는 뜻으로,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면 더 큰 효과와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제갈량의 문장 與群下敎.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諸葛亮(181-234)은 字가 孔明으로 瑯揶郡 陽都縣(現 山東省) 沂南 사람이었다.

漢나라 獻帝 建安 6년, 군웅이 다투던 시기였다.

유비는 조조를 공격했다가 실패하여, 荊州로 도망하여 劉表에게 의지하였다. 유비는 再起하기 위하여 인재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는 특별히 형주의 명사인 司馬徽에게 인재를 추천해줄 것을 청하였다.

사마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곳에 臥龍과 鳳雛가 있는데, 이들 중 한 사람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와룡"은 제갈량이고, "봉추"는 龐統이다.

당시, 제갈량은 양양성 서쪽 20리되는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초가집에 은거하고 있었다. 유비의 모사들도 제갈량이 걸출한 인재라고 생각하였다.

유비는 그를 초빙하여 자신의 천하 대업을 도와주기를 청하려고 하였다.

서기 207년, 유비는 장비와 관우를 데리고 직접 제갈량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처음과 두 번 째에는 그들을 피하며 만나려 하지 않았다.

 

유비가 세 번 째로 제갈량을 찾아갔을 때, 이른바 "三顧草廬". 제갈량은 직접 뜰에 내려와 유비를 맞았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밖에 있게 하고, 제갈량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유비와 제갈량은 천하의 형세를 이야기하며, 유비는 그에게 軍師가 되어주기를 청하였다.

제갈량은 유비의 성의에 깊이 감동하여 정치가이자 군사전략가로서 유비를 도와 천하 대사를 도모하였다.

曹操가 奸邪한 공포의 대상이었다면, 제갈량은 先見之明과 周到綿密함으로 敬畏의 대상이었다.

 

서기 221년, 제갈량은 촉나라 유비의 軍師와 丞相의 직을 맡고, 항상 허심하게 부하들의 의견을 청취하였다.

특히 여러 방면의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더욱 귀를 기울여 들었다.

 

한번은 제갈량의 일 처리가 치밀하지 못하였는데, 董和라는 관리가 이에 대하여 여러 차례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그와 논쟁을 벌였다.

이 일에 대하여, 제갈량은 동화를 질책하기는커녕, 오히려 한 편을 글을 써서 그를 표창함과 동시에,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견을 발표하였는데, 바로 이 글이 <與群下敎>라는 문장이었다.

 

제갈량은 이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 .... 丞相府에서 많은 관리들을 임용하여 국가의 대사를 돕고 공동으로 참여하게 하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고 각 방면의 유익한 건의를 널리 청취하기 위함입니다[夫參署者, 集衆思廣忠益也].

정확한 의견을 얻음으로써 일을 더욱 잘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를 범하게 될까 두려워하거나 논쟁을 피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과 다른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일에 손실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 "

 

이 내용은 에도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집사광익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유익한 점을 취하면 더 큰 효과와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類似語].丞董參署/一人計短 二人計長(일인계단 이인계장:한 사람의 꾀로는 모자라지만, 두 사람의 꾀면 충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