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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교구언

solpee 2011. 6. 27. 06:43

태종이 비록 형제의 피로 등극하였고 조선을 명의 신민의 나라로 전락시킨 나쁜 왕이었더라도 이렇게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잇었단다.누가 무슨 이념을 가졌더라도 백성이 편하고 살기 좋다면야 코보면 어떻고 째보면 어떠하겠는가?일자무식자라도 상관 않겠다.

이대통령도 바로 적용하면 말년이 밝아질 것이다

 

下敎求言(1403 太宗3년8월21일)

 

○丙寅/下敎求言:
王若曰, 予以否德, 纉承丕緖, 夙夜惟寅, 莫敢或遑, 期至于治。 然而災異屢見, 星辰失度, 水旱相仍。 矧玆海水變赤, 其爲譴告至矣。 予甚恐懼, 若隕于淵。 欲知致災之由而去之, 則未知其由; 欲求弭災之道而行之, 則未得其道。 以予寡昧, 何以堪之! 德行有闕而不自知歟? 政事有失而妄自行歟? 詞訟不平而冤抑未伸歟? 賦役不均而流亡未息歟? 忠邪混處而讒諂行歟? 紀綱不立而刑賞紊歟? 邊將失於撫循而士卒嗟怨歟? 奸吏巧於弄法而閭閻愁嘆歟? 咨爾大小臣僚閑良耆老! 其於致災之由、弭災之道, 各以所見, 陳之無隱。 言之可用, 卽加採納, 雖或不中, 亦且優容。 於戲! 惟修德可消變異, 固當躬行, 然求言欲廣聰明, 願聞讜議。

 

하교하여 求言하였다.
“왕은 이르노라. 내가 부덕한 몸으로 대통을 이어받아,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오직 공경하고, 감히 혹시라도 한가히 하지 아니하여, 다스림[治]에 이르기를 기약하나, 災異가 여러 번 나타나 星辰이 度數를 잃고, 수재와 한재가 서로 겹치며, 더구나 바닷물이 붉게 변하는 것은 譴告한 바가 지극하다. 내가 심히 두려워하여 못[淵]에 떨어질 것만 같다. 재앙을 부른 연유를 알아서 없애고자 하면 그 연유를 알 수 없고, 재앙을 없애는 방도를 구하여 행하고자 하면 그 방도를 얻지 못하니, 나의 寡昧한 몸으로서 어떻게 견디겠는가? 德行이 궐함이 있는데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가? 정사가 잘못됨이 있는데 망령되게 스스로 행하는가? 詞訟이 공평하지 못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펴지지 못하는가? 賦役이 고르지 못하여 유리해 도망하는 것이 그치지 않는가? 忠과 邪가 섞여 있어서 참소하고 아첨하는 것이 행하는가? 기강이 서지 못하여 형벌과 賞이 문란한가? 변방 장수가 撫摩를 잘못하여 士卒이 원망하는가? 간사한 아전이 교묘하게 법을 농간하여 마을 사람들이 근심하고 탄식하는가? 아아! 너희들 대소 신료와 閑良·耆老들은 재앙을 부른 연유와 재앙을 없애는 방도를 각각 본대로 숨김 없이 말하라. 쓸 만한 말이면 곧 채납하겠고, 비록 혹 맞지 않더라도 또한 관대히 용납하겠다. 아아! 오직 덕을 닦는 것만이 변이를 없앨 수 있으니, 진실로 마땅히 몸소 행하여야 할 것이나, 말을 구[求言]하여 총명을 넓히고자 하니, 바른 의논[讜議]를 듣기를 원하노라.”

 

批評(비평)

 

  세상사 복잡하다 보니 말과 침묵 사이가 궁금하다. 침묵하자니 속에서 열불이 나고,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신흠(申欽·1566~1628)이 말한다. “마땅히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잘못이다. 의당 침묵해야 할 자리에서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반드시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해야만 군자일 것이다(當語而嘿者非也. 當嘿而語者非也. 必也當語而語, 當嘿而嘿, 其惟君子乎).” 군자란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잘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말해야 할 자리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로 있다가, 나와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으면 소인이다.

  이항로(李恒老·1792~1868)가 말했다. “말해야 할 때 말하는 것은 진실로 굳센 자만이 능히 한다. 침묵해야할 때 침묵하는 것은 대단히 굳센 자가 아니면 능히 하지 못한다(當言而言, 固强者能之. 當默而默, 非至强不能也).” 굳이 말한다면 침묵 쪽이 더 어렵다는 얘기다. 조현기(趙顯期·1634~1685)말해야 할 때 말하면 그 말이 옥으로 만든 홀()과 같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면, 그 침묵이 아득한 하늘과 같다(當語而語, 其語如圭璋. 當嘿而嘿, 其嘿如玄天)”고 했다.

  공자가 말했다. “함께 말할 만한데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읽고,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은데 말하면 말을 잃는다(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할 말만 하고, 공연한 말은 말라는 뜻이다. ‘맹자’ “진심(盡心)” 하에는 이렇게 적었다. “선비가 말해서는 안 될 때 말하는 것은 말로 무언가를 취하려는 것이다.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낚으려는 것이다(未可以言而言, 是以言餂之也. 可以言而不言, 是以不言餂之也).” 꿍꿍이속이 있을 때 사람들은 말과 침묵을 반대로 한다.

  김매순(金邁淳·1776~1840)의 말이다. “물었는데 대답을 다하지 않는 것을 함구[]라 하고, 묻지 않았는데도 내 말을 다해주는 것은 수다[]라 한다. 함구하면 세상과 끊어지고, 말이 많으면 자신을 잃고 만다(問而不盡吾辭, 其名曰噤, 不問而惟吾辭之盡, 其名曰囋. 噤則絶物, 囋則失己).” 정경세(鄭經世·1563~1633)는 호를 일묵(一默)으로 썼다. 쓸데없는 말 만 마디를 하느니 차라리 내처 침묵하겠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침묵만이 능사가 아니다. 바른 처신이 어렵다. 말과 침묵, 둘 사이의 엇갈림이 참 미묘하다.

<정민의 世說新語>에서, 조선일보, 2011.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 진실한 뜻은 아마도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일 것입니다. 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도리가 아니며, 필요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귀만 아픈 수다일 뿐일 것입니다. 세상살이에서 늘 말 한마디 때문에 서로 싸우며, 원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좋은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솔한 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단점은 보이지 않으나 남의 단점은 잘 끄집어냅니다. 또 자신의 장점은 보이나 다른 사람의 장점은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단점을 찾아 고쳐가며 보완해가야 더 나은 자신을 개발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아내고 칭찬해주어 더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함께 더불어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공부하는 것도 진리를 바로 배우고 그것을 깨닫기 위함이며, 그 깨달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영위해 가기 위함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평하여 발전을 이끌어갈 수는 있지만, 그 비평이 비평받는 자의 가슴에 못을 박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을 비평할 수 있는 자는 그 사람보다 더 나은 모든 것을 갖추어야 가능한 것이며, 그 비평으로 인하여 비평한 사람이 발전해 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비평하려면 자신이 비평할 자격과 실력을 갖추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남의 말과 항간의 소문으로는 남을 비평해서는 안 되며, 비평하려는 논제나 작품이 있다면 자신이 먼저 모든 것을 철저히 검증하고 그것이 타당하다면 비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비평도 비평의 원칙에 의한 것이어야 하며, 비평자의 인신공격은 자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다른 사람의 뜻에 동조하여 남을 비평하거나 비방하는 마녀사냥 같은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며, 더욱 자신은 비평할 자격도 없으면서 남을 비평하는 것은 더더욱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실수가 없을 수 없으며, 그 실수로 인하여 더 발전해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단점을 함께 고쳐가는 아름다운 삶이 필요한 것이기에.....